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LOGIN | 구)진보평론 홈페이지 가기| 이론지 보러가기  
 
특집·기획
좁쌀 한 알 장일순 선생의 삶과 사상
리영희의 유산: 계몽적 지성의 의의와 경계 긋기
민중사건의 증언: 안병무의 민중신학
탈냉전의 선지자, 문익환 통일사상의 현재성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민족의 미학화를 넘어
 
쟁점
‘진보 재편(결집)’ 논의를 보는 불편한 시선
<국제시장>, 혹은 어떤 가족 영웅의 뭉클한 도착…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
전교조운동의 성찰과 전망: 하성환의 ‘교육노동운…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
 
정세·시평
‘존엄과 안전’을 새로 쓰자: 4·16 인권선언운동에…
첫 발 뗀 민주노총 2015년 총파업: 박근혜 정부의 노…
특별법 이후, 4.16 운동으로 다시 한걸음
민주노조운동의 새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다시 함께 광화문으로 걸어야겠다: 세월호참사와 분…
 
국제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둘러싼 쟁점들
분리된 팔레스타인, 독립의 길목의 장애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과 한반도에 …
2014 유럽의회 선거와 좌파의 대응
미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와 신흥국의 금융시장 불안…
 
발언대
통합진보당 해산 이유와 교훈: 싸워야 할 때 싸워야 …
밀양을 말하다: 옴니버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수서발 KTX 노선 분할 민영화와 정부조달협정 개정은 …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
공단조직화를 위한 모색, 새로운 가능성: 서울디지털…
 
일반논문
가사노동자 노동주체와 노동성격 변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영원한 미생未生’만을 위한 노동 공간: 30-40대 직…
우파적 감성과의 사상사적 대결: 오에 겐자부로의 “…
 
기획연재
계급투쟁에서 경쟁협조주의로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국가와 폭력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3권 서평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
캔커피의 진정한 가격은 얼마인가?: 내재적 가치와 …
완전경쟁’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
순환론과 동어반복: 수요-공급이론은 가격의 결정을 …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소수자이야기
청소년성매매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바다, 다른 사람, 상처는 아문 적이 없었다
거지와 국가
군대와 동성애: 로맨스, 폭력, 범죄화, 그리고 시민권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장애인 탈시설자…
 
다시읽기
자본주의와 주술(화)의 관계: 막스 베버와 발터 벤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의문시하기: ‘포스트 민주…
이윤율의 경제학’에서 ‘소득의 정치학’으로?: G. …
"대표의 개념"과 "선거는 민주적인가": 정치적 대표와…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고전
성의 정치경제학과 섹슈얼리티의 정치학
'소수자의 리액션’ 혹은 울프식의 ‘뼈 있는 수…
잉여의 시대-타자의 삶
책임 담론이 책임질 수 없는 것
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 부수기: 페미니즘 지식이론
 
서평
프레카리아트의 호명과 그 이후
‘나’의 인권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들’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소수자들의 삶과 문학 )
비판과 운동의 맑스주의 형성사("탈정치의 정치학")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수탈한다(홍석만 송명관의 부…
 
기타
일곡유인호학술상(인권과 인권들) 수상소감 및 심사…
제7회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소감문 및 심사의 변
최진석 비판: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경계와 교차로에…
24시간 사회의 이면: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
 
 
 
  국제
 
작성일 : 13-10-01 18:44
쿠데타냐 또 다른 혁명이냐, 이집트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방정식 풀이
 글쓴이 : 최재훈
조회 : 871  

진보평론 57호(2013년 가을) 국제:

쿠데타냐 또 다른 혁명이냐
, 이집트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방정식 풀이

최재훈 경계를 넘어 활동가



그 땐 모든 게 가능했다.”

2011년 초 이집트의 시민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모시린 집단>의 오마르 로버트 해밀튼은 아랍의 봄 당시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그렇게 표현했다. 그 무렵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한 결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18일간 전국의 광장과 거리를 물결치게 한 혁명의 파도에 맥없이 휩쓸려가고 30년간이나 지속되던 국가 비상사태가 해제됐다. 그러자 공포와 고통과 굴욕이 자리 잡고 있던 시민들의 가슴에도 희망이라는 낯선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시민들은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처럼 탁 트인 내일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들의 기대는 광장 위를 덮고 있던 푸른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36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오늘,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위로부터 불어오는 반혁명의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복수의 후보가 출마해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치러진 20126월 대선에서 당선된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은 집권한 지 불과 1년 만에 군부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져 법정에 서게 될 운명에 처했다. 그와 동시에 60년 가까이 불법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온갖 탄압을 겪다가 무르시의 당선 덕분에 집권세력의 지위에까지 오르는 대반전드라마를 연출했던 무슬림 형제단과 그 정치조직인 자유정의당은 하루아침에 테러조직으로 몰려 이리저리 쫓기고, 잡히고, 갇히는 신세가 됐다. 무르시 정부의 퇴진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그의 복귀를 요구하는 지지자들로 나뉘어 거리는 온통 분열과 증오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심한 혼란과 격변 속에 지난 두 달 간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 무려 8백 여 명(임시정부의 발표)에서 45백 여 명(무슬림 형제단의 주장)에 이르고, 희생자들 중 압도적인 다수는 무르시와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는 누가 어떤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명백한 쿠데타요,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이 군대의 완력에 못 이겨 강제로 쫓겨났다면 그것이 어떻게 쿠데타가 아닐 수 있을까. 또한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 나라에서 대다수가 평화적인 방식을 고수하던 시위대를 광장과 모스크에 가둔 채 마치 사냥하듯 총질을 해대는 행위는 명백히 학살이다.

그럼에도 이집트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이야기와 주장들은 우리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쿠데타는 쿠데타지만, 이건 민중들의 민주적인 쿠데타라고도 하고, “학살은 가슴 아프나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치러야할 대가라고도 한다. 쿠데타 아닌 쿠데타, 비극적이지만 당연한 학살.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이런 주장은 비단 쿠데타를 주도한 장군들 입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 지금 쫓기고 학살당하는 저 사람들과 함께 바로 그곳, 그 광장, 그 거리에서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시민들, 자유주의 청년들, 세속주의 지식인, 좌파 활동가, 노동운동가, 심지어 인권단체 활동가들 가운데서도 군부의 행동을 지지하거나 동료 시민들이 겪는 참상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걸까. 이집트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꽤 복잡하고 어려운 방정식 같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접하는 방정식은 아니다. 오늘날까지의 세계 역사에서 자유와 인간존엄을 향해 솟구쳐 나온 민중들의 혁명 의지가 반혁명 세력의 반발과 폭력, 술수에 막혀 좌절되거나 심각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경우를 적잖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멀게는 프랑스의 2월 혁명(1848)에서부터 이란(1953), 과테말라(1954), 칠레(1973), 니카라과(1990), 베네수엘라(2002), 동티모르(2006)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이집트 위기는 독재와 탄압, 외세의 지배, 부패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나 민주주의와 정의를 찾아가는 민중들이라면 거의 필연적으로 풀어야하는 난제의 전형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이집트 사태를 둘러싼 복잡한 방정식에 감히 도전해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물론 정답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원래부터 방정식은 답을 맞히는 것 보다는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거라고 했으니,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이집트 현 위기의 첫 번째 상수
(常數): 독선과 무능으로 가득 찼던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 1


이집트의 현 위기에 관한 방정식에서 변하지 않는 첫 번째 상수가 있다. 바로 집권 1년간 무르시 정부와 무슬림 형제단이 독재자 무바라크를 목숨을 걸고 권력에서 끌어내렸던 민중들의 기대와 열망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배신했다는 점이다. 이는 반 무르시 진영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까지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만 그들은 무바라크 30년 독재가 심어놓은 온갖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들을 해결하기엔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흔히 펠룰(Felool)’이라 불리는 독재 잔당들의 방해 또한 너무나 집요했다고 주장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그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측면이 있다. 특히 이집트의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군과 사법부는 집권 자유정의당이 원내 1당을 구성하고 있던 하원과 제헌의회를 각각 해산시키는 등 수시로 딴죽을 걸어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줄이 무르시 대통령이 쫓겨난 뒤 싹 자취를 감췄다는 증언 역시도 무르시 정권을 견제하던 자본가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무르시에게 표를 던졌던 시민들의 상당수가 등을 돌린 현실을 단지 그들의 인내심 부족이나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순진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시민 다수에게 대통령을 저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에 2천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무르시의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을 하고 수백 만 명이 반정부 시위에 동참한 것이다.

그 위기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조직이 걸어온 길과 무르시 대통령의 집권 과정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슬람권에서 이흐완 알 무슬리민이라고 불리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을 마치 알 카에다나 자마아트 알 이슬라미야 같은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의 하나쯤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8년 성직자이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무슬림 형제단은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던 무슬림들의 각성과 도덕적 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온건 이슬람주의자들의 신앙부흥 운동으로 출발한 조직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급진적이고 불온한 이미지를 덧씌운 것은 세속민족주의를 표방하던 군 출신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안와르 사다트,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역대 정권들이었다. 1952년 나세르가 자유 장교단을 이끌고 파루크 왕조를 무너뜨릴 당시 형제단은 그들의 편에 서서 공화정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2년 뒤 나세르는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의 배후로 형제단을 지목해 지도부와 그 지지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군부가 잠재적인 정치 라이벌로 성장할 수 있는 형제단의 싹을 미리 잘라낸 정치적 숙청의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20112월 무바라크가 축출되기까지 형제단은 60년 가까이 불법조직이란 멍에를 져야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시골과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제활동을 하고 자선병원을 운영했으며 학교를 지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형제단을 이끄는 지도부가 대부분 부유한 기업가나 의사, 변호사, 학자, 기술자 등 중상층 계급 출신들이었음에도 선거 때만 되면 시골과 도시 빈민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 모았던 것도 그런 오랜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지난 73일 쿠데타 이후 군과 경찰의 무력진압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광장과 모스크를 떠나지 않았던 형제단 지지자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서민들이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따라서 무바라크 축출 이후 치러진 다섯 차례의 선거에서 형제단이 모두 승리하고 집권까지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동안 이집트는 반세기 넘게 세 번의 군사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좌파와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온건성향의 중도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까지도 철저하게 와해되거나 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민중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세력은 형제단 말고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을 처음 제안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46일 청년운동을 비롯한 자유주의 청년 그룹 역시도 무바라크 이후까지 준비할 여력은 없었을 뿐더러 그들 내부의 스펙트럼 또한 너무나 다양했다. 게다가 무바라크 퇴진 이후 국정의 전권을 스스로 가져간 최고군사위원회(SCAF)의 장군들로부터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대선을 치러야 했고, 대선 1차 투표에서 자유주의와 좌파들의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결선투표까지 오른 무바라크 잔당 아흐마드 샤피크 전 총리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형제단 출신의 모하메드 무르시에게 표를 몰아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르시 대통령과 형제단은 집권에 성공했다. 적극적인 지지자였든 마지못해 표를 던졌든 간에 시민들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결 같았다. 빵과 자유와 정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르시 정부가 집권 이후 맨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8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가로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전기, 수도, 석유 같은 공공서비스와 식료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삭감해 당시 11퍼센트인 재정적자를 다음 회계연도까지 8.5퍼센트로 대폭 줄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보듯이 그러한 조치는 곧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극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필품과 공공요금은 치솟았고, 절대 빈곤율은 20%에서 25%로 상승해 오히려 무바라크 정권 때보다 더 나빠졌으며, 30%에 달하는 청년 실업자들은 여전히 하릴없이 거리를 방황해야 했다.

사실 여기에도 그럴만한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형제단의 지도부는 정치적으로는 군사정권과 기득권세력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왔지만, 계급적으로는 그들과 상당부분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고 핵심 지도자 그룹에 속하는 카이랏 알 샤테르와 하싼 말렉은 억만장자 사업가들이었다. 이집트 최대의 유제품 회사인 주하이나 그룹의 사프완 타벳 회장, 최대 패스트푸드 체인 모멘 그룹의 모하메드 모아멘 회장, 농수산물 수출회사를 운영하는 압델 라흐만 사우디 같은 재벌들은 소위 지도국(Guidance Bureau)이란 내부기구를 통해 조직의 주요 의사결정과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공공부문 민영화와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규제철폐를 통해 IMF와 세계은행의 차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오겠다고 밝혔다. 즉 혁명 이후에도 민중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게 없었던 이유가 단지 1년이란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무르시 정부가 정치나 종교적 의견이 다른 세력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부족하다거나 점점 독재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는 경제 실정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와 관련해서는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의사결정 구조의 문제다.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당시 측근 몇 사람이 나라 전체의 정책 결정을 쥐락펴락하던 무바라크 시대의 관행을 개혁하겠다면서 부통령 한 명과 보좌관 네 명, 자문위원회 열일곱 명, 참모장, 법률 고문, 비서진 등등 대규모 팀을 구성했다. 거기엔 이슬람주의자도 있고 기독교 콥트교도도 있었으며, 좌파, 자유주의자, 활동가, 지식인들이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진짜 중요한 정책에 대한 논의와 결정들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번에 체포된 모하메드 바디에와 알 샤테르 같은 무슬림 형제단 지도부 모임이었다.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만약 이명박 정권의 주요 의사결정이 소망교회 장로단에서 내려졌다면 그걸 지켜보는 우리들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 이집트 시민들의 심정이 쉽게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둘째로는 헌법의 문제가 있다. 전 세계 모든 혁명 과정에서 보면, 근본적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국민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헌법은 사회의 소수자도 아우르는 헌법,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 여성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헌법, 민간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하는 헌법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헌법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우선 이슬람법(샤리아)의 원리가 모든 입법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헌법 2조가 그대로 유지됐다. 물론 이 조항은 과거의 헌법에도 있었지만 단지 선언적인 의미만 지닐 뿐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새 헌법은 이슬람법이 곧 증거이자 규칙이며 법제, 원천이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향후 절도나 간통, 신성모독 등이 이슬람법에 따라 처벌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그 밖에도 가족을 향한 여성의 의무라는 문구를 헌법에 직접 명시함으로써 여성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공장 소유주와 기업 경영진의 이익은 보호하면서도 노동권은 완전히 외면했으며, 국회의원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 대표를 의무적으로 두는 조항도 없애 버렸다. 이런 까닭에 헌법 초안이 국민들의 의견과 열망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며 100명의 헌법제정위원 가운데 22명이 사퇴하고 대대적인 국민투표 거부 운동이 전개돼 투표율이 30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무르시 정부는 끝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반대파에 대한 폭력과 탄압이 있었다. 최근 두 달 사이에 일어난 대량 학살에서는 대체로 무르시 대통령을 쫓아낸 군대와 경찰이 가해자이고 무르시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피해자였지만, 사실 무르시 정부 하에서도 반대파 시민들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은 수시로 자행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작년 11, 대통령의 결정과 상원이 제정한 법률은 사법부의 심사대상이 될 수 없다는 대통령 포고령에 대해 반대하던 카이로 시민들을 향해 보안군이 실탄을 발사해 40여 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 때는 보안군이 무르시 정권을 위해 시민들을 죽였고 지금은 무르시 정권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죽인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 이 같은 반대파에 대한 폭력에는 무슬림 형제단도 빠지지 않았다. 형제단의 자경단들은 반 무르시 시위대 공격에 적극 가담하고 수시로 기독교 콥트 교회와 소수 시아파 주민들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심지어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는 기독교 주민들더러 오스만 제국 시절 비 무슬림 주민들에게 부과되던 지즈야(Jizya)’란 세금을 납부하라고 협박을 일삼기도 했다.


변수
(變數):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의 선택


이렇듯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은 짧은 집권 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잘못과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물론 그 누가 정권을 잡든 간에 오늘날의 이집트가 직면한 그 수많은 난제를 불과 1년 만에 모조리 해결해주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무르시 정권은 아랍의 봄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반혁명 세력들의 끊임없는 시도와 책략의 본질을 대중들에게 솔직히 밝히고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과거 반 무바라크 독재 전선에 함께 했던 다양한 세력을 자기편으로 묶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 종교, 이념이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힘으로 윽박질렀다. 그런 슬픈 현실을 목격한 시민들의 실망감과 분노의 깊이는, 무르시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 다음 날 한 인권활동가가 트위터에 남겼다는 짧은 글이 잘 설명해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슬프고 미래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형제단이 우리에게 한 그 모든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쫓겨나고 창피당하는 걸 봐서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22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무르시의 퇴진과 조기 대선을 요구하는 서명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고, 630일에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곳곳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무르시와 형제단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73, 군 최고 사령관이자 국방장관인 압델 파타 엘 시시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국민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무르시 대통령과 내각의 권한을 즉각 중지시키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을 구금하는 동시에 형제단의 지도부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또한 한시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법원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 정부 설치를 발표했다.

이집트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전 세계 시민들의 여론까지 둘로 갈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출발한다. 정부가 많은 시민들의 열망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분노한 시민들이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런 요구에 따라 군부가 정권을 끌어내렸다고 했을 때 이건 쿠데타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혁명일까 하는 것이다. 혹은, 쿠데타는 쿠데타라 하더라도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정부시위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이건 민중의 쿠데타(inqilab ash-sha'bi)’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에 관해서 무르시 대통령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실정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이 공정하고 자유로운(여기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는 많지만) 투표를 통해 뽑은 대통령을 군이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끌어내린 건 어디까지나 불법적인 쿠데타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무르시의 축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독재의 길로 치닫는 정부를 주권자인 시민들이 반대해서 몰아낸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반박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형식 중 하나 일뿐인데 그걸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밸로토크라시(ballotocracy)’라고 잘라 말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공식은 딱히 없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고 틀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두 달 간 군부가 저지른 폭력과 인권침해가 무르시 정권 시절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황에서는 그런 논쟁 자체가 크게 의미 없게 돼 버렸다. 직접적인 학살과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된 무르시 지지자들뿐 아니라 무르시의 하야를 주장하며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고 군부의 개입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시민사회진영까지도 쿠데타 주도 세력들에 의해 자신들의 뜻이 완전히 왜곡당하고 주변부로 내몰리는 피해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르시 하야를 주장하는 국민 서명을 주도하고 630일 대규모 반 무르시 반 형제단 시위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타마루드(반란)’라는 연합조직이었다. 올해 스물여덟의 마흐무드 바드르를 비롯한 다섯 명의 청년들이 제안해서 결성된 이 조직은 올 4, 아주 느슨한 연대체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이끄는 헌법당과 함딘 사바히의 이집트 대중경향당, 사회민주당, 사회주의 동맹당, 이집트 공산당, 혁명적 사회주의자들(RS)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와 세속민족주의, 좌파진보세력이 대거 망라된 민족구국전선(NSF)’2011년 무바라크 축출 시위를 주도했던 ‘46일 청년운동’, 대선 당시 좌파와 청년그룹의 지지를 받았던 압델 모나임 아불 포토우 전 대선후보의 강한 이집트당같은 주요 정치사회세력과 인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들은 급격히 영향력을 키워갔다. 거기에 이집트독립노조총연맹(EFITU) 같은 진보적 노동운동조직과 대부분의 인권단체들도 그들의 무르시 하야 주장에 힘을 보탰을 뿐 아니라 군부의 개입 역시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수순이라 여기며 사실상 그들의 행동을 용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타마루드내부와 지지 세력들 가운데엔 과거 무바라크 독재정권의 인물들과 경제 엘리트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무바라크 정권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내고 아랍연맹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암르 무사와 타마루드운동에 많은 돈을 후원한 억만장자 나기브 사위리스가 대표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잠깐 한 번 생각해보자. 민중의 힘으로 무바라크를 타도했던 혁명의 정신을 무르시 정부와 형제단이 배신했기 때문에 무바라크 잔당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몰아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이다. 물론 그럼에도 (자유주의자들까지는 모르겠지만) 좌파와 진보세력이 그 대열에 합류해 박수를 보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집트의 좌파와 진보세력은 원래부터 무슬림 형제단을 믿지 않았다. 아니 혁명의 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들의 불신은 현실에서 정확히 사실로 드러났다. 그래서 더 이상 형제단에게 권력을 맡겨 놓았다가는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또 다른 독재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동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기득권 세력의 핵심 중의 핵심인 군부를 믿은 것도 절대 아니었다. 다만 2011년에 이어 이번에도 민중들의 직접 행동을 통해 잘못된 정권을 몰아냄으로써 거리 정치의 힘을 다시 한 번 입증해보이게 되면, 아무리 군부라 할지라도 향후 민중들의 뜻을 무시하거나 마냥 거스르지는 못할 거라는 판단을 한 듯하다.

하지만 이집트 좌파와 진보세력은 너무 안일하고 순진했다. 아니, 그들이 순진했다기보다는 군부와 기득권 세력이 그만큼 치밀하고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쿠데타 직후 엘 시시 장군과 최고군사위원회는 허울 좋은 민간 임시정부를 구성해놓고, 그 중 내무장관 자리에 과거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침해로 악명 높던 무함마드 이브라힘 장군을 앉혔다. 그리고 이브라힘 장관은 임명되자마자 은퇴한 경찰관들과 범죄자들을 끌어 모아 벨타지라는 보안 조직을 부활시켰다. 그들은 무르시 지지자들이 시위와 농성을 벌이는 현장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시민들을 학살하고 구타했다. 파업 현장에도 투입돼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엘 시시 사령관은 726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우리 군에게 테러와 폭력에 맞설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사를 보여주기 위해거리로 나와 반 형제단 시위를 벌여줄 것을 시민들에게 요구했다. 무르시 복귀와 형제단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폭력진압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정의내린 것이다. 당연히 인권단체들과 좌파, 진보적인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타마루드운동은 “(보안군이) 무슬림 형제단이 저지르는 폭력과 테러에 맞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환영했다. 그들이 말하는 보안군의 자기 역할8월 중순에 그야말로 정점에 달했다. 카이로의 라바아 알-아다위야 사원과 알 나흐다 광장, 람세스 광장, 아부 자아발 교도소 등에서 최소한 천 명이 넘는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것이다. 그러자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부통령과 여러 자유주의 성향 인사들이 항의의 뜻으로 자리를 내던졌다. 그러나 존경받는 노동운동 지도자이자 이집트 독립노조연맹 의장이었던 카말 아부 에이타 같은 인물은 그에 아랑곳 않고 인력 이민부 장관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밖에도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군부 편에 남아 있다.

3년 전 함께 거리에서 빵과 자유와 정의를 외쳤던 사람들은 이렇게 뿔뿔이 갈라지고 흩어졌다. 쫓겨난 대통령이 복귀할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며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도시 빈민, 계속 이어지는 학살에 이건 정말 아니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청년, 조만간 군의 총칼이 자신들에게도 겨눠질 걸 예감하는 노동자, 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상인, 이참에 테러리스트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흥분하는 언론인, 새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진보지식인……. 그런 가운데 장군들과 무바라크 시절 어깨에 힘깨나 줬던 고위 관료들, 정치인, 판검사, 자본가들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갔다. 아랍의 봄 이후 24개월 만인 지난 822일 교도소에서 풀려나 가택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된 옛 독재자 무바라크의 얼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두 번째 상수
(常數):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장군들

이집트 군부, 그 중에도 지도부를 구성하는 장군들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집트의 정치에 있어서 상수이다. 2011년 무바라크 축출 이후 과거 정권의 중심부를 차지하던 세력들 가운데 유일하게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세력이 그들이었다. 재계와 자본가들은 보름 넘게 나라 전체를 뒤덮은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많은 재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이후에도 극도의 경기침체와 재정위기로 인해 손실은 만회되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이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입김이 약화됐다. 사법부는 사소한 절차적 문제를 들어 의회와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하는 등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던 무르시 대통령의 포고령이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겨우 철회된 사례에서 보듯이 이제는 권력과 시민 양쪽의 눈치를 모두 봐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군부는 아랍의 봄 당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무력 진압 명령에도 중립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비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키긴 했지만 사실 군은 무르시 대통령과 형제단의 집권 때문에 손해 본 게 그다지 없었다. 원래 무바라크에서 무르시로 정권이 바뀌면서 장군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웠던 부분은 군에 대한 민간의 감시와 견제 여부였다. 이집트 군은 스스로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라 자처해왔으며, 따라서 행정부와 의회, 사법부, 시민사회 할 것 없이 그 어떤 외부세력도 손댈 수 없는 국가 위의 국가처럼 행동해왔다. 일례로, 국방예산의 정확한 금액과 사용처는 물론이거니와 미국 정부가 해마다 보내주는 약 13억 달러 어치의 군사원조도 군의 핵심 수뇌부 말고는 어디에 얼마가 쓰이고 얼마를 남겼는지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대통령도 모르고 의회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군은 독자적으로 운영해온 기업체들과 각종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해마다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과 자산이 이집트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게는 15퍼센트, 많게는 40퍼센트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역시도 정확한 규모는 아마 장군들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아랍의 봄 이후 시민들의 주된 개혁 요구 중 하나가 군을 정부의 통제권 아래 두고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르시 정부는 새로 제정된 헌법에서도 군의 예산과 임무는 주로 군인들로 구성될 국방위원회가 알아서 정하고 집행하도록 했고, “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를 제외하고라는 애매한 문구를 넣어 여전히 민간인을 군사법정에서 재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럼에도 군부가 무르시 정권 제거에 나선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슬람주의의 확산에 맞서는 세속주의 수호세력이라는 이집트(와 터키, 알제리 등)에서의 군의 특수한 역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이집트에서는 역대 군사정부의 대통령들부터 장군들, 장교들, 일반 사병들까지도 대부분 무슬림들이다. 이번에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이집트 정국의 최대 실세가 된 엘 시시 국방장관 역시도 집 밖에서는 부인에게 항상 이슬람식 복장을 갖추게 할 정도로 독실하고 보수적인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슬람을 믿는 것, 이슬람 신앙과 법률이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이자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슬람주의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이 갈수록 이슬람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면서 군부와 세속주의 시민들의 경계심과 반발이 커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처럼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로까지 치달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집트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을 믿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는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릴 만큼 형제단 지도부의 현실감각이 바닥이거나 근본주의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진 이슬람주의 성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이번에 군부의 편에서 쿠데타를 지지한 알 누르당을 먼저 제거했어야 맞다 그들은 수니파 이슬람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해온 살라피 무슬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부가 이번에 무르시 정권 축출과 무슬림 형제단 무력화 카드를 끄집어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집트 내에서 군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잘 조직되고 확고한 지지층을 가진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굳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60년 전 나세르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말이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무르시 정권과 형제단은 잇단 실정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집권세력에게서 등을 돌린 시민들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이 나서게 됐다는 쿠데타의 명분까지 만들어진 셈이다. 그리고 630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기회로 삼아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군은 1년 만에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집트는 다시 군사독재라는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비록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이집트의 현실이다.


세 번째 상수
(常數):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를 수 없는 미국과 지역 국가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강대국들과 주변지역의 다른 국가들 역시도 이집트 위기에 있어서 상수에 속한다. 지역의 정치 지형이 정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키지 않는 한 각 나라들의 입장과 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3일 쿠데타로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이 무너진 직후부터 미국과 유럽연합 정부들은 안팎으로 여론의 많은 압력을 받았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쿠데타로 공식 인정하라는 압력이었다. 특히 미국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79년 이래로 이집트 군부에게 모두 660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해왔다. 이집트가 지금까지 미국에게서 건네받은 무기만 해도 전투기가 221, 탱크가 약 천여 대에 달하는 등, 이집트는 이스라엘 다음가는 미국의 원조 수혜국이었다. 미국과 이집트 군부 사이의 밀월 관계는 해마다 약 5백 명의 이집트 군 장교들을 펜실베이니아의 육군대학 등으로 불러들여 훈련과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덕분에 이집트 군대는 철저히 미국화되었고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완전히 중독되어 버렸다.

사실 미국 정부로서는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이 통치하는 이집트가 생각보다 그리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랍의 봄 항쟁으로 독재자 무바라크가 쫓겨날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불확실성이었다. 그들은 중동이든 중남미든 아시아든 간에 지역의 한 국가에서 정권이나 체제가 바뀔 때마다 그걸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예측가능성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의 지역 패권과 이익을 보장해주는 정권이 들어서면 가장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느 선에서 자신들이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정권이면 용인해주는 식이었다. 거기에 있어서 그 정권이 독재냐 민주적이냐, 군인이냐 민간인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걸 가리켜 지역 안정이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정권은 미국이 원하는 그런 안정을 전혀 깨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이집트에게 막대한 원조를 안겨주게 된 계기가 된 이스라엘과 이집트 정부 간의 1979년 평화협정을 그대로 존중했다. 경제적으로도 신자유주의 개방정책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고, IMF와 세계은행의 처방도 충실히 따랐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르시 정권을 갈아치울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이집트 군부가 정권을 뒤엎고 스스로 권력을 잡겠다고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뼛속까지 친미인 이집트 군부에 굳이 등을 돌리면서까지 그들을 강하게 야단칠 필요가 있을까?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끝까지 이집트의 정치적 격변을 가리켜 쿠데타라 부르길 거부하고, 존 케리 국무장관이 거기에 한술 더 떠 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칭송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미국의 육군대학에서 미국의 정치 외교 메커니즘을 꼼꼼히 배워간 이집트의 엘 시시와 장군들은 그런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밖에도 그들이 믿는 구석이 또 있었다. 바로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지역의 친미국가 연결축의 나머지 두 나라였다. 예상대로 이스라엘은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인 <미국 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를 통해서 이집트에 대한 원조를 중단시키려던 미 상원의 표결이 86표 대 13표로 부결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바레인은 쿠데타 이틀 뒤 12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새로 들어설 정부에게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랍의 봄의 영향이 자국 내의 대대적인 민주화 요구로까지 확산될까봐 전전긍긍해왔던 왕정독재국가들로, 그들은 이집트 군부의 권력 장악이 결국은 아랍의 봄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믿는 것이다.

그에 반해 무슬림 형제단이 기댈 곳은 없다. 이란-시리아-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이른바 지역의 반미 주축들은 수니파인 무슬림 형제단과는 달리 시아파 무슬림들이었다. 게다가 형제단의 무르시 대통령은 집권하는 동안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축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샀다. 그나마 이슬람주의자들로 구성된 정의개발당이 집권해온 터키와 카타르, 이번 사태로 이집트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 아프리카 연맹 정도가 쿠데타를 비난하고 무르시 복귀를 요구하고 있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만한 카드와 지렛대는 없다. 즉 현재의 이집트 사태에 이를 때까지 국제사회의 입장과 태도는 원래부터 고정된 상수였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전망
: 결국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민중들뿐이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되돌아보니, 이집트의 현 위기라는 방정식에 있어서 결과를 달라지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변수는 이집트 시민들이었다. 만약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을 비판하며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이 군부의 쿠데타 움직임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모르긴 해도 지금처럼 군부가 이렇게 수월하게 과거 독재 시대 인물들과 체제를 다시 부활시켜 새로운 독재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자들만 고립돼서 저항하다 학살당하고 쫓겨 다니는 현재의 국면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집트 시민들 중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탄압하는 군부의 행동을 지지하거나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대의 탱크와 총칼로는 결코 빵과 자유와 정의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2011년과 2013년 두 번에 걸쳐 민중들을 거리로 이끌어낸 이집트의 청년, 노동자, 여성, 인권활동가, 좌파, 시민사회진영은 지금부터 다시 전열을 추스르고 그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집트의 미래라는 방정식의 답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트온 쪽지로 보내기

 
   
 

Copyleft by 진보평론(The Radical Review)   전화: 02)2277-7950 팩스: 02)6008-5138
(우100-391) 서울 중구 장충동1가 38-32 파인빌 4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