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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시평
 
작성일 : 14-03-20 16:20
사회주의와 협동조합
 글쓴이 : 정상은
조회 : 703  

진보평론 59호(2014년 봄) 쟁점


사회주의와 협동조합

  

정상은 _ 노동당 당원, 지식협동조합 데모스 조합원

 

1. 들어가면서

현대인의 삶은 고달프다.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노동하기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아주 특별한 부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모든 수단과 능력을 동원하여 경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에서도 계속해서 스스로를 계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 삶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지배하는 일상으로 채워진다. 경쟁에서 뒤처지고 한번 낙오되면 다시 오르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우리를 지배한다. 사회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패배한 삶은 곧 존엄의 상실이며 생존권의 박탈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한 미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송두리째 돈벌기에 던져야 한다. 여기서 경쟁을 지속시키는 힘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이다. 미래의 불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쫓기듯이 살아가도록 한다. 삶은 시간과의 싸움이 된다. 이렇게 분주하고 치열한 일상은 우리 내면의 분노를 키운다. 삶을 되돌아보라. 모든 타자는 경쟁의 대상이며 무너뜨려야 하는 적대의 대상이다. 이제 적대는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우리는 멈출 수 없는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경주마이다. 죽는 순간까지 달려야 한다. 적대적인 일상은 이웃과 친지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공감하지 못하며 외부의 자극에 무감동한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우리 삶은 내면으로부터 무너진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협동조합이 주목받는 것은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열망의 표현일 수 있다. 인문학 열풍이나 힐링 광풍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정부도 적극적 지원에 나섰다. 서울시가 협동조합 및 일련의 사회적 경제운동 지원에 나서면서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지역커뮤니티, 마을만들기사업 등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한겨레신문과 프레시안 등도 협동조합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각종 사회혁신기업가 발굴을 위한 광고나 사회적 경제 교육안내판은 이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은 소비자의 먹거리 문화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 먹거리 생협에 한정되던 협동조합이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발효 이후에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세분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각에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쓰러져가는 자본주의의 산소호흡기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에 주목하여 시민의 자발성에 기초해서 만들어졌음에도 시장화되거나 혹은 제도화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체제 내로 깊숙이 흡수되어 가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의 현재 상황을 비판적으로 되짚어 보려 한다. 특히 협동조합기본법 발효 이후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는 협동조합들은 식민지시대 때부터 시작된 관이 주도해서 만들어왔던 관제협동조합과 새마을운동처럼 권력을 위한 국가장치의 말단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협동조합의 이념적 내용으로 소개된 사회적 경제가 가지는 인류학적 시각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의도와는 달리 신자유주의의 체제유지를 위한 국가장치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이 곧 협동조합 무용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좌파는 협동조합운동이 가진 장점을 이해하고 협동조합을 현장화할 수 있게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2.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1) 사회적 경제로서의 협동조합

산업화시기에 태동했던 협동조합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다. 협동조합 운동이 현대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계기는 1960년대 말부터 전개된 완전고용의 종결과 복지재정의 축소, 그리고 그로인한 다양한 영역에서의 양극화라고 할 수 있다.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했던 서구에서조차 다시 대두된 배제와 결핍의 시대에 충족하지 못하는 사회적 필요를 집합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주체들이 생성”(장원봉, 2008)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기존의 합법적 기업형태인 협동조합의 형식을 활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새롭게 등장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을 매개로 전개된 시민집단의 활동을 사회적 경제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는 시장을 인간화하고……국가와 시장에 의해서 충족되지 못하는 다양한 시민사회의 필요에 대응한다는 사회적 목적을 가지고, 폭넓은 시민사회의 주도성과 그것들의 결속을 보장하는 참여주의 모델로서 사회적 소유를 실현하며, 호혜와 연대의 원리를 토대로 축적되는 사회적 자본에 기초한, 경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정치사회적 개입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장원봉, 2007).

그러나 필자는 사회적 경제의 의미 있는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가 그 내용의 한계로 인하여 현실의 적대성과 저항운동을 설명하지 못하며 대안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를 돌아보면 협동조합 운동은 오랫동안 좌파운동의 한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맑스가 협동조합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은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오랫동안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이는 맑스주의자들이 협동조합운동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는 메커니즘으로 파악했기 때문이고 시장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형태의 조직을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의 틀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운동과 분리되면서 순전히 경제적 조직으로, 즉 비정치적 운동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모 과정은 거꾸로 보면 노동운동이 협동조합으로부터 분리되어 노동조합운동으로 축소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조합은 처음에는 비밀결사의 형태로 시작했고 협동조합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운동과 동일시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고 이와 분리된 협동조합운동은 정치적 내용이 부재한 경제적 조직의 성격만 갖게 되었다. 이는 오랜 기간에 걸친 협동조합운동의 우경화와 기업화 경향으로 귀결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맑스주의자들이 협동조합을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의 패러다임 안에 논리적으로 포괄하고 그것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면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경로는 사뭇 달랐을 것이라고 본다. 불행히도 오늘날 협동조합은 맑스의 언어가 아니라 칼 폴라니의 언어로 설명된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의 협동조합 운동은 사회적 경제운동의 맥락에서 부흥기를 맞고 있다.

2) 협동조합의 긴장과 가치

협동조합의 가치는 자조와 자기책임, 민주주의와 평등, 공정, 연대라고 한다. 특히 조합원의 필요를 민주적으로 조직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협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가치들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협동조합이 결사체이면서 동시에 상품을 생산, 유통하는 사업체이며 바로 그 때문에 일종의 어긋남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의 우경화는 대부분 시장 안에서 생존해야만 한다는 현실에서 연원한다.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이 어긋남을 벗어날 근본적인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이 지향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 끝없이 방해를 받는 셈이다. 완전한 민주적 결사체라는 제1의 원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해방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은 사회주의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 가치는 현실운동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경향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근래 들어 협동조합은 소자본을 요구하는 사업부문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대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하는 분야는 주로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들의 주무대가 되고 있는데, 이들이 포괄하기 어려운 부문 중 소규모 자본 출자로 창업이 가능한 부문에서 협동조합의 진출이 활발해 짐으로써 두 형태의 역할 분담이 가능해 진다고 할 수 있다. 시장 기제를 통해 통합되면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Roger Etkind, 1989). 협동조합은 결국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이 곧 시장 기제에 포섭되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데 일조한다는 비판은 일면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협동조합의 형식 이면에는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주변화 된 사람들의 불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된, 충족되지 않는 필요가 협동조합운동의 강력한 동기라면-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협동조합을 시장과 자본의 일부라며 단칼에 잘라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협동조합 운동에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삶의 필요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홀로웨이가 말한 것처럼 전체사회를 단번에 이행시킬 수 있는 그런 장치는 없다. 배제된 자들의 필요에 의해 조직되는 협동조합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제제기이다. 이런 것들이 균열을 만들고 대항적인 제도와 정치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협동조합이 사회주의적인 장치냐 아니냐 하는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정부차원에서 협동조합 만들기를 권장하면서도 협동조합들이 시장에서 생존할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았다. 그래서 한형식도 기대효과가 실현되려면 우선 협동조합이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협동조합에 맞는 산업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거시적 산업정책의 틀 안에서 국가나 대기업이 담당하는 영역과 중소기업이 담당하는 영역 구분을 명확히 하고, 그 토대 위에서 협동조합의 사업 영역을 구체적으로 배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한형식, 2013). 하지만 협동조합이 생존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영역을 보장하는 것은 정부의 선의에만 의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적 역관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서구사회에서 복지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이 정부에의 요구와 협상이 아니라 계급투쟁과 계급역관계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다시 협동조합 운동과 관련짓는다면 협동조합운동이 원래 가지고 있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단 이러한 지적을 구조적 변혁이 우선인가 아니면 운동이 우선인가라는 소모적 논쟁의 맥락에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사회운동의 결과가 제도의 변화로 드러나며 변화된 제도와 그것을 움직이는 규범의 변화는 사회운동의 새로운 조건이 된다는 측면에서 두 가지 문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는 인과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에서의 협동조합운동의 발전

문헌상으로 확인된 한국 최초의 협동조합은 1920년에 설립된 경성소비조합과 목포소비조합이다. 그 이후 동경유학생, 천도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다. ‘조선협동조합운동소사에서 함상훈은 조선에 협동조합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1919년 이후로서, 경제적인 자립 없이 정치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선민중이 1개 군 또는 2개 군에 하나 정도로 소비조합을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일제는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위원장을 검거하고 탄압했지만, 어려운 농촌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민간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협동조합의 규모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어서, 1932년에는 조합 80여개, 조합원 2만여 명이 되었다(김기태, 2010). 그 외에도 천도교계 민간협동조합운동 또한 1932년 당시 전국적으로 181개 조합에 38천명의 조합원이 활동했다. 기독교계 또한 전성기에는 720개의 조합이 있었다. 그렇지만 일제는 협동조합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탄압을 계속했고 결국 해산명령을 내림으로써 식민지 시대의 자생적 민간협동조합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반면 관제 협동조합은 1907금융조합이 설립되면서 시작된다. 총독부의 철저한 지도를 받으면서 운영되었던 금융조합은 1929년 일반금융조합으로 변질되었고 1933년 전국단위 조선금융조합연합회를 설립하여 대규모 은행조직으로 바뀌면서 협동조합적 성격은 완전히 사라진다. 금융조합의 변질로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총독부는 산업협동조합을 별도로 만들었다. 산업협동조합은 1940년에는 조합 115, 조합원수 22만 명까지 확대된다. 그 외에도 어업조합, 산림조합과 같은 관제협동조합이 꾸준히 성장한다.

이러한 관제조합은 그 후에 다양한 조합결성의 요구에 힘입어 1952년 사단법인 농촌실행협동조합, 1956년 주식회사 농업은행, 1957년 농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어 1958년 농업협동조합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농협이 만들어 지는 것은 1961년 농협과 농업은행의 통합에서 비롯된다. 수협과 산림조합 또한 1962년 대한산림조합연합회가 발족되면서 식민지 관제조합의 물적 기반과 조직을 그대로 가져가며 무엇보다 총독부 산하의 관변단체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렇게 한국의 농촌지역은 관제협동조합을 통해 발전하고 성장한다. 그 후에도 1971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작목반을 육성하는 등 관제협동조합은 농촌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80년대 이후 등장하는 협동조합의 역사는 생협운동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1986년 한살림운동을 시작으로 식민지 시절 일제의 탄압으로 단절된 협동조합의 역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후 아이쿱, 두레생협, 여성민우회생협, 주민생협 등이 발족하면서 한국 생협운동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생협운동은 각각의 생협조직의 정관에서 드러나듯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으며 탈자본주의적 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던 어긋남에서 생협은 점차로 시장과의 경쟁에 내몰리게 되면서 시장성을 강화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윤병선에 의하면 생협의 대규모화 따라 친환경유기농산물에 대한 독점적 공급에 기초한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선택한 덕분에 고속 성장할 수 있었지만 대형매장과 경쟁해야하는 지역협동조합의 경우는 대단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유병선은 연합체로 거대화된 생협조직이 선언적인 의미에서만 도농공동체에 머물렀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생협을 시민운동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생활재를 구매할 수 있는 매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먹거리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유기농업이 관행농업화 되면서 생산자들은 수익을 쫓아서 친환경 유기농업을 선택하고, 소비자는 웰빙이나 로하스의 열풍을 따라 유기농산물을 찾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유기농업이 본래 갖고 있는 생태적 의미나 생협의 사회운동으로서의 의미가 급속하게 퇴색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경쟁적으로 매장을 늘리며 일반기업과 다름없어진 생협은 관제협동조합인 농협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역협동조합의 성장에 직접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생협운동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는 과연 얼마나 진보적일까?

4) 협동조합운동과 정부개입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이 실제로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는 2000년 자활지원사업, 2003년 사회적 일자리 사업의 시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2006사회서비스공급확충사업’, 2007사회적 기업육성법이 제정되면서 신문들은 사회적 기업이 답이라는 사설을 다투어 실었다. 지금은 협동조합이 이를 대신한다. 여기에 더해져 이제는 마을기업, 지역커뮤니티, 마을 만들기 등이 사회적 경제 조직에 포함되면서 시민사회를 새롭게 색칠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업들이 대부분 정부의 주도 아래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공동체로 이어지는 정부지원 사업은 지원을 넘어서 사실상 정부주도 사업으로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 첫째는 협동조합이 저임금 일자리사업으로 비판을 받아왔던 사회적 기업 인증사업의 연장선에서 지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사회적 기업이 고용이라는 점에 치중해 왔다면 협동조합은 일자리사업을 넘어 공동체 경제를 통한 다양한 효과를 염두에 둔다는 점이다. 이는 공공사업을 외주화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은 공공부문의 민간위탁사업처럼 작동한다.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민원이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게 되면서 모든 문제는 사업주나 그 지역주민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또 우려할 것은 민간위탁은 대부분 복지 축소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복지는 주민과 민간 기업이 해야 하는 영역으로 되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옹호자들은 교육, 보건, 교통, , 산림관리, 전기 등 그간 국가가 담당해 오던 공적영역을 협동조합이 담당하는 것이 더 우월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이 시장의 힘에 좌우되며 쉽게 시장화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협동조합이 국가의 공적영역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이 시장화 되지 않을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자율성과 제도적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 정부의 개입은 사회적 경제를 체제내화 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에 와서 권력은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방식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권력은 동의에 기반해 작동하고(그람시), 사람들을 특정한 종류의 존재로 호명하여 주체로 구성한다(알튀세르). 즉 개인을 특정한 주체로 만들어 자발적으로 권력을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권력의 작동방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서울시의 마을 만들기와 같이 주체성과 자립성을 강조하는 전략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전략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통치전략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관제협동조합의 경우에도 총독부의 일방적인 설립이 아니라 농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해방 이후 농협 또한 설립을 요구하는 주체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사회적 경제를 국가장치로 성공적으로 통합했던 외국사례가 더해지면서 상당히 세련된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순응적 주체의 생산으로서의 권력의 작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문제가 국가가 아니라 사업주나 이사들에게 돌려짐으로써 자발적인 풀뿌리운동과 시민운동에서 출발한 참여자들의 의식과 행동양식이 점차 자본주의적 기업의 행동양식을 닮아가게 되고 국가정책을 옹호하게 된다. 따라서 관주도형으로 만들어지는 협동조합은 저항주체의 생산이기는커녕 운동주체의 저항적 성격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협동조합운동은 이미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첫째, 자발적인 사회적 경제 운동(한국의 경우는 주로 생활협동조합)과 관 주도로 조직되는 새마을운동, 마을 만들기와 같은 사회적 경제 조직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시장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벗어나려는 지향을 가진 자발적인 생활협동조합과 정부의 물적-제도적 지원 속에서 대량 생산되는 협동조합은 출발이 다르다. 하지만 비록 그 경로는 다를지라도 자본과 시장의 막강한 힘과 마주하게 되면 자본주의 안으로 체제내화 되어 간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시장은 국가의 각종 장치를 통해서 재생산되며, 그렇기 때문에 시장의 논리를 따르게 되는 것은 제도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여기서 제도화는 구조로서 행위자들에게 강제되는 것만이 아니라 제도라는 구조적 조건 안에서 행위 하는 주체들과 구조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구조의 변형까지를 포함한다. 자본의 논리는 지속적으로 협동조합운동이 가지는 탈자본주의적 지향을 시장화 함으로써 이러한 상호작용이 동반하는 운동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운동의 과정은 그 안에 여전히 협동조합으로 드러난 변화의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질문은 왜 한국에서는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국가장치와 그리 쉽게 통합하는가이다. 정부의 주도아래 사회적 경제 사업이 진행되는 국가는 한국뿐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한국의 경우 사회적 경제에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으며 관의 의도대로 진행된다. 관료가 기획하고 사회단체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형국이다. 이러한 행태는 앞서 지적한 신자유주의의 통치전략이 행사되는 일반적인 모습과 더불어 분단과 전쟁, 그리고 식민지 경험에서 만들어진 국가 주도의 통치력, 혹은 과잉통치력이라고 부를만한 체제구조적인 특수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국가권력은 시민사회에 대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권력 행사의 관행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우위에 기반 해 다양한 담론을 유포하고 저항을 전유하여 제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건들 덕분에 시민사회는 상대적으로 더욱 약화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적 통치전략은 더욱 더 위력적으로 발휘된다.

 

3. 사회적경제의 문제들

1) 사회적경제의 공백들

사회적 경제는 19세기에 시작된 결사체사회주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유토피아 사회주의라고 알려져 있는 이들은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대에 와서 이들의 사상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와 관련을 갖는다. 협동적 경제를 옹호했던 마르셀 모스에게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 혁명은 사회주의혁명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공산주의(그는 이것을 으로 간주했다) 혹은 테러주의였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맑스주의는 경제주의이거나 계급환원론에 불과했다. 칼 폴라니는 경제가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다가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면서 그 둘은 분리되어 경제가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될 수 없는 대상들인 토지, 노동, 화폐를 허구적상품으로 만듦으로써 문제를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폴라니의 대안은 맑스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는 공동체적이고 상호호혜적인 경제건설이었다. 폴라니와 모스의 맑스주의 비판과 협동적 경제에 대한 구상은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더불어 다시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와 모스의 주장은 약점을 가진다. 폴라니는 왜 허구적 상품이 자본주의에 와서 탄생되며 어떤 사회적 힘이 경제와 사회를 분리시켰는지를 밝히지 못한다. 더구나 국가의 수탈문제를 기각하고 국가를 단순히 재분배를 위한 기관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과학적 시각은 조야하기까지 하다. 현대자본주의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폴라니에게 이런 문제들은 부차적이다. 무엇보다 장원봉이 말한 것처럼 사회적 경제가 개입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 플랜을 제시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와 비판이론이 존재해야 하는데 주지하다시피 폴리니와 모스에서 출발하는 사회적 경제 개념에는 정치가 비어 있다. 김성윤은 사회적 경제 담론이 사회적인 것=윤리적인 것=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면서 사회적인 한 그것이 정답이라는 이론적 독단에 의해, 정치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현실에서는 국가권력이 문제적이라 토로하면서도 담론에서는 국가를 협상의 대상으로 중성화하는 관습은 사회적 경제 담론이 국가와 자본의 동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방증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19세기의 문제가 자본주의 산업화와 시장경제라는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실업과 복지후퇴라는 좀 더 좁은 범위로 초점화 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꼬집는다(김성윤, 2013).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한다면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는 과거에 비해 온순하며 국가가 손쉽게 관리할 수 있는 정도의 개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사회적 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결여하고 있고, 따라서 계급과 적대를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적 개입이 없는 자족적인 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낭만적이며, 이러한 입장은 사회구조에 대한 변화를 고려하지 못한 채 착한경제와 같은 도덕주의적인 결론으로 경도된다. 이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를 내부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을 전략으로 하는 사회주의와는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일정한 긴장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게 된다.

2) 호혜성, 상호성과 등가교환의 문제

사회적 경제를 옹호하는 이론들은 시장경제 이전에는 호혜의 원리가 사회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해석한다. 인간은 원래 호혜적 동물이며 시장경제가 인간을 망쳐놓기 전에는 선물경제가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선물경제는 당시의 인간이 더 인간적이고 호혜적이라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생존과 잉여에 대한 처리,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 내의 위계를 생산/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상호성은 호혜성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좀 더 광의의 개념이다. 마르셀 모스는 인류사회의 선물 주고받는 과정에는 세 가지 종류의 의무가 있는데 그것들은 선물을 주어야 하는 의무, 선물을 받아야 하는 의무, 그리고 받은 선물에 언젠가는 보답해야 할 의무를 말한다고 하였다. 인간은 선물을 받으면 고마워하고 답례를 한다. 혹시나 답례를 못하면 사람마다 다르지만 미안해하고 때로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것이 상호성이다. 모스는 자본주의는 이 상호성을 파괴했으며 그 자리에 악마의 맷돌을 가져다 놓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는 증여론을 통해서 자본주의적인 등가교환세계 이전에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는 선물경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등가교환, 비자본주의=상호성이라는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 한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좀 더 논의를 진전시켜보자.

상거래 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흥정은 욕망의 상대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지금은 재래시장에 가도 흥정하는 장면은 보기가 힘들다. 대신에 가격정찰제가 일반화되었다. 사람마다 필요의 정도는 다르며 욕망은 상대적이다. 그런데 가격정찰제의 시행은 인간세계에는 어떤 추상, 평균적인 욕망이 있으며 가격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진실은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가격정찰제란 결국 기업이 받고 싶은 가치량일 뿐이다. 그것은 자본가가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의 우위에 있음을 증명한다. 이제 흥정은 없고 교환과정에 개인의 특수성이나 문화적인 차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등가교환(정찰제)은 교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특수성, 계층이나 인종, 애정과 같은 문제들을 제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이 완전히 파괴될 수는 없다. 등가교환은 사회로부터 시장을 분리하려 하지만 이는 현상적인 모습일 뿐이며 흥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각종 교환방식들은 여전히 상호성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기업에서 만들어진 상품만 교환하지 않는다. 화폐를 사용하는 것만이 교환인 것도 아니다. 알트파터에 의하면 상호성은 통상적으로 레스토랑에서 공동으로 식사를 할 때 어떤 사람은 더 많이 또 어떤 사람은 적게 먹고, 어떤 사람은 비싼 음식을, 또 어떤 사람은 싼 것을 먹었는데도 식사비용을 사람 수로 나누어서 각자에게 부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한 반에서 모든 학생들이 교사의 지도를 받을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 교사가 그런 아이들을 더 집중적으로 돌봐주는 것에서 상호성은 이어진다고 한다(엘마 알트파터, 2007: 262). 상호성은 다양하게 규정된다. 이는 상호성이 그 사회의 정치,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만이 가지는 고유한 정치, 문화적 속성에 따른 교환이다. 마찬가지로 선물을 받고 어떤 것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문화적 전통에 달려있다. 현실에서는 상호성과 등가성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3) 생산자-소비자 프레임과 소비자 주체

신자유주의가 변화시킨 생활양식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시장관계, 그것도 시장의 표층적 관계 즉 상품공급자와 소비자라는 관계가 전면화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전면적 소비사회가 도래했다. 시장은 허구적 욕망을 생산하고 이것을 토대로 이윤의 확장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은 이제 생활양식을 쾌락주의적 모델로 만들어 간다. 학생과 학부모는 소비자, 선생은 공급자인 학교에서부터 관공서와 문화산업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생산자-소비자 관계를 설정하고 재생산한다. 생협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생활양식의 변화에 정확하게 조응한다. 자립적 주체를 강조하며 윤리적인 소비자로서 살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자-소비자 프레임은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망각하게 할 뿐이다. 또 더 나은 먹거리를 성역화 하면서 서민들의 현실과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리시켜버린다.

맑스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자본주의는 실재의 관계가 등가교환(화폐를 매개로 하는)에 의해 은폐되는 체제이다. 교환영역에서는 오직 상호 독립적인 구매자와 판매자가 대면한다. 결국 윤리적 소비라는 구호 속에서 생협운동은 시민=소비자를 고착화시킨다. 생협은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대기업 유통의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일정한 소득수준 이외에는 사실상 생협 이용이 어렵고 각종 소모임도 자기물품판매, 선전을 위한 것으로 조직된다. 결국 이는 특수하고 기발한 영업방법을 사용하여 성공한 기업의 한 형태와 다를 바 없고 생협을 포함하는 사회적 기업은 새로운 주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쪽으로 기운다. 생협은 점점 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개별적 권리에 충실한 소비자운동 이외에 어떤 전망을 제시한다고 볼 수 없다.

 

4. 사회주의의 차원으로서의 민주적 계획필요개념

사회주의는 민주적인 계획경제의 요소가 필요에 의해 조직되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 필요는 측정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욕구는 다양하고 개인의 필요는 사회적, 문화적인 영향뿐 아니라 개인적 기호에도 좌우된다. 부분적이지만 지역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에서는 한 가정의 수요를 예측할 수 있는 자료들을 축적할 수 있다. 의료체계가 잘 갖춰진 영국의 지역에서는 의사들이 동네사람들의 의학적 필요를 충분히 예측한다. 협동조합과 같은 공동체 경제가 발달한 곳에서는 조합원의 필요를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다. 무상학교급식은 학생들의 점심 식사량을 완벽하게 예측한다. 각종 공동체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동체에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좀 더 큰 지자체들이 담당할 수 있다. 결코 완전한 계획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화된 시장과 민주화된 국가는 이 공동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들을 보완할 것이다.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경제와 등가교환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이제 적절하게 조절되고 통합된다.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의 필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중산층의 소비자운동으로 조직된 생협에서 조합원의 필요란 기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는 조건에서 시장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인의 갖가지 욕구일 뿐이다. 이는 조합원 교육을 통해 합리적 소비자로서의 통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협동조합이 조합원의 필요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공동체 안의 사람들의 필요는 민주적 계획을 통해서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삶의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필요는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고 싶은 욕망과는 다르다. 불행히도 현재 생협이 일깨우고 있는 필요는 노동자들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욕망에 가깝다. 왜냐하면 필요는 생존과 복지를 위해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지 시장을 통해 구매력에 따라 차등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협이 강조하는 조합원의 필요는 가격으로 환원되는 소비자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노동자의 충족되지 않은 근본적인 필요는 자본주의 자체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교환영역의 등가교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감추어진다. 관건은 협동조합이 노동자의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근본적인 필요를 드러내 보여주고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변혁의 전략은 노동자 대중의 근본적 필요욕구가 반자본주의적 충동으로 재생산되는 공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5. 협동조합의 대안에 대한 이해

협동조합은 자본의 필요를 위해 노동을 고용하는 주식회사와 달리 노동의 필요를 위해 자본을 고용한다. 이러한 점은 협동조합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보여준다. 협동조합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예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민주적 실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이 지향하는 근본적 가치는 평등의 원리가 현실의 불평등과 만나서 정치화됨으로써 다양한 민주적 원리가 구체적으로 지역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이 시민 권력으로서의 저항주체를 생산하고 의미 있는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1) 협동조합은 공통자원의 공동소유를 재건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새로운 발명은 기업의 소유물로 보호 받는다. 하지만 어떤 과학적 발명도 그 사회의 공공적 지식과 생산력과 무관하게 탄생하지 않는다. 당대의 지식은 누적된 생산력과 지식으로부터 생산된다. 그러한 이유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그 사회적 부의 횡령이며 사회적 부의 폭력적 전유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협동조합 운동의 하나의 대안으로 공통자원개념이 제안되고 있다. 장훈교는 공통자원의 개념은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협동조합을 통해 생산되는 것은 공통자원(the commons)이기 때문에 상품의 유통 과정을 조정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좌파의 대안은 공통자원의 유통을 위한 전체사회의 조직화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지적한다.

공통자원이란 우리 모두에게 상속되었거나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선물이며”(Barnes, 2006:4) 공동체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고 동시에 구성원 모두가 향유하는 대상을 지칭한다. 이는 무엇보다 구성원 모두의 공통의 필요에 근거한다. 추측할 수 있듯이 유럽의 공유지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 공통자원 개념은 자연환경과 토지를 의미했지만 이제 지식과 정보,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연대관계까지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오픈소스 운동, 그리고 다양한 유형의 지식창조물을 공유하는 현대의 디지털커먼스 운동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이 새로운 유형의 개념화는 공산주의 운동의 오래된 이상인 공동소유 개념을 현대적인 지평에서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공통자원 개념은 협동조합이 국가가 운영하는 다양한 공공의 공간을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대안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그 자체로 공통자원이므로 생태주의와 결합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2) 협동조합은 의미 있는 노동을 찾는 운동이어야 한다.

노동자는 노동의 결과물을 자기의 것으로 삼지 못함에 따라 타율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은 자율적인 동기에 의해 자신의 실현이라는 노동의 원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자율적인 노동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혹은 보상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사회주의에서의 중앙계획통제 속의 노동조차 정당한 대가를 보장하지 못하였다. 또한 노동이 생존의 욕구를 넘어서고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강제되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본질을 은폐시키는 각종의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임노동관계는 폭력 속에서만 가능한 강제된 관계임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의미 있는 노동을 원한다. 삶의 필요에 의해 능력껏 노동하길 원하며 노동이 자아실현의 열망을 충족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 협동조합은 자주관리제를 지향한다. 협동조합은 노동을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의 목적으로 복원하기를 갈구한다. 의미 있는 노동은 자신의 필요에 입각한 노동이다. 물론 모든 임금노동이 완전하게 의미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금전적 보상을 통해 자기실현을 평가하는 체제이다. 또한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은 노동이 강제되는 것인 한 불가능하다. 사회적 개인에게 의미 있는 노동이란 노동이 사회적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노동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노동자체가 목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3) 협동조합은 대중운동의 경험적 지식을 조직하고 공유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협동조합이 의미 있는 것은 바로 대중적 참여를 조직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역사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던 대중과 단절된 조직운동의 한계들을 실천적으로 비판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생협운동조차도 이 원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만 대중을 조합원으로 조직하고 소모임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는 다른 조직운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중 활동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노동/당운동은 2004년 이후 급속도로 제도화되면서 사회운동과 분리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중운동의 경험까지 함께 유실되었다. 특히 대중과 같이 호흡하면서 고통과 즐거움을 나누는 우애에 기초한 운동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정당은 선거공학에 기반을 둔 운동으로 전락하고 노동운동은 조합주의에 매몰되어 왔다.

과거 사회주의 운동은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며 이른바 과잉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평균이윤율이나 자본순환을 분석하는데 영국과 한국의 질적 차이가 이론화되지 않으며 단순적용만 문제가 된다. 보편성은 언제나 서구에서 발원되고 한국은 그것의 적용가능성만을 이론화한다. 사회적 경제 개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러한 과잉보편성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얻어지는 경험지식을 부차화 시킨다. 하지만 현실운동에서의 지식이란 단지 전문연구자의 학술적 저술로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활동 공간 내부에 얻어지는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 오히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종종 전문적 연구자들의 저술은 이렇게 얻어진 암묵적인 경험지식을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정치 공동체가 대중운동에 근접할수록 경험적/실천적 지식은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실천적 지식은 기존의 이론과 노선으로 포괄되지 않으며 이론이 말하지 않는 많은 영역을 포괄한다. 여기서 이론은 일종의 외부의 지식이며 실천적 지식을 검증하는 비교 자료이거나 경험적 지식을 보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념과 노선으로 포착되지 못하는 경험적 지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포괄하는지가 사회주의운동의 최대 관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험적 지식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를 떠나면 그 의미가 반감되기도 하지만 공동의 지식으로 조직되었을 경우 공통의 문제를 더 쉽고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공동의 실천을 통해 개인이 경험하는 정치적 사건을 공유하고 공통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협동조합은 경험적 지식을 조직하기에 적합하며 이것을 적절하게 공유할 수 있는 민주적인 소통구조를 만들 수 있다. 앞서 말한 민주적 계획경제의 핵심은 경험적 지식의 조직이다. 이 경험적 지식을 어떻게 구성하며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어떻게 연대를 통해 지식을 생산, 분배하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6. 마치면서

협동조합이 우리의 현장이 되며 정치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좌파의 언어로 해석하고 개념화하여야 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대안이 실제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실험되고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협동조합에서 자신의 조직형태를 대의제도와 선거제도만으로 국한한다면 그 협동조합은 상식을 넘어서지 못한 채 이미 주어진 매우 제한된 민주주의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협동조합을 제도 안에 멈추어 서게 한다. 따라서 협동조합을 국가의 장치가 아니라 사회의 장치로 만들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민주주의를 급진화시켜야 한다.

자발적인 협동조합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의 폭력성을 도덕적으로 제어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이 비록 협동조합을 대안으로 생각했을지라도 그 결과는 상당히 참담했다. 한국의 생협이란 주식회사의 모기업이며 세련된 마케팅일 뿐이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미리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협동조합은 텅 빈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타자를 억압하는 권력이 될 수도 있고 변혁의 주체를 생산하는 경험적 지식의 보고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비판적 사회이론의 틀 안에 협동조합을 위치 짓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 현재의 조건 속에서 협동조합운동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성찰적 비판이 생겨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운동과 당 운동에서 생겨나는 탈자본주의적 비판이 협동조합과 조우하여 그것을 정치화시킬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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