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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작성일 : 13-06-27 15:00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글쓴이 : 김은중
조회 : 929  

진보평론 56호(2013년 여름) 국제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김은중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우리는 이 나라에 극장을 많이 지을 필요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이 나라의 정치판 자체가 최고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정치판의 무대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나왔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마술사의 속임수에서 나왔다.
석유가 쏟아지면서 베네수엘라의 천지가 개벽(開闢)했다.

국가는 천우신조의 운명을 타고 났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후보자들은 현실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국가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관대한 마술사이고, 정부가 저지르는 거짓말 주머니에 희망을 채워주는 마술 램프의 거인이다. 석유는 끊임없이 환상을 보여준다. 석유는 신화를 만드는 힘을 가졌다. “위대한 베네수엘라을 외쳤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마술사였다. 그는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Marcos Pérez Jiménez) 대통령의 마술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 만큼 우리에게 멋진 마술을 보여준 마술사였다. 페레스 히메네스는 진보의 꿈을 법령으로 만들었지만 나라는 진보한 것이 아니라 비만해졌을 뿐이다. 페레스 히메네스의 공연은 처음 보는 공연이었고,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의 공연은 두 번째 보는 공연이었지만 그의 공연이 더 짜릿했다.
호세 이그나시오 카브루하스(José Ignacio Cabrujas, 베네수엘라 극작가)

 

베네수엘라, 친차베스와 반차베스로 갈라진 나라

우고 차베스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신은 친차베스주의자인가요, 반차베스주의자인가요?’ 베네수엘라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베네수엘라는 친차베스와 반차베스로 나뉜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했지만 차베스에 관한한 베네수엘라 안에도 바깥에도 중립은 없다. 양극단을 벗어나서 차베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차베스에 관한 찬반은 단순히 정치적 의견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사람의 존재론적 차이로 귀결되기도 하고 인식 기능, 도덕적 저열함, 무신경한 물질적 이해관계의 문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친차베스주의자에게 볼리바르 혁명은 급진적 혁명이고 근본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혁신적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며, 라틴아메리카를 통합시키고,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에너지 국유화 정책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켰으며 경제는 건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 석유는 베네수엘라 국민 전체에게 돌아가는 혜택이다. 차베스는 역사에 남을 지도자이고, 구원자이며, 볼리바르의 현신이다.

반면에, 반차베스주의자에게 볼리바르 혁명은 사기이고, 졸렬한 모방품이며, 과거의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볼리바르주의자들이 차지한 것일 뿐이다. 역사적 변화가 아니라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렇고 그런 변화들 중의 하나이다. 석유 정책은 재앙이고, 국제유가가 하락하면 차베스 정권도, 경제도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베네수엘라는 식량의 75%를 수입하고 있으며, 석유를 포함해서 모든 생산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차베스는 페트로-포퓰리스트이고, 수다쟁이이며, 1992년 실패한 쿠데타의 주역일 뿐이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전선은 시정에 떠도는 정치적 의사 표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베네수엘라를 연구하는 (국내외)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양분 전략이 차베스가 변혁을 추진하면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용한 전략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차베스주의가 베네수엘라에 남긴 정치적 유산이라고 한다. 베네수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베스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차베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네수엘라를 이해해야 한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변화시켰지만 베네수엘라는 차베스를 탄생시켰다. 친차베스주의자들과 반차베스주의자들은 동일한 추정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차베스를 둘러싼 동일한 추정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20세기 베네수엘라의 역사적 구조의 산물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서 역사에 대한 성찰은 흔히 누락된다.

 

마술사의 나라가 된 사우디-베네수엘라

 

신기루 사라지다

 

또 다른 변곡점, 차베스의 등장

 

차베스와 민중, ‘참여적이고 주체적인 민주주의(partici-pative and protagonist democracy)’

 

차베스의 두 번째 임기(2007-2012)‘21세기 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민주주의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라카스 유혈 사태로부터 시작해 안데스 국가들의 원주민운동,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 1970년대부터 시작된 브라질 무토지농민운동,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스(piqueteros) 시위, 콜롬비아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사회운동 등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지형을 바꿔 놓은 이후 민주주의=자유주의=자본주의라는 등식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차베스는 사회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 ‘민주주의=자유주의=자본주의라는 이원론적 대립을 비판하고 ‘21세기 사회주의=(?)=민주주의를 제시했다. ‘21세기 사회주의=(?)=민주주의등식에서 중간 항(?)이 누락되면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다르지 않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20세기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와도 차별화하는 것은 중간 항(?)이다.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선언하면서 경제발전 모델로서 3의 길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중간 항(?)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차베스는 아마도 덜 국가중심적이고 보다 더 다원적인(more pluralistic and less state-centered)’ 사회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차베스는 민중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돌려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페트로-포퓰리즘(petro-populism)’, ‘선출된 전제정치(elected autocracy)’, ‘못돼먹은 민주주의(rogue democracy)’로 비난받았다. 이러한 비난이 차베스의 개혁을 끊임없이 흔드는 베네수엘라 국내외 자본과 미국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의 공세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의 또 다른 근거는 차베스가 석유국가의 마술사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차베스가 원했던 것은 ‘21세기 사회주의=덜 국가중심적이고 더 다원적인 사회=민주주의라는 등식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국가주의)=21세기 사회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등식으로 작동하고/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칠레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에르네스토 카르모나(Ernesto Carmona)가 지적하듯이, 차베스의 혁명과 ‘21세기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수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사회 정의, 볼리바르 사상, 마르크스주의, 피델 카스트로 사상, 아옌데의 유산이 베네수엘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맥락과 뒤섞인 복합적 산물이다. 여기에 엄청난 활력과 단호한 성격, 명확한 정치적 비전을 가졌던 차베스의 카리스마와 이에 우리 모두 차베스다!”(¡Todos somos Chávez!)는 함성으로 화답한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차베스 이후 베네수엘라의 미래는, 월러스틴이 논평했듯이, 베네수엘라가 오늘날 처해 있는 내부적 힘의 균형과 좀 더 큰 범위에서의 지정학적·문화적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적 자본주의와 근대문명의 위기를 알리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서 차베스의 혁명은 베네수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성찰해야 할 미션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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