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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글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
작성일 : 12-09-11 17:21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517  

오늘날 한국에서 진보적인 대의정치를 대표하는 것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이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이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13%를 득표하면서 13석을 얻어냈다. 그러나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 안에서 제기된 총체적인 부정, 부실한 당내 선거와 이후 전개된 당권파 대 비당권파의 대립은 ‘통합진보당’의 파산뿐만 아니라 진보정치 전체에 대한 대중적 환멸의 확산과 함께 한국진보정당운동 자체의 공멸이라는 위기를 가져왔다. 이에 “진보평론”은 진보신당(김종철),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박성인), 사회진보연대(이현대),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모임(정종권)에서 활동하는 4인과 진보적 지식인 1인(이창언)에게 작금의 현안과 관련된 12개의 질문을 주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라는 특집을 구성하였다.
이번 특집 글은 지난 총선 평가와 함께 이후 대선 전망까지를 포함하여 한국진보정당과 진보정치에 대한 견해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독자의 한 사람이자 이번 기획의 기획자로서 편집 자는 이 글들 속에서 한국의 진보정당 또는 진보정치운동의 현재와 그들 사이에 부재하는 소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지난 총선과 현재의 국면에서 가장 큰 문제로 ‘노동정치의 실종’을 지적하면서 ‘독자적인 노동정치로서 진보정치’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노동정치’와 이에 따른 ‘전략의 상’은 서로 매우 다르다. 이들을 관통하는 코드는 ‘선거’, ‘의회’, ‘정당’이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는 구획선은 오늘날의 지평에서 볼 때, 제도의 ‘안’과 ‘밖’이다.
제도 ‘안’은 지금의 선거-의회 공간 속에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제도 안의 ‘정당’을 만들고자 하며 국가를 이용하여 노동의 정치를 만들고자 한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등은 이를 대표하며 의회-선거 공간에서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대중을 대의제적 정치의 주체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 ‘밖’은 1인 1표로 재현되는 대의제적인 정치가 가지고 있는 국가 안으로의 포획과 체제내화를 비판하면서 이들의 집권전략을 ‘의회주의’라고 비판하며 현장과 투쟁, 대중 자신의 주체화 전략을 추구한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개의 극이 현실 정치에서는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이 두 개의 극이 현실정치에서 작동한다면 문제는 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좌파정치는 이 두 개의 가운데 한 극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이 사이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이 두 개의 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주장하는 운동은 있을 수 없다. 좌파정치는 의회-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그 밖에 존재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의회-제도가 가지고 있는 포획과 체제내화의 경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번 특집 글에서 어느 한쪽을 끊임없이 밀쳐내려고 하는 어떤 경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서로를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상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것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부정적 몸짓과 목소리로 침몰하는 배를 구할 수 없다. 배에 타고 있는 구성원들의 차이가 있지만 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통의 정치적 의지를 가진 실천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정치가 필요하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의 프레임’을 창출하고 ‘집합적 권력의지’를 생산하면서 반자본의 대중적 열망을 새로운 미래 창출의 ‘희망’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진보운동은 여전히 부정적 몸짓과 비판, 낡은 정치적 폭로에 머물고 있다. 이로 인해 공통의 프레임 생산을, 자기 긍정적인 내용의 생산과 희망의 창출을 가로막게 된다. 한국좌파의, 정파운동의 폐해는 이것이다. 여러 필자가 주장하듯이 ‘정파’는 있을 수 있으며 ‘정파’가 살아있을 때 정치운동은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파가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내용의 생산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정파들에 대한 부정적 몸짓으로 자신들을 묶는 것이 되어버릴 때, 정치운동은 ‘낡은 것’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이 보여주는 ‘부정적 몸짓의 과잉과 긍정적 내용의 빈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비판은 예리하면서도 단호하다. 하지만 ‘좌파진보진영이 제기해야 할 새로운 통일의 패러다임’이나 ‘좌파진보운동 전체가 바꾸어야 할 문화’, ‘새로운 프레임의 내용’, ‘진보좌파운동의 단기적·중장기적 과제’ 등, 정작 일보 전진을 위해 공통적으로 생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명료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이는 몇몇 사람의 탓은 아닐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이 강령이나 정책 프로그램, 정치적 로드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다.
공통의 내용을 생산하는 소통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창언은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 시안”을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보의 재구성 또는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에 앞서 ‘위기론의 타자화’ 극복과 ‘위기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즉 진보적 성찰성에 기초한 혁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진당의 오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되, 그들만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하며 진보좌파의 실패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반성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도덕성 회복 등 내부 혁신과 통합적 리더십 구축과 같은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보좌파의 가치와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좌파운동의 공통성을 생산할 수 있는 ‘소통’이 필요하다. 또한 ‘인식의 전환’과 ‘태도의 전환’이 있어야하고 상대에 대한 부정적 몸짓과 비판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판의 예리한 칼날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며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의 난맥상이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이창언이 말하고 있듯이 좌파 전체의 책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의 위기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전개된 운동의 내재적 위기, 즉 권위주의 시기 운동의 한 주기를 끝내고, 민주화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는데, 특히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기(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과 신세대 논쟁, 소비문화의 확산,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이 전면적으로 수용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나타났으며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담론, 민주주의운동에 대한 회의와 도전이 나타나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심화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대화와 토론, 논쟁’을 가장한 ‘자기 안에서의 대화’, ‘독백’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 이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성찰에 기초한 태도의 변환이 자신이 가진 한계에 기초하여 다른 정치집단과 함께 정치적 게임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좌파정치는 대중의 변혁의 열망을 집단적 정치권력의 힘으로 바꾸어가면서 자본-임노동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정치집단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 미래사회의 공통성을 창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의 정치’를 말하고 ‘노동자계급운동’을 말한다고 그것이 정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 ‘노동의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좌파정치운동단체들이 이야기하는 ‘노동의 정치’는 좌파의 정치라고 할 수 없다.
1980년대 좌파운동보다 오늘날 좌파운동이 가지고 있는 퇴행성은, 과거의 운동이 오히려 노동자와 노동자계급을 구분하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치’를 고수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노동자는 자기 모순적이며 정신분열자이다. 한편으로 자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임노동자이면서도 자본이 임노동을 상품으로 구매할 때 배제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가진 자이다. 여기서 노동은 자본이 임노동이라는 상품으로 포획할 때 배제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외부이자 자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모순 속에 ‘좌파의 정치’의 고유성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노동의 정치를 말하면서 실상은 ‘노동조합의 정치’라는 임노동자의 정치를 수행하고 있다.
이번 특집 글에서 보듯이 필자들은 ‘민주노총’을 질책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본래가 임노동자의 생존권과 이익을 위해 싸우는 ‘조합’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고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정당정치를 이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민주노총은 정치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임노동의 교환시스템이 만들어낸 조직일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민주노총이 아니라 바로 좌파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좌파정치운동, 좌파정당운동에 있다. 그렇다면 좌파정당운동이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임노동자를 ‘노동자’로 바꾸면서 변혁의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야 하는 자신들의 정치행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시스템은 산업자본주의 시절의 노동과 자본처럼 명료한 적대의 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보여주고 있는 ‘불안정성’과 ‘위기’는 자본의 주기적 위기를 넘어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본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책략들을 구사하고 있다. 자본의 책략들은 점점 다가오는 임박한 파국의 징조들이 유발하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기이해’와 총자본의 ‘공통이해’ 사이를 반복하며 필사적으로 살아있는 노동 전체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전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임노동 없이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노동에 대해 수행하는 전쟁은 다른 한편으로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메커니즘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임노동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두 개의 요소,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동일성 속에서 노동을 포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동을 배제한다. 실업자와 비정규직 등 각종 형태의 불안정한 노동은 배제된 노동을 대표한다. 여기서 임노동자는 오히려 자본과 함께 하는 ‘반동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임노동자로서의 자신을 파괴하는 ‘단절’을 수행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정치는 이런 단절을 사유하지 않는다. ‘단절’이 없다면 피억압인민 전체를 해방시키는 ‘해방의 정치’는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의 좌파정치는 ‘노동중심성’과 ‘노동자계급’을 말할 뿐, 이런 단절을 수행하는 정치를 사유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성찰 대신에 현재 자본주의가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현실과 자본의 위기를 ‘폭로’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폭로’라고 할 수 있을까? ‘폭로’라는 것은 감추어진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의 지배가 사람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몰아가며 삶을 더욱 잔혹한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행위를 만들어내는 ‘폭로’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 정보 부족에 시달렸던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젝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역설이 진짜 우리가 처한 곤란이라는 것을. 그러나 한국에서의 노동정치, 진보정치는 이 ‘곤란’을 사유하지 않으며 적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노동 자신의 ‘자기 연민’으로, 투쟁에 대한 헌신성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100년 전에 레닌은 이른바 ‘노동자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기를 두려워하는 명제,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테제에서 ‘외부’는 지식인도, 엘리트도 아니다. 거기에서 그가 힘주어 말했던 것은 노동조합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표상하는 정치는 ‘임노동의 정치’이다. 그것은 임노동이 자본에 자신을 팔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힘의 불균형과 생존권의 위협,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여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정치인 것이다. 노동법과 복지를 둘러싼 정치가 비록 국가권력이나 법제정과 같은 부르주아 정치 차원으로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노동의 정치는 아니다. 이 또한 자본과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 하는 ‘노동조합의 정치’일 뿐이다. 반면 ‘사회민주주의 정치’는 임노동을 표상하는 정치가 아니라 임노동 그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자본을 파괴하고자 하는 정치이다. 따라서 그것이 표상하는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고통 받는 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에 묶여 있는 임노동자인,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벗어나 ‘노동’이라는 인류 전체를 표상하며 ‘해방의 정치’를 수행하는 노동자이다.
물론 노동조합이 아무런 존재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치와 의미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자기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만 그것이 생산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수행하는 정치와 좌파정치운동이 수행하는 정치는 질적으로 다르며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이 때만이 ‘노동조합의 정치’가 마치 ‘해방의 정치’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해방의 정치’는 자본과의 이해관계, 부르주아 국가로 얽혀 들어가는 ‘정치’와 단절하고 ‘해방의 정치적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런 형식으로 ‘당’을 사유했다.
‘당’은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생산하는 주체 생산의 형식일 뿐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는 내용을 생산하는 조직 형식이다. 반면 ‘당’은 조합원의 이익이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 때로는 자신에게 당장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며 모든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연결시키고 집합적인 권력의 힘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의 내용을 생산하는 조직 형식이다. 따라서 레닌의 의미에서 ‘당’은 거기에서 수행하는 일상적인 활동 전체를 ‘해방의 정치’로,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바꾸어 놓는 정치적 주체형성의 조직형식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강제적인 조직형식을 사유했던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자본-임노동의 교환체계와 상품물신성이라는 재현형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 안에는 이미 대의제라는 자본주의적 재현체제와 상품형식이 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처럼 ‘자신과의 단절’이라는 폭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단절은 자본주의적인 아비투스가 일상적으로 체현되듯이 ‘단절’ 또한 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레닌이 당을 통해 제출한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고유성은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을 만들어내면서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를 부정하는 형식 속에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 레닌이 만들었던 볼세비키당을 여기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핵심은 ‘외부’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것을 통해서 제기하고 있는 좌파정치운동의 고유성이 무엇인가에 있다. 하지만 오늘날 ‘노동의 정치’는 이러한 고유성을 만들어 내는 자신과의 단절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단절 대신에 ‘노동’이라는 애매한 기표에 얽혀, 오히려 노동을 ‘임노동’으로, ‘주체가 져야 할 고독한 결단’을 인민에 대한 자기 연민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를 유아(乳兒)로 바꾸어 놓고 자신을 ‘어머니’라는 욕망의 재현적 대체물로 바꾸어 놓을 뿐이다. 진정한 노동의 정치는 노동자 자신의 정치이다. 그렇게 하려면 노동자 자신이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고통스런 자기 단련과 혹독한 자기비판, 자기에 대한 철저한 대상화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정치운동은 ‘노동의 정치’를 말하면서 이것을 사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임박한 파국, 자본의 폭력, 국가의 패악과 실정에 대한 폭로와 분노로, 진정한 노동의 정치를 대체하는, 사이비정치의 가장된 몸짓일 뿐이다. 제도와 반제도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비판은 결코 자신을 향해 있지 않으며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만일 좌파정치운동의 고유한 자리가 바로 임노동자(정규직 노동자와 대의제)이면서 자본이 포획하기 위해 배제한 노동(실업-불안정노동자와 주권자)이라는 이 모순 속에 있다면 좌파정치는 제도와 반제도 둘 다의 차원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도와 반제도 각각의 한계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회정치는 제도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의 한계를 인식해야 하며 반제도가 수행하는 정치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를 사유해야 한다. 제도 밖에서 전복적 변혁주체의 형성을 모색하는 정치는 그것이 현실적인 국가 정책에 무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의회정치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를 사유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좌파정치는 의회정치를 논의하면서 ‘반제도’라는 칼날을 들이대고 반제도를 논하면서 ‘제도’라는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그것은 그 각각이 수행되고 있는 정치공간의 장점과 필요성을 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번 모든 특집 글에서 동의하고 있듯이 현재의 국면은 진보정당운동의 한 순환이 끝나가는, 새로운 순환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이 새로운 순환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서 동의하는 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우리는 먼저 부정적 몸짓 대신에 자신의 한계에 대한 성찰과 상호 ‘관계 맺기’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제도 대 반제도’의 부정적 몸짓을 통한 이분법에 갇혀 있었던 기존의 진보정치운동을 끝내고 새로운 순환, 즉 제도 대 반제도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면서 사회 전체 차원에서 해방의 정치를 생산하는 ‘공통의 정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태도와 인식의 전환 없이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이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진보평론”이 기획한 ‘한국진보정당운동에 길을 묻다’에서 이창언이 제안한 것으로부터 토론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진보좌파의 이념과 노선의 재구성은 진보적 성찰성에 기초하여 ‘운동의 급진적 상상력’과 ‘대중적 역동성의 접합’을 통한 민주적 경합공간의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포스트민주화시대의 반제통일전선론 또는 그 아류인 반(反)박근혜 민주대연합이 아닌 적·녹·보 동맹을 기본으로 하되 급진적 노동-민생정치, 지역 풀뿌리 정치, 생활정치로의 급진적 변화와 대중적 역동성의 접합”의 시도를 제안하고 있다. “진보평론”은 이번 기획을 통해서 이와 같은 토론이 공론화되기를 기대한다.

발언대 란에는 대구 성서공단노동조합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임복남의 “최저임금 인상이 아닌 생활임금 쟁취로 나아가야”라는 글을 실었다. 노조 설립 때부터 최저임금 위반업체 고발사업을 해오던 노동조합, 어느 때부터인가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적용 대상자로 하향 평준화되어 버렸음을 알게 된다. 이제 공단에서 임금 인상 투쟁은 사라졌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대체되었다. 이 글은 노동조합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단절을 위해 공단 노동자와 함께 하는, 최저임금 인상투쟁을 넘어서 생활임금 쟁취투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정세 란에는 김세균의 “진보적 대학개혁을 위한 10대 정책적 과제”를 게재했다. 필자는 입시경쟁 교육으로 황폐해진 초중등 교육을 정상화시키고, 정상화된 교육을 받은 모든 학생들이 신설된 교양대학에서 2년간 수준 높은 기초교양 교육을 받은 후, 바로 사회로 진출하거나 일반대학 혹은 직업전문대학으로 진학토록 하자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중등교육 과정을 5년으로 줄이고 2년간의 대학 기초교양 교육과정을 위한 단일 ‘전국국립교양대학교’ 설립이라는 획기적인 개혁안을 제출한다.
박이은실은 “낙태, 피임, 그 넌덜머리나는 전장의 이름으로 쓰는 편지”에서 낙태 시술을 한 자신의 여자 친구와 조산사를 고발하여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사안을 다룬다. 이 건에 대해 헌재는 여성의 판단은 ‘사익’에 근거한 것이고 이에 맞선 남성의 판단은 ‘공익’에 근거한다는 이유로 합헌 판결을 내렸다. 필자는 프리다 칼로의 “나의 탄생”을 보며 인간을 생산하는 기능에 대한 통제의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국제 란에서 장시복은 “미국 금융시장의 회복과 연준의 비관행적 통화정책”에서 2007년 발생해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세계대공황에 대한 미연방준비위원회의 비관행적 조치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국채매입으로 정부의 재정규율은 약화되고 방만한 재정운용, 나아가 막대한 국가채무의 누적으로 경기부양 효과는 사라졌다. 실물부문의 회복, 특히 실업률의 감소가 뚜렷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관행적 조치는 추가적인 경기부양에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일반 논문으로는 서영표의 “기로에 선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환경운동연합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시민사회운동 단체는 현재의 ‘자원’에 안주하지 않고 시민을 주체로 만드는 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인지, 주어진 ‘정치적 기회구조’를 조직의 보존과 유지에만 활용하는 문제를 비판한다. 나아가 시민사회운동이 스스로가 내세운 사회비판에 얼마나 충실한지, 대안사회로의 이행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로부터 시민사회운동이 ‘운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박종성의 “아나키즘 철학의 운명과 정치 철학의 과제”는 국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에 대해 분석한다. 아나키즘은 공통적으로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고 권력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정치를 거부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가는 ‘자본주의’와, 그리고 저항은 자유를 억압하는 ‘자본주의’와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 파괴가 정치의 소멸은 아니며 오히려 국가 파괴는 새로운 권력의 획득이고 자유의 확장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기에 권력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권력의 획득을 주장한다.
김덕민의 “공산주의는 어디에?: 자크 비데의 Court traité des idéologies(2008)에 대한 연구노트”는 알튀세르 호명 테제를 중심으로 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재사고한다. 필자는 공산주의 이념을 현대성의 메타구조 안에 있는 정치적 형세 속에서 근본 계급의 관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려한다. 또한 공산주의 이념은 자유주의와의 공통의 토대를 바탕으로 민족국가의 시민적 맥락 속에 있는 계급 모순의 고유한 다의성(amphibology)을 통해 분할된다고 본다.
윤수연의 “한국 비속어에 드러난 타자화와 권력 담론의 재생산”은 사회로부터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으로부터 사회’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한국에서 사용되는 비속어 중 여성, 성기 및 성행위, 장애인에 대한 욕설과 비속어를 정치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러한 언표에서 권력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하거나 새로이 추가되는 비속어가 어떻게 담론 권력을 재생산하는지 고찰한다.
이번 호부터 젊은 세대의 이론적 글을 적극 발굴하는 차원에서 청년이론마당을 신설한다. 김승환의 “국가와 폭력”이 첫 번째 글이다. 이 글은 국가폭력과 관련하여 국가에 의한 과거사 청산의 한계점을 바탕으로 국가폭력의 의미를 고찰하고 국가폭력의 대척점에 있는 저항폭력을 인격화된 폭력으로 간주함으로써 나타나는 위험을 살핀다. 국가폭력을 제어하고, 민중의 힘을 증대시켜 올바른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차이의 정치,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재산의 크기와 상관없이 호모사케르가 되지 않을 기본인권에 대한 고민을 다룬다.
서평은 2개를 실었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을 비롯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가시화되었지만 1980년대에 5‧18 광주항쟁의 사후 효과로 부활한 맑스주의는 한국사회의 이론과 실천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흐름이 있었다. 김정한의 “포스트맑스주의 고전 읽기”(“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는, 그 당시 번역되어 냉대를 받았다가 최근 다시 출간된 이 책의 의미와 한계를 다룬다. 이 책은 수많은 이론들을 종합하고 논파하며 재구성하는 묘미가 있으며 다양한 사회운동의 연대를 통한 민주주의 혁명의 확대와 심화를 좌파의 대안으로 설정하며, 포스트구조주의 지형에서 맑스주의 전통을 새롭게 혁신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고 본다.
김성일은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두 권의 만화책(“사람 냄새”, “먼지 없는 방”)의 발간을 맞아 삼성이란 개별 자본과 자본주의를 다룬다. IBM이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를 통해 이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도 별다른 조치 없이 공장을 가동한 삼성,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암연구소(IARC)가 심야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지만 계속되는 심야노동,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로 대재앙을 맞았지만 고리원전1호기의 재가동……. 그런 자본주의에 대해 강력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번 호 특집은 진보정당의 평가와 이후의 전망을 담아보고자 했다. 좋은 의미이든 아니든 진보정치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현재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발언대, 정세 등에서는 현재의 이슈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냈으며, 일반논문들에서는 현재를 벗어나지 않는 이론적 쟁점을 담고 있다. 모두 필자들의 고민과 실천이 절절이 묻어나는 글들이지만 그 평가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필자들과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번 호도 꼼꼼하게 따져 읽고 서슴없는 비판과 조언을 부탁드린다. 
 

2012. 9. 1.
편집위원 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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