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LOGIN | 구)진보평론 홈페이지 가기| 이론지 보러가기  
 
특집·기획
좁쌀 한 알 장일순 선생의 삶과 사상
리영희의 유산: 계몽적 지성의 의의와 경계 긋기
민중사건의 증언: 안병무의 민중신학
탈냉전의 선지자, 문익환 통일사상의 현재성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민족의 미학화를 넘어
 
쟁점
‘진보 재편(결집)’ 논의를 보는 불편한 시선
<국제시장>, 혹은 어떤 가족 영웅의 뭉클한 도착…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
전교조운동의 성찰과 전망: 하성환의 ‘교육노동운…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
 
정세·시평
‘존엄과 안전’을 새로 쓰자: 4·16 인권선언운동에…
첫 발 뗀 민주노총 2015년 총파업: 박근혜 정부의 노…
특별법 이후, 4.16 운동으로 다시 한걸음
민주노조운동의 새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다시 함께 광화문으로 걸어야겠다: 세월호참사와 분…
 
국제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둘러싼 쟁점들
분리된 팔레스타인, 독립의 길목의 장애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과 한반도에 …
2014 유럽의회 선거와 좌파의 대응
미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와 신흥국의 금융시장 불안…
 
발언대
통합진보당 해산 이유와 교훈: 싸워야 할 때 싸워야 …
밀양을 말하다: 옴니버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수서발 KTX 노선 분할 민영화와 정부조달협정 개정은 …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
공단조직화를 위한 모색, 새로운 가능성: 서울디지털…
 
일반논문
가사노동자 노동주체와 노동성격 변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영원한 미생未生’만을 위한 노동 공간: 30-40대 직…
우파적 감성과의 사상사적 대결: 오에 겐자부로의 “…
 
기획연재
계급투쟁에서 경쟁협조주의로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국가와 폭력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3권 서평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
캔커피의 진정한 가격은 얼마인가?: 내재적 가치와 …
완전경쟁’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
순환론과 동어반복: 수요-공급이론은 가격의 결정을 …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소수자이야기
청소년성매매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바다, 다른 사람, 상처는 아문 적이 없었다
거지와 국가
군대와 동성애: 로맨스, 폭력, 범죄화, 그리고 시민권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장애인 탈시설자…
 
다시읽기
자본주의와 주술(화)의 관계: 막스 베버와 발터 벤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의문시하기: ‘포스트 민주…
이윤율의 경제학’에서 ‘소득의 정치학’으로?: G. …
"대표의 개념"과 "선거는 민주적인가": 정치적 대표와…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고전
성의 정치경제학과 섹슈얼리티의 정치학
'소수자의 리액션’ 혹은 울프식의 ‘뼈 있는 수…
잉여의 시대-타자의 삶
책임 담론이 책임질 수 없는 것
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 부수기: 페미니즘 지식이론
 
서평
프레카리아트의 호명과 그 이후
‘나’의 인권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들’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소수자들의 삶과 문학 )
비판과 운동의 맑스주의 형성사("탈정치의 정치학")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수탈한다(홍석만 송명관의 부…
 
기타
일곡유인호학술상(인권과 인권들) 수상소감 및 심사…
제7회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소감문 및 심사의 변
최진석 비판: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경계와 교차로에…
24시간 사회의 이면: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
 
 
 
  국제
 
작성일 : 11-06-14 17:40
리비아 민주항쟁의 배경과 전망
 글쓴이 : 문이얼
조회 : 1,127  

  문이얼* 아이비스 에너지 전략 연구소


아랍 지역의 민주항쟁이 가장 격렬한 양상을 드러낸 곳은 리비아였다. 현재까지도 리비아는 카다피군과 이에 대항하는 반카다피군간의 교전이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희생이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아랍 지역의 민주항쟁과 다르게 리비아가 한국 진보 진영에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그동안 리비아가 대표적인 반미국가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아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알려진 리비아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속살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리비아 민주항쟁 이전의 역사

  당연히 리비아는 집권자인 카다피 대령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지난 1969년에 27살의 나이로 당시 노쇠한 친서방 경향의 이드리스 리비아 국왕이 터키에서 질병 치료차 머물고 있던 틈을 노려 쿠데타에 성공했다. 당시 카다피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성공에 고무 되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리비아는 카다피의 리비아식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리비아도 주요한 수입원은 역시 석유였다. 이드리스 국왕이 물러날 당시 리비아는 하루에 3백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였는데, 문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리비아가 받는 수입이 보잘 것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드리스 국왕은 이런 수입에 바탕해서 사치를 누렸고 대중들은 여전히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 때문에 리비아 대중들은 카다피의 쿠데타를 묵인했던 것이다.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오토만 제국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사회의 전반적 개발 상태가 아주 낙후했다. 카다피는 쿠데타 성공 이후에 몇 가지 급진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카다피는 기본적인 차원의 사회적 개발을 위해 정부가 직접 석유지대를 통제하면서 수출시 가격협상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국내에 들어온 석유 수입은 각종 사회복지에 사용되었는데 주되게는 주택보장과 의료보장에 충당되었다. 토지 재분배도 이루어졌으며, 가다피 정부는 모든 거시 경제 정책에 개입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세르주의자인 카다피는 리비아가 현대적인 세속주의 정치전통에 서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배격한다면서 리비아를 포함한 아랍 세계가 정치와 경제 모든 면에서 이슬람주의의 가치에 바탕하여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카다피가 몇 가지 계기로 인해 변화하게 되었다. 우선, 지난 1993년 그 자신이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인접국인 알제리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양측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결국, 카다피가 내세웠던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이내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새롭게 발호하는 알-카에다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지난 20019/11 테러 사건 이후, 카다피는 재빨리 미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이는 그동안의 카다피가 가지고 있던 반제국주의, 아랍 민족주의적 이미지에 비추어보자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지난 20095, 아즈다비야에서 거행된 이븐 쉐이크 알 리비의 장례식에 수 천명의 인파가 몰린 것을 목도한 카디피는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편집증적인 두려움을 더 크게 가지게 되었다. 이븐 쉐이크 알 리비는 지난 2001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어 미군에 수감 중에 사망했는데, 당시 리비아의 카다피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에 저항해 싸우고 있던 리비아 출신 전사들의 체포에 미국과 공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븐 쉐이크 알 리비에 대한 추모에 리비아 대중들이 상당한 정도의 규모로 몰렸다는 것은 그의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경제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카다피 정권은 첫 번째 위기를 맞았는데,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경기침체를 맞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자라났지만, 카다피를 이런 정치적 곤경에서 살려준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다. 1986년 당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의 첩보원들이 서독에 있는 미군 장교 클럽에 시한폭탄을 설치하여 다수의 미군들이 희생당했다고 비난하면서, 그 보복으로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하여 200여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은 리비아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이런 미국의 군사적 공격에 리비아 국민들은 카다피에 대한 불만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카다피를 옹호했다. 그런데, 카다피는 다음 해인 1987년부터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리비아 정부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이었던 수입대체 경제 정책이 폐기되고, 농업과 산업무문에서 국제통화기금의 매뉴얼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도입되었다. 1988년 중반에는 수입과 수출 쿼터를 모두 폐지하면서 세계 시장에 리비아 경제를 더 한층 개방했다. 이런 그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보게 된 농민과 노동자들, 자영업자들의 불만이 쌓여갔지만, 이번에도 그를 살려준 것은 역시 리비아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었다. 즉 지난 1992년에 유엔이 리비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했는데, 이러한 대외적 압력과 위기 상황으로 인해 카다피 정권은 대중들이 가진 불만의 예봉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리비아 정부 내의 분열과 갈등도 이런 위기 앞에 잠시 주춤했고, 카다피의 리더십은 다시금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서방 정치인들도 이런 과정에 협력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와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현 총리가 그랬다. 이러한 물밑 거래 때문에 영국 정부는 영국 스코틀랜드 상공 미국 민간여객기 폭파 사건의 리비아 용의자들을 국제적 반대에도 리비아로 인도했던 것이다. 카다피 정권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은 리비아 의회조차 그 폐해를 지적하고 나설 정도였는데,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카다피 정권이 국유기업들을 민영화하고 자유무역 지대를 마구 창설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외국계 회사들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는데, 이런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카다피가 유엔 제재를 해제하고 유럽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정치적 주권을 지나치게 양보한다고도 성토했다(리비아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서방과 타협한 것도 이런 과정의 일부였다). 리비아 국회 내에서 대중의 불만을 좌시할 수 없었던 일부 사람들이 이런 카다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 속도를 줄여보려고 애썼지만, 카다피 정권은 이에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카다피 정부와 협력 관계에 있던 IMF 역시 이런 반발을 겨냥하여 지난 2006년 보고서에서 시장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리비아 내의) 진전이 더뎌지고,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 다뤄야 할 것은 리비아 내부의 지역 갈등이다. 주류 언론들은 주되게 동부 지역이 부족 전통 사회이자, 퇴위한 국왕의 출신 지역이란 점을 부각시키며 카다피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의 원인을 이 지역이 받은 소외에서 찾는다(카다피는 각종 기초 정책적 차원에서 동부지역을 홀대하면서 지역 간의 분열을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유지하려했다). 이런 지적이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덧붙여질 부분도 있다.

리비아 동부 지역은 원래 리비아 내에서도 외국 점령군에 강력하게 저항해온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부족들이 바로 오토만 제국과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점령에 대항해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사람들이다. 카다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속도를 더해가면서 외국계 회사들의 권력과 전횡이 심각해지고 이 점이 이들에게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석유와 관련되어 리비아 사회에 재진입했던 것이나, 불법 입국하려던 리비아인들을 이탈리아가 강제 송환하고 이에 리비아 카다피 정부가 협력했던 것도 정부에 대한 불만을 확신시키는데 한몫 했다. 결국 리비아 민주항쟁이 동부와 서부간의 지역적 대립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의 저항으로 발전했던 것도 동부의 불만과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으로 소외된 리비아 전체 대중의 불만 사이에 연결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리비아 반카다피군의 특징

 

현재 리비아의 반카다피군은 정치적으로나 계층 혹은 계급적으로나 하나의 단일한 세력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현재 리비아의 반카다피 진영 내에는 기존의 카다피 정권 하에서 요직을 역임했지만 그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과 이들 모두로부터 억압받던 평범한 리비아 민중 출신들이 일시적이지만, 같이 섞여있다는 점이다. 이는 카다피에 등을 돌린 리비아군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반카다피 투쟁이라는 급박한 과제 때문에 이들 사이의 긴장이 전면화되고 있지 않을 뿐인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구체제 인사들이 바로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개입을 돕고 은연 중에 리비아 민주항쟁을 통제하는 5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카다피 정부 하에서 진행되던 각종 민중탄압과 서방과의 타협 및 거래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들이었다. 이 점에서 이들은 근본적인 측면에서 카다피가 서방에 대해 취했던 접근에 반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리비아의 상황은 다른 아랍 국가들이를테면, 튀니지나 이집트 등과 차이가 있는데, 사태 전개와 관련하여 명확한 목적과 전략, 전술, 그리고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이 부재하거나 약할 경우,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일단,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구체제세력들은 미국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처리케 해줄 안전판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반카다피군 내에는 미국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도 있었다. 반카다피군 내에는 민주적 사회 개혁을 원하는 세력들그러나 꼭 서방에 우호적이지는 않다과 지식인, 부족주의 세력들, 이슬람주의 세력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이슬람주의자들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이집트 민주항쟁 과정에서 미국이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만약 이들이 주도하여 반카다피군이 내전에서 최종 승리한다면, 향후 구성될 정부나 사회 형태, 이데올로기적 지향, 대외 정책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미국의 영향력 있는 외교문제 씽크탱크인 외교관계위원회(CFR) 의장인 리차드 하스가 그런 생각의 일단을 내보인 바 있다. 그는 지난 38<월스트리트저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리비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말려들어가서는 안 되는 정치적 이유들도 있다. 카다피를 잔혹한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이 그에 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민주주의 편에 서 있는 것으로 확정시켜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일 수 있다. 하지만, 카다피 정권을 제거한다고 해서 이들이 권력의 자리에 바로 올라서게 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카다피와 그 주위의 사람들을 제거할 경우, 다른 부족의 지지를 받는 또 다른 유력자가 정권을 잡게 되는 연쇄적인 사태가 되기 쉽다. 설령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어떤 쪽으로든 리비아의 중요한 지역들이 그 어떤 정부의 통제로부터도 벗어나 알 카에다나 이와 유사한 그룹들이 그러한 정치적 공백을 이용할 상황이 조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군들을 무장시킨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19/11 사태 이전의 아프가니스탄이 이에 대한 교훈을 제공해준다. 미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과 집단들(무자헤딘-역주)을 무장시킨 바 있다. 당시 이 정책은 그러한 정권의 타도라는 즉각적인 목표를 현실화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 이후에 미국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이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결과도 초래하고 말았다.……또한 해당 지역에서 리비아는 미국에게 중심적인 우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리비아가 지닌 정치적 영향력이나 석유 시장에 가지는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어느 모로 보나 리비아는 중동 지역에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보다 미국 정책 담당자들은 이집트의 정치적 이행 과정이 별탈 없이 진행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안정을 유지하며, 이란은 불안정을 겪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게 현명할 것이다. 또한, 리비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미국의 군사력을 흐트러뜨리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미국은 이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군사력이 지나치게 확장된 상태다.……물론, 리비아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가 극히 중대할 정도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리비아에 걸린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정도만큼만 우리가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의 경우, 그러한 조치들로는 자산 동결이나 무기 수입 금지, 전쟁 범죄 기소, 리비아 내외에서 인도주의적 피난처 개설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반카다피군도 서방에 대해 경계감과 반감을 내보였다. 영국 외교관을 대동한 영국군 특수부대가 반카다피군 지도부를 만나러 몰래 리비아 내로 잠입했다가 오히려 이들에게 붙잡혀 감금되었던 사례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난 324<타임>지의 한 보도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한 미군 보고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리비아는 이라크 저항세력으로 활동했던 외국 출신 전사들을 인구 대비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임이 드러난다. 이 보고서를 보면, 이라크에서 저항세력들이 미군에 대항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리비아 출신 전사들이 가장 전투적으로 싸웠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이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현재 카다피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 리비아 반카다피군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알-하시디는 과거 이라크전에서 반미 무장투쟁을 벌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한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함께 싸웠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리비아 아즈다비야 전선에 있다, 그들은 애국자이고 선량한 무슬림들일 뿐이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200712, 미 군사대학 반테러 센터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리비아 출신 전사들의 리비아 내 출생지들은 대개가 이번에 리비아 민주항쟁의 중심지인 리비아의 동부지역이다. 반면에, 당시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협력하고 있던 카다피 정부는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활용하여 이라크에서 전투를 벌이던 이들 리비아 출신 전사들의 소재 파악과 체포, 미군으로의 이송에 협력해왔다. (이러한 위험한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 미국은 리비아 민주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무장 세력들을 리비아 동부에 심어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은데, 일부 반카다피 무장세력들이 서방이 개입하면 극단적인 경우, 자신들은 차라리 카다피 편에 서서 외국군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미국은 반카다피군 정부를 유일한 리비아 정부로 인정하는 문제에서조차 모호한 태도를 보였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예전에 한 브리핑에서 미국이 리비아 국민위원회를 승인할 것인지 여부를 질문받자, 미국은 이 위원회를 포함한 반군 그룹들과 접촉했지만, 지금도 이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며 즉답을 회피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반군 그룹들과 위원회, 그리고 개인들이 가진 비전이 무엇이고, 이들이 누구이며, 카다피 이후 이들이 리비아를 어디로 이끌 것인지를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3. 서방의 군사적 개입 목적

 

우선, 서방이 카다피에 대한 군사적 제재를 가할 도덕적, 정치적 자격이 있는지부터 따져야한다. 카다피가 미국과 화해한 이후에 서방 국가들은 리비아 내에서 카다피가 자행하고 있던 잔혹한 반대파 탄압에 침묵했다. 더 나아가 각종 무기들과 시위진압용 물품들을 리비아로 수출하기도 했다. 지난 2009년에 미 국방부는 리비아가 요청한 미국 무기 구매 요청을 검토했으며, 리비아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수개월 전에도 카다피 정권과 7,700만달러 규모의 군용차량 수출 계약을 조용히추진했었다. 또한, 리비아 국가안보 보좌관이자, 카다피의 아들인 무타심은 지난 20094월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당시 힐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미 국무부에서 무타심 카다피 장관을 맞이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우리는 미국과 리비아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양국은 상호간의 협력을 넓히고 그 심도를 깊게 할 기회가 많은데, 이러한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이 때문에 장관님을 여기서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갑습니다.”

심지어 카다피의 또다른 아들인 카미스는 리비아 민주항쟁이 벌어지기 불과 수 일 전에도 미국 국무부의 주선 하에 미국을 방문하여 군사학교를 시찰한 적도 있다. 이런 점에서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그 정치적 도덕성이라는 면에서 파산을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방은 왜 리비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던 것일까?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기타 아랍 국가들과 달리 리비아 시민들이 정부의 잔혹한 진압에 저항해서 무장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것은 아랍 지역 통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사회적 상황이기도 한데, 리비아의 상황은 아랍 지역 통치자들에게 더 한층의 공포와 두려움을 안길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리비아에 대한 공습이 벌어지고 나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ABC방송 이번 주(This Week)’에 출연해 미군이 리비아 공습에 참여하기 전에도 리비아는 미국에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그는 리비아 사태가 최근 민주화 혁명을 이룬 이집트와 튀니지에 일부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군사 개입에 나섰다고 설명했는데, 구체적으로 리비아가 미국의 핵심 이익은 아니지만 현지의 혼란이 인접국인 이집트와 튀니지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영향이란, 여러 가지 정황과 맥락상 아마도 리비아 민주항쟁의 급진적 전개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자신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는 체제 이행과정을 망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두 번째로, 석유 문제가 있다. 그동안 서방은 카다피가 미국 등 서방과 타협한 이후로 리비아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마음껏 추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리비아 석유 부문에 대한 다국적 석유회사들의 진출이다(이외에도 카다피 정권이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에 순응하면서 국유기업의 민영화, 식량과 연료에 대한 보조금 삭감 등이 동반되었다). 그러나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 항쟁이 성공하면서 연이어 발생한 리비아 민주항쟁은 이러한 서방의 구도에 큰 타격을 가했다.

튀니지나 이집트와 달리 리비아는 석유 생산국이다. 그런데, 무장한 리비아 민중들이 이러한 석유 관련 시설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서방에겐 엄청난 압박일 수밖에 없다. 카다피가 무너진 이후가 더 걱정이라는 서방의 우려는 사실 이런 시설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세력에게 돌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더군다나 명목상 반서방 국가인 리비아에서 서방측 석유회사들이 리비아 석유 자원에 대해 전면적으로 접근하고, 이 회사들에 대해 정부가 터무니없는 특혜조치들을 베풀자 리비아 민중들 사이에는 반제국주의적 감정이 확산되었다.

결국, 리비아 민주항쟁은 아직까지는 잠재적인 성격인 아랍 민주항쟁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고, 이에 대해 서방 국가들은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기타 다른 아랍 국가들의 민주항쟁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태에 개입해야 하는 압력을 받은 것이다. 서방은 카다피를 몰아붙이고 있는 반카다피군들 내에 입지를 구축하여 향후 구성될 리비아 정치 체제에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충실하게 반영되도록 하되, 리비아 민주항쟁이 인근 국가로 확산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한 효과적인 핑계가 바로 인도주의적 개입이다. 그러나 이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그 자체로 효과도 의심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리비아 민주항쟁의 반제국주의적, 급진적인 성격을 통제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즉 서방의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근본 목적은 사실 리비아 민중들의 무장을 통제하고, 석유 시설에 대한 이들의 통제력을 이완시키며, 구 질서를 회복하는데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방의 압도적인 군사력이 리비아내에서 행사된다면, 반카다피군은 서방의 군사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서방 군대의 위계질서 하에 다른 반카다피군들을 줄세움과 동시에 서방군대에 밀착한 정치체가 권위를 가지는 효과를 낳는다. 결국 리비아 반카다피군에서도 급진적인 집단들은 주변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이런 과정은 점차적으로 기층으로부터의 민중 동원 동기를 약화시켜, 기존 카다피 구체제의 일원이었던 인사들 가운데 반카다피 인사들과 세력들이 혁명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구질서를 일정하게 회복하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 구체제 출신 반카다피 진영 인사들도 무장한 민중들이라는 호랑이 등에 탄 신세이기에, 이러한 상황을 무한정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4. 미국 개입을 둘러싼 모순적 압력

 

서방의 공습이 단행된 뒤, 서방은 각자 딴 소리들을 냈다. 일단,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군사 개입이 카다피 축출에 있는 것인지 불분명했고, 공습에 참여한 각국이 초기에는 체계화된 지휘라인을 구축하지도 않았었다. 이는 리비아에 대한 군사행동의 목표나 개입 정도 등에 대해 각국이 서로 다른 생각특히 미국과 영국, 프랑스을 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먼저 리비아에서 생산된 석유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가 위치한 유럽으로 보내지는데, 이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미국보다 리비아의 석유 문제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이 바로 유럽이 상대적으로 리비아 사태에 대해 더 강경한 외양을 띠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사실, 과거 1956년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도,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달리 미국은 군사적 개입을 반대하여 이를 관철한 바 있다. 반면에 미국은 좀 다른데, 베테랑 미국 협상가인 애론 데이빗 밀러는 리비아 문제에 대하여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야망을 줄이는 것이 좋을 수는 없지만, 미국 국내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고, 이미 두 개의 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그것은 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리비아의 경우, 그곳에는 핵심적인 미국의 이해관계가 긴급하리만큼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지만, 미국이 현재 처한 한계와 과거의 경험이 주는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 좀 더 영리해져야합니다.”

 

헤게모니의 문제도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영국과 특히 프랑스가 리비아에 대한 개입 문제에서 자신을 제치고 앞서 나갈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무어라도 행동해야 할 압력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지난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당시에 이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을 밀어낸 후 이들 국가들이 이 지역에 재차 진출하려 하는 것을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미 지난 부시 시절의 일방주의적 전쟁 정책과 지난 2008년의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의 아랍 지역의 혁명으로 미국이 가지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헤게모니는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동맹국들로부터도 헤게모니의 도전을 받아야했던 미국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또다른 방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세계 최강국미국의 지정학적 딜레마도 존재한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외교 관계 전문가들 가운데 매파성향의 사람들이 리비아에 대한 군사행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즉 리비아 사태에 대한 미국의 무대응이 자칫 중동의 지정학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카다피가 비행금지구역 같은 을 함부로 넘는 것에 대해 미국 등의 서방이 적절하게 주지 않는다면, 이란 같은 국가들도 미국을 군사적으로 시험하려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계를 패권적으로 지배하는 미국 등 서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패권적 권위를 이용하여 부과한 일종의 한계선’(비행금지구역)이 그보다 못한 국가의 독재자에게 공공연하게 무시당한다는 것은 석유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지정학적, 국제정치학적 차원에서도 그냥 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의 위신과 영향력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리비아 사태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적 개입은 중동 지역 전체를 다시금 격동시킬 가능성이 컸다.

 

 

5. 서방의 군사적 개입의 정치적 효과

 

리비아 민주항쟁 초기와 달리 후반에 카다피군의 공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근본적으로는 정치적인 요인이 가장 컸다. 반카다피군이 수도인 트리폴리 진입을 앞두자, 빈민과 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카다피에 대한 도전이 등장했었다. 그러나 서방 국가들을 중심으로 군사적 개입 논의가 진행되고, 이와 동시에 반카다피군 일부가 서방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상황이 달라졌다. (반카다피군 기층에서의 경계와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자, 카다피 진영은 이를 놓치지 않고 반카다피군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외국의 하수인, -카에다 등등함과 동시에 동요하던 지역이나 부족들을 재규합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 때를 기점으로 카다피군은 자신의 정치적 힘을 다시 응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트리폴리에서 반카다피군에 지지를 표하면서 시위를 벌이거나 바리케이드를 쳤던 빈민, 노동계급 지구의 투쟁의 수위와 응집력이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던 것도 이런 정치적인 요인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반제국주의적 전통이 강한 리비아에서 반카다피군의 대의가 의심받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었는데, 이는 그동안 중립적이거나 반카다피군 측으로 일정 부분 기울었던 지역이나 부족들도 동요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왔을 것이다. 실제, 지난 5일부터 리비아 약 850개 부족의 대표단 2000여명은 이틀 동안 트리폴리에서 전쟁을 끝내고 국가통합과 독립보호를 위한 회의를 가졌는데, 이들은 리비아의 독립과 외세의 개입에 대해 거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을 동의하며 카다피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사실, 카다피가 트리폴리에 포위되었을 당시에도,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처럼 강력한 군사력전투기, 폭격기, 군함, 탱크 등을 동원하여 반카다피군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반카다피군의 대의에 일정 부분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카다피군이 무자비한 군사력을 이용해 탄압했다면 오히려 더 많은 리비아 민중들을 카다피로부터 이반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카다피는 영악하게도 이데올로기전에서 우위를 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혁명군에 대한 총공세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리비아에 대한 전면적인 서방의 군사 개입은 다른 모순을 확대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특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도 정리해야하는 상황에다 국내 경제 상황의 악화로 인한 전비 문제, 국내의 개입 반대 여론에 부닥쳤다. 이 때문에 리비아 사태 해결을 위한 목표와 수단사이에 괴리가 발생했고, 이는 서방의 난처한 상황을 더욱 더 곤란한 지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만약 서방의 지상군이 투입된다면, 그 과정은 더욱 더 지지부진하고 고통스러운 국제적 논의 과정을 수반해야하는데다가, 설사 이루어진다 해도 자칫 군사적 재앙으로 가는 지옥문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필시 카다피측도 아프리카에서 그들이 지원한 다양한 내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리고 지금 반카다피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보여준 것처럼, 다양한 게릴라 투쟁을 선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민 문제도 심각하다. 연합군의 공습이 진행되면서 리비아 탈출 행렬도 가속화되었는데,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리비아 내에서 서방이 방지하려고 했던 인도주의적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공습에 참가한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건너편 유럽 국가들 일부는 리비아 사태의 장기화가 유럽으로의 대규모 난민 유입을 불러올까 우려하고 있다. 공습이 시작되고 나서 며칠 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리비아 사태 이후 33만명 이상이 리비아를 빠져나갔으며, 9,000명이 접경 국가인 이집트와 튀니지 국경 지대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향후 몇 주 내에 리비아로부터 25만명 정도의 난민이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곧, 서방의 군사적 개입 이후에 더 많은 난민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6. 전망

 

전망과 관련해서는 우선적으로 반카다피군의 상황을 살펴봐야겠다. 일단 이들이 서방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압도적인 카다피군의 무력에 대한 절망감과 압박감에서 나온 성격이 강하다. 이들 반카다피군이 투쟁 초기에 카다피를 압박하며 승승장구했을 당시에는 외국군의 지상군 투입은 물론, 서방의 비행금지구역 설정에 대해서도 대다수가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긴장은 서방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격인지도 모른다. 실제 이라크에서도 후세인이 몰락한 후에 일부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해방자로 환영하기도 했지만, 미국이 점령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내자, 이내 이라크에서는 대대적인 저항의 물결이 발생했다. 후세인이라는 철권통치가 사라진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그동안의 억압에서 해방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 정치적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일천한 군사력을 보유한 상황에서 서방의 군사력이 리비아 사태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면서 반카다피군내에 서방에 대한 비난을 삼가고 그들의 의제를 일정 부분 수용하라는 압력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애초의 비행금지구역 반대라는 입장에서 수용으로, 그리고 단순한 비행금지를 넘어서 트리폴리 같은 지상에 대한 공습까지도 수용하는 방향으로 반카다피 혁명군의 입장이 계속 변화되어왔기에 더더욱 우려되는 부분이다.

더구나 리비아 동부에서 수립된 정부의 면면도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다. 리비아 동부 임시정부 총리에 선임된 마흐무드 지브릴이란 사람은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지난 2009년 리비아 국가경제발전위원회 의장으로 카다피 정권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즉 카다피 정부 내에서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감독한 사람이 다시금 카다피에 반대하는 동부 지역 임시정부의 경제수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임시정부 재무장관을 맡은 알리 타르후니도 장관에 임명된 후의 기자회견에서 임시정부는 카다피 정부와 외국이 맺은 기존 석유 관련 계약은 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면면이나 입장을 살펴보면, 과연 이들 임시정부 통치자들이 카다피 정부에 비해 얼마나 현격하게 다를지 심히 의문스럽다. 카다피 정부 시절의 경제 수장이 마치 회전문처럼 다시 동부 지역 임시정부의 경제수장이 되고, 카다피 정부 하의 석유관련 계약을 동부 임시정부도 계속 유지하겠다면 말이다.

또 하나 살펴봐야할 것은 서방의 군사력이 대규모로 투입될 수 없는 상태에서 카다피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반카다피군을 무장시키는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그러한 무장화는 미미한 수준이다. (얼마 전에 이탈리아가 반카다피군에게 무기를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방어용 무기에 한정되어 있다.) 사실 서방의 지상군이 리비아에 대규모로 진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반카다피군에 대한 대대적인 무장지원은 자칫 이들의 자신감과 기세를 올려주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는데, 이는 향후 카다피의 실제적인 몰락 이후에 서방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을 제기할 수도 있다. 반카다피군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순화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에 의해 카다피 정권이 최종적으로 붕괴한다면, 그동안 카다피 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사회의 중추적인 억압 시스템서방 정부들도 고스란히 이용하고픈들이 전부 도전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무엇보다도 서방이 원치 않을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기껏해야 카다피 없는 카다피 체제일 뿐, 그 이상으로 전개되어 자신의 이익까지 침해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문제는 카다피 역시 쉽게 물러설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NATO 사무총장도 지난 8일 리비아 교착 상태 타개책에 대해 무엇보다 군사적인 해결책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해야했다.

결국 향후 리비아 사태는 서방의 대규모 군사적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 반카다피군에 대한 서방의 통제력 확보 여부, 카다피의 완강한 저항이라는 서로 물고 물리는 삼각함수 사이에서 이리저리 요동치는 국면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애꿎은 리비아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리비아 민주 항쟁 그 자체도 목 졸리게 될 위험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트온 쪽지로 보내기

 
   
 

Copyleft by 진보평론(The Radical Review)   전화: 02)2277-7950 팩스: 02)6008-5138
(우100-391) 서울 중구 장충동1가 38-32 파인빌 4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