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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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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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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에서 경쟁협조주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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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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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사회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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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작성일 : 11-09-16 17:28
불타는 런던, 무엇이 보이는가?
 글쓴이 : 서영표
조회 : 1,017  

진보평론 49(2011년 가을) 국제란 

서영표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런던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가장 안전한 곳 중의 하나였던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대량학살극이 벌어지고 2012년 올림픽 개최예정지인 런던에서 약탈방화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 이제 지구상에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첫 번째 인상을 뒤로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러 가지 답변이 머리를 스친다. 현지 언론의 분석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직접적인 원인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해묵은 경찰과 흑인공동체 사이의 적대적 감정이다. 새롭지 않은 주제이다. 이미 1970년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비롯한 버밍햄의 좌파 문화이론가들은 사회적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법과 질서의 위협으로 흑인공동체를 범죄자로 상징화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그들의 공동 저술 책 제목이 위기 관리하기’(Policing the Crisis)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치적으로 높은 실업과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이주자들을 악마화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영국 민족당(British National Party)이 지지층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미 2세대를 넘어 3세대, 4세대까지 이르렀지만 실업과 불안정한 삶, 열악한 복지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차별까지 겪어야 하는 젊은 흑인들이 느끼는 좌절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보수당-자민당 연정이 들어선 후 가속화된 정부의 공공지출 삭감과 그에 따른 사회보장의 축소는 그렇지 않아도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는 낙후된 지역의 청년들의 불만을 키워왔다. 이번 폭동의 근원지가 낙후된 런던 북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폭동 가담자가 흑인공동체를 넘어 백인청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함을 보여준다. 눌려있던 불만이 마크 더건(Mark Duggan)이라는 한 흑인 청년의 죽음을 계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극복을 위한 금융정책의 부담은 고스란히 정부의 부담, 즉 국민의 세금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더 큰 불황과 사회보장 축소로 돌아오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사람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충동적인 방화와 약탈의 직접적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조차 허용되지 않는 절망인지도 모른다. 불안감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적으로 배제된 계급아래의 계급(underclass), 사회학자 지구문트 바우만(Zymunt Bauman)의 표현을 빌자면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에게 불안감마저 사치스럽다. 사회이동성은 막혀버렸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사회적 문제는 오로지 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 지배적 문화가 되었다. 아무런 희망을 남겨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존중의 여지도 남겨 놓지 않았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지난 30년간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그것의 희생자들의 의식을 현실순응적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2009년 조셉 로운트리 파운데이션(Joseph Rowntree Foundation)의 서베이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높은 수준의 임금은 그만큼의 고되고 힘든 일의 대가이며, 장기간의 실업과 약물복용과 같은 사회적 일탈은 개인 또는 가족의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리차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과 케이트 피켙(Kate Pickett)의 연구에 따르면 각종 사회문제(신뢰의 수준, 정신질환, 기대수명과 영아사망, 비만, 아동의 학업성취, 10대 출산, 살인, 사회적 이동성)는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생겨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OECD 국가의 불평등 정도와 앞의 사회적 문제를 지수화해서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했다. 불평등 정도가 심한 미국과 영국이 심각한 사회문제에 직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경험하는 고통을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 보도록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다. 지난 30년간 보수당과 노동당 정부 모두에 의해 공공서비스가 파괴되고, 개인의 능력과 경쟁력이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워졌으며, 의료와 교육 같은 공적 서비스조차 화폐적 가치로 환산하여 평가하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내면화한 경쟁적이고 이기적 주체들은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할 뿐이다. 끝없이 내달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멈추어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행위 자체가 낙오를 의미할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 30년 동안 복지국가를 통해 생겨났던, 그리고 그 이전의 사회적 투쟁을 통해 성취되었던 사회적 연대는 파괴되었고,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연대의 기반과 원리는 출현하지 않은 상태에 처해 있다고. 1984-5년의 1년에 걸친 광부파업을 가능하게 했던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와 신뢰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브레스트 오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은 포스트모던한 소비주의 문화 속으로 용해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이번 런던 폭동이 과거의 유사한 사례와 달리 범죄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게 한 것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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