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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작성일 : 13-03-20 17:57
"전태일 평전"에 대하여
 글쓴이 : 이종영
조회 : 984  

진보평론55호(2013년봄) 다시읽기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에, 20대를 보낸 세대들이 읽고 감동받았던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의 기록을 철학적으로 재음미하고 있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전태일 열사의 노동자로서의 경험은 지식인들이 아주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얻게 되는 계급적 통찰이라는 점에 대한 감동을 전한다. 철학하기 또는 이론적 통찰은 추상적인 말싸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천착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닐까? -편집자의 글

 


"전태일 평전"에 대하여


이종영/ 정치사회학 박사 

 

1.


"전태일 평전"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내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어떤 연구소에 막 취직을 했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곧바로 사서 읽지 않았다. ‘이론’에만 열심히 탐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성 싶다.

그 후 한두 해가 흘러서야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참으로 놀라게 한 것은 이 책의 이론적 성격이었다. 당시 나는 맑스의 청년기 저술들을 탐독하고 있었고, 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고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전태일은 헤겔과 맑스의 이론들을 매우 명증한 언어로 외쳐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사회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과학에 대해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은 전태일은 어떻게 헤겔과 맑스를 선취(先取)했던 걸까? 다음 문장을 보자.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傷)을 증오한다”(122쪽). 

이 문장 속의 표현들은 참 정확하다. 이 문장에선 한국의 석사논문들과 심지어 박사논문들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개념적 미숙성이 드러나기는커녕, 용어들이 완전한 의미들을 갖고 성좌(星座)를 이룬다. 마치 맑스의 이론이, 그리고 아도르노의 이론이 삶의 경험을 통해 내면에서 솟아나와 온전히 재생된 듯하다. “존재하기 위한 대가 = 물질적 가치로 전락”이란 등식은 맑스의 가치이론과 아도르노의 타락사(史)의 이론을 명쾌히 집약한다. 게다가 ‘인간상(人間傷)’이란 신조어는 얼마나 애틋한가. 다른 문장을 보자.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130쪽). 

이제 전태일은 맑스를 넘어서까지 나아간다. 전태일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의 모순을 말한다. “누가 잘랐을까?”라는 표현은 통렬하다. 그의 노동이 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하는’ 노동이기는 하지만, ‘그’가 하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전태일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말한다. 육체는 노동을 하지만 영혼은 다른 곳에 가있다는 것이다. 육체는 ‘분위기’와 ‘육감’ 속에서 노동을 한다. ‘몸의 무의식’이 영혼과 분리되어 노동한다는 것이다. 다른 문장을 하나 더 보자.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인간 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의적인 구속을…….”(131쪽). 

이 문장은 오히려 헤겔적이다. ‘외화(外化) → 자립화 → 소외’라는 헤겔적 소외 개념의 기본 구도가 이 문장 속에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다. 게다가 전태일은 ‘인간 본질’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립화해서 인간을 다시 구속하는 소외된 체제가 인간 본질을 배반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외된 체제가 인간의 본질을 배반하는지 또는 구현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알뛰세르는 문고판으로 출간된 "자본"에 서문을 쓰면서 “"자본"은 오히려 노동자들에겐 손쉽게 읽힐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론이 오직 삶 속에서만, 삶으로부터만 존재한다면, 노동에 관련된 이론들을 노동하는 사람들이 제일 빨리 이해하는 건 당연하다. 물론 삶에서 이탈한 이론들,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론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포퍼가 말한 “언어를 평이하게 사용해야 하는 의무”를 위반한 이론들이 많지만 말이다.

전태일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이론’을 발전시킨다. 물론 그의 ‘이론’은 어떤 학문적 형태를 취한 것이 아니라, 조각난 단편들, 겉보기에 초라한 단편들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의 인간 개념 등을 통해서 보겠듯이, 그의 이론들은 철학적 가치들을 지닌다. 아마도 그가 많은 교육을 받았더라면, 오히려 그의 ‘이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완서는 자신의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실상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분이고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분이셨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남에 대한 배려는 교양이 아니라 그렇게 타고 나셨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분의 천성이었다. 그분은 새로운 생명을 기쁘고 경건하게 마중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르는 일에도 지극 정성이셨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남에 대한 배려’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선 이것 두 가지로 충분하다. 그러나 학교는 이처럼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게다가 현대식 학교의 짜임새가 그러한 배움을 불가능하게 한다. 물론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생명에 대한 존중’과 ‘남에 대한 배려’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는 오히려 그러한 배움을 손상시키거나 깨트릴 수 있다.

박완서는 시어머니가 “자기 나름의 확고한 사랑법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법’은 사람에 따라서는 배우지 않고서도 아는 것이겠지만,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 오히려 잊어버리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자무식, 까막눈”이라 칭해지기도 했고 그저 막연히 “15세까지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최시형은 “하인을 내 자식 같이 여기며, 여섯 가지 가축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지 말며……어린아이도 하느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에게서 성스러움을 보는 최시형의 이런 입장은 그가 오히려 정통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전태일은 “진리란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211쪽). 이때 경험은 학교 교육에 의해 매개된 게 아니다. 학교 교육은 경험을 왜곡시킬 수도 있고 경험에서 양심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물론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양심’은 단지 주관적일 뿐이어서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의적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재 자체에 가닿을 수 없다는 칸트의 입장이나 누구든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를 겸손히 존중한다면, 우리는 경험에 따른 절실한 확신에 충실할 수밖에 없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로서의 양심을 경청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전태일이 당당하게 진리에 대해 말한다. “진리란 경험에 의한 양심의 소리”라고. 전태일은 자신의 절절한 경험을 부인할 수 없었고, 경험의 명령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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