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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작성일 : 13-06-27 17:14
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 부수기: 페미니즘 지식이론
 글쓴이 : 서영표
조회 : 1,027  

진보평론 56호(2013년 여름)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고전


서영표 제주대 교수/ 사회학


샌드라 하딩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나남, 2009.
다나 해러웨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동문선, 2002.

 

"진보평론"이 새로운 연재로 20세기 페미니즘 고전 읽기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위원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핑계로 참석률이 저조하여 나중에 원고청탁과 함께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미안하고 송구스런 마음에 원고청탁을 수락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글의 주제를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과 도나 해러웨이(Dona Haraway)로 하겠다는 무모한답장을 보내 버렸다. 그리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책 한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딩과 해러웨이의 글을 통해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평범한한국의 남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때로는 그것이 정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던 행동과 생각이 편견과 억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에 영향을 받아 대오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속 깊이 박혀 있는, 그래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남성성을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은밀히 그것이 가져다주는 특권을 즐기고 있는 를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 그리고 자기고백과 고발에 멈추지 않고 페미니즘 운동이 우리에게 던져준 많은 생각과 실천들을 미래의 정치적 실천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제목과 첫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문득 지난 511일에 있었던 맑스코뮤날레자본주의와 가부장체제, --보라, 새로운 주체형성발표와 토론이 떠올랐다. 필자의 발표제목은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그리고 녹색사회주의-불편한 동거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하이디 하르트만(Heidi Hartmann)의 고전적 논문을 약간 바꾸어 붙인 제목이었다. 글의 주장은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가 자신들만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정치적 투쟁의 자원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과문한 필자의 주장을 여기서 다시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의 글에 대한 토론자인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황주영 선생님의 논평이 이 글의 주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소개하려는 것뿐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논문의 제목은 녹색사회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페미니즘이 상당히 중요한 관련성을 가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4절의 마지막 단락에서 필자는 여성주의에 기초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주의운동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점, 몇몇 페미니스트 입장이 생태맑스주의와 공명할 수 있다는 점 정도이다. 따라서 녹색사회주의가 페미니즘에 기초한다는 것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글의 맥락에서 추론하자면 결국 그간 사회주의 담론과 운동이 부차적으로 여겨왔던 다양한 주체들의 차이와 조건을 인식할 때 필요한 통찰을 페미니즘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어떤 아이디어나 통찰, 태도나 관점, 새로운 가치 정도를 제공해 주는 선에서만 녹색사회주의와 관련되는 것인가? 이것은 녹색사회주의가 페미니즘에 기초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성긴 것이 아닌가?”

황주영 선생의 논평을 듣는 순간 서로 모순되는 생각이 동시에 생겨났다.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과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거의 같은 순간에 떠오르면서 혼란스러워졌다. 이 혼란스러운 생각은 뭘까? 다행히(?) 진행상의 문제 때문에 필자에게 답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말을 밖으로 내지 않은 채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이 당연한 것으로서의 나의 남성성을 흔들어 놓았을 때의 첫 번째 질문은 남성성은 무엇인가였다. 혼란스러움과 현실에서의 투쟁(필자에게 한 여자를 만나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은 그 자체로 투쟁이었다. 반쯤은 나의 남성성에 대한 투쟁이었지만 나머지 반쯤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는 남성성을 지키려는 반동적 저항이었다. 그래서 결혼생활은 언제나 오류의 과정이었고 동시에 학습의 과정이었다.)의 과정에서 당연함은 깨어졌다. 그런데 지금 필자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당연시하고 있는 페미니즘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라는 반대편에서의 근본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당연함을 부수는 데 기여했던 이론적 무기를 어느새 당연하고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반쯤 남아 있는 나의 남성성의 저항이 페미니즘이 주고 있는 커다란 울림과 깊은 통찰을 입맛에 맞는 대로 취해서 나는 남성 우월주의자가 아니라고전시하는데 동원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어놓고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 적은 없지만 페미니스트의 가부장제 비판과 남성중심주의 비판으로부터 배우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스스로를 여전히 보잘 것 없는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의 세계에 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반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반론에 대한 반론으로 철저히 부서지더라도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뭔가반론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이 글이 원래 주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다. 샌드라 하딩과 도나 해러웨이의 페미니즘적 지식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하딩이 페미니스트 관점이론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해러웨이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 사이보그로서의 인간이라는 주제를 연구해 왔다. 유인원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로서 사이보그라는 싱징내지는 신화를 통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동물,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상호침투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조건 속에서 고정된 정체성 또는 주체성을 주장하기보다 그 모든 모호함의 네트워크의 효과로 존재하는 사이보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이보그는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정치적 전략의 목표일 수도 있다. ‘사이보그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하고, 실천하고, 협상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해러웨이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을 염두에 두고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로의 입장에서 발표한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의 핵심 주장이다. 관점이론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과학의 문제로부터 한 발 물러나 포스트모던 사회구성주의로 이끌리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강한사회구성주의로 완전히 치우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에 관한 논문은 하딩(그리고 도로시 스미스Dorothy Smith, 낸시 하트속Nancy Hartsock, 힐러리 로즈Hilary Rose, 캐롤라인 뉴Caroline New 등과 함께)이 발전시키고 있는 관점(standpoint) 이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지식의 객관성 또는 중립성 문제를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딩과 해러웨이를 페미니즘적 지식이론을 다루면서 함께 논의할 근거가 생긴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앞에서 정상성부수기의 개인적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정상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깨어질 수 있다. 우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의 급진적 상대주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기에 공감한다)에 의해서 비판될 수 있다. 실재에 대해 언급하거나 규범적 기준을 주장하거나 모든 거대서사는 결국 독단과 독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강력한 비판은 그 중심에 선 남성의 과학과 남성의 지식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비나 라비본드(Sabina Lovibond)와 케이트 소퍼(Kate Soper)같은 페미니스트 철학자들은 포스트주의적 공격이 이론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에서는 효과적이지만 그 다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지적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는 실천적 투쟁을 무력하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이론가인 앤드류 세이어(Andrew Sayer)가 우려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지적 허무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 중의 하나가 하딩과 해러웨이의 이론적 투쟁이다.

페미니즘, 그리고 (하딩이 언급하고 있는)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착취 받는 집합적 주체들의 입장으로부터의 현실인식이 모든 종류의 규범과 과학의 근거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신중한 주장이 개진될 수도 있다. 억압과 착취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해야 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적 과학이라는 허상을 파괴하는 것인 동시에 특정한 주체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인식과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과 설명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지적 허무주의로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입장을 고정되지 않은, 그래서 현실과 다른 관점으로부터의 비판에 의해 언제나 수정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딩은 이것을 강한 객관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해러웨이가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가설과 연구방법이 남성중심적인 입장을 반영했는지에 대해 밝혀냄으로써 기존과학의 중립성의 신화를 깨뜨렸던 것처럼 하딩도 과학적 실천에 내재한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논리를 드러내고 비판한다. 하딩은 이러한 남성편향적인 과학을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입장을 크게 페미니즘 경험주의’(feminist empiricism), ‘페미니즘 관점 인식론’(feminist standpoint epistemologies),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feminist post-modernism)으로 분류한 후 첫 번째와 세 번째 입장을 비판하고 두 번째를 옹호한다. 하딩이 페미니즘 경험주의로 묶으려 했던 입장은 기존의 과학을 나쁜 과학’(bad science)으로 비판하고 진정한 과학적 규범을 적용한다면 좋은 과학’(good science)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주류페미니스트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딩이 보기에 이런 생각은 구조적인 억압과 착취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적 전통에 기초한 페미니스트 관점 인식론을 주창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딩이 제기하고 있는 강한객관성과 연결시켜 논의할 수 있다.

하딩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강한객관성이 비판하고 있는 객관성은 중립성과 불편부당함을 내세우는 객관성일 것이다. 여기서 중립성은 정치적 입장과 가치로부터의 중립을 의미한다. 과학은 정치와 분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딩과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중립성이 내보이고 있는 비정치적 성격만큼 정치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가치와 정치적 입장은 곧 특정한 사회의 지배하는 집단과 지배받는 집단, 억압하는 집단과 억압받는 집단, 착취하는 집단과 착취 받는 집단 간의 모순, 갈등, 투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스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지배, 억압, 착취가 없는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그것을 완화시키는 것이라면, 중립성이라는 허구적인 기준 뒤에 숨어 현실의 지배, 억압, 착취에 대해 눈감는 것이 아니라 지배받고, 억압받고, 착취 받는 집단의 관점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요청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과학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하딩은 이것을 강한객관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주의, 인종주의적 불평등, 이성애주의적 편견, 자본주의적 계급불평등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런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추상적 중립성은 지배, 억압, 착취에 대해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딩은 객관성은 중립성을 가장하지 않으며 공공연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립성의 포기가 곧 객관성의 포기 또는 과학적 실천과 설명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특정한 관점에 따른 현실의 해석과 설명 노력은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지만 과학적 지식은 결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해러웨이가 상황적 지식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도 이 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황주영 선생이 제기한 문제, 즉 녹색사회주의에서 페미니즘은 어떤 위치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그리고 녹색사회주의에서 필자는 과학적 지식또는 객관적 지식의 추구를 옹호하면서도 과학을 가치, 또는 관점과 관련시키려 했다. 주류적 과학과 지식이론이 과학의 영역에서 추방했던 감성, 감정, 느낌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하딩과 해러웨이처럼 중립성의 바깥, 공적인 장의 바깥, 과학의 바깥에 있었던 것들을 그 안으로 끌어 들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은 굳이 가부장제와 젠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페미니즘의 인식론 비판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읽혀질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주체의 상상된 행위를 전제로 한 죽어있는 사실(dead facts)의 수집일 뿐이다. 따라서 경제학을 현실을 설명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주체들의 경험으로부터 분석해야 한다. 돌봄, 애정, 정서적 유대가 배제된 지식은 죽어 있는 사실들의 수집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넘어서는 또 다른 과학으로서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이 출현해야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생태주의적 경제학이 논의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푸코가 보여주었듯이 지식-과학의 은밀한 공모는 인식될 수 있는 것, 말해 질 수 있는 것, 정상적인 것과 인식될 수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 비정상적인 것을 가르는 기준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근대적인 인식의 틀과 권력이 우리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지식이 대상, 과학적 실천의 근저에서 지식-권력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인식의 근저를 공격하고 깨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식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던 것이다. 황주영 선생님의 표현을 옮기자면 페미니즘은 어떤 아이디어나 통찰, 태도나 관점, 새로운 가치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과학적 지식을 근거 짓는 인식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페미니즘으로부터 찾아내는 것은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필자가 주장하는 녹색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결코 성긴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머물지 않고 비판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개척자로서 다양한 저항주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적 비판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인식론적 패러다임은 가부장제와 환경파괴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이미완결된 가부장제과 자본주의에만 매달릴 수 없다.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들의 지식과 의식, 그리고 능력(capacities)으로부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비판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낸시 하트속이 여성의 위치가 곧 페미니스트적 의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투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할 때 여성의 위치는 이론으로서의 가부장제를 의미하고 투쟁은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가부장제를 경험하고 느끼고 저항하는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과학과 지식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에 의해 새롭게 열린 과학적 실천과 지식구성의 장이 펼쳐져 있다. 하딩은 출발부터 좀 더 강하게 새로운 과학과 지식의 가능성을 개진한다. 해러웨이는 푸코처럼 비판적 보여주기의 전략을 고수하면서 현실적 실천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그리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투쟁과 실천)으로부터 얻어진 인식론적 패러다임은 사회주의와 생태주의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필자에게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에 기초한 녹색사회주의이며 그것은 필요에 기반을 둔 참여계획경제 모델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지면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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