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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글
 
 
노동 중심의 생산 패러다임 넘어서기
작성일 : 12-12-10 14:06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594  

노동 중심의 생산패러다임 넘어서기


2008년 이명박 정권은, ‘촛불’의 행진을 막았던 ‘명박산성’과 ‘물대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2년 현재 이명박 정권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후광 뒤에 숨어 운신하는 처지가 되었다.
5년이 흐른 현재의 시점에도 ‘부자를 꿈꾸는 우리의 욕망’은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휘몰아쳤던 신자유주의는 ‘고삐 풀린 자본의 욕망’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들이 내세웠던 공동체적 가치와 국가의 공적 기능을 지키지 않는다. 이는 제우스가 부친을 살해한 이후 이루어졌던 ‘토템적 상징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갔음을 뜻한다. 아버지의 욕망에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이것을 전도시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어떤 ‘욕망’이다.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욕망, ‘사탕’을 얻기 위해 ‘심부름’을 하는 아이나 ‘돈’을 받기 위해 학교에 가는 어떤 학생들처럼 자본의 욕망은 자본가만이 가진 욕망이 아니다. ‘자기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부’를 향한 자본의 욕망은 그들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 없이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은 우리에게 달콤한 속삭임을 건넨다. ‘너도 성실하게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그 부로 향락을 누릴 수 있다’고.
근대의 ‘생산 패러다임’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 내재화된 삶의 양식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치 인식적 메커니즘이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외설적 아버지’는 그 스스로 이런 ‘근면-성실-책임’의 메커니즘을 파괴해버렸다. 더 이상 ‘부’가 그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서 얻은 ‘부’가 아니듯이 ‘빈곤’도 더 이상 그가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부자 되세요’라는 달콤한 속삭임만으로 사람들을 꾀어낼 수 없다. 아버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하는 아이처럼 국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시키며 근대적 산업화의 기수로 자신을 주체화하고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새마을운동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퇴행적인, ‘근면-성실’의 ‘생산 패러다임’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가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생산’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동어반복적인, 이 정의에서 가치와 생산은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을 완성하는 것은 ‘노동’이다. 우리네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가치’있는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노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말들을 우리는 듣게 될 것이다.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자체를 생산하는, 이 사회의 주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명박 정권의 ‘국민 여러분, 부자 되세요’처럼 달콤한 악마적 속삭임에 불과하다. 박정희도 ‘산업의 역군’으로 ‘근로자’를 상징화했다. 심지어 박정희는 가난과 궁핍의 수난을 겪어온 민족의 한을 넘어설 수 있는 주체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주체로 노동자들을 상징화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근대화는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의 독점체인 국가가 ‘노동의 배제’가 아니라 ‘노동의 찬양’에 기초한 ‘근면-성실한 신체’, 곧 ‘생산적 국민이라는 종복(subject, 주체)’을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침 6시면 ‘잘 살아보세’란 노래가 동네 전체에 울려 퍼졌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빗자루를 들고 모여들어 골목길을 쓸었다. 노동은 신성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신성한 노동은 그것이 자본을 증식하는 한에서였다. 따라서 항상 파이의 크기를 키워서 모두 다 잘 사는 길을 모색하자며 정작 커진 파이를 가져간 것은 ‘재벌’ 또는 소수의 ‘지배자들’이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배제된 것은 신성한 ‘노동의 가치’가 아니다. 배제된 것은 오히려 노동이 생산한 부를 특정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전유하면서 그 부를 그들만의 향락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박정희의 개발독재식 파시즘에 대항했던 운동들은 그 부에 대한 ‘전 인민적 향유’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몫과 권리를 주장하는 근대적 노동권 확보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물론 당시의 임노동이 강력한 파쇼권력에 의해 주도된 자본의 힘에 밀려, 등가교환을 할 수 없었고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조차 없는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투쟁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것은 점차 퇴행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제 자본주의는 ‘노동’ 그 자체를 배제하며 자신들이 소유한 거대한 부를 기반으로 소비-향락의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동자는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이며 대다수는 실업에서 비정규직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더욱이 오늘날 자본이 야기하는 문제 또한 복합적이며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생산의 패러다임’은 노동자만을 이 사회의 생산적인 주체로 특권화하며 자본주의적인 노동운동, 즉 자본-임노동의 교환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올리는 것에만 주력하는 노동조합주의 형태로 노동운동을 가둔다.
이런 점에서 이번 진보평론의 특집은 ‘노동 중심의 생산 패러다임 넘어서기’로 구성하였다. 이번 특집은 4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기획에는 청년층의 노동에 관한 꼭지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빠졌다. 기획 에서 청년층의 노동에 대한 인식을 주요하게 본 이유는 최근 청년세대의 취업난과 구직경쟁을 보면 자본이 어떻게 노동을 주변화 하면서 자신의 규율체계 속으로 다시 포섭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구직경쟁을 벌이는 청년세대 내부에서도 경쟁을 통해 멋진 삶을 즐기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노동에 대한 혐오가 동시에 존재한다. 노동에 대한 혐오는 사회가 이미 계급적으로 분열된 사회이며 동시에 ‘노동하는 자’의 소외된 자기부정을 명백히 보여주는 징표임에도, 청년세대가 갖고 있는 경쟁을 통해 성공한 삶에 대한 판타지(허구적 욕망)가 ‘노동하는 자’로서의 소외된 자기부정(=노동에 대한 혐오)을 정당화하고 있다. 삶의 허구적 욕망에 기초한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만연한 실업상태와 그것이 강요하는 가혹한 구직경쟁에도 청년세대가 사회적 주체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된 이데올로기적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청년세대의 사회적 주체화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뤄 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번에 실린 각각의 글들 사이에는 일정한 이견이 있음에도 ‘노동 중심의 생산 패러다임’을 넘어서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다.
박영균은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과 현대자본주의체제 분석”이라는 글을 통해서 기존에 읽었던 맑스가 아니라 그 속에서 억압되어 왔던 맑스를 〈경제학-철학수고〉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에 대한 맑스의 노트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조정환은 “신용과 노동: 화폐적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와 노동의 이중화”에서 맑스의 시초축적론과 관련하여 국가신용의 문제를 다루면서 국가폭력이 신용을 창출하면서 “사회적 권리를 사회적 부채로 전환시키고, 또 사회적 부채를 사적 부채로 전환”시켰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김도현은 “정립에서 자립으로, 자립에서 다시 연립으로”에서 장애인이란 호명은 근대적 노동개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한국의 장애인대중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자립’은 신체-노동활동-일상활동이란 맥락 속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개인주의의 틀 안에 있다고 본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기회의 평등과 시장주의적 대안과 자활적 노동정책에 동요하고 있기에, 대안으로 노동을 연립적 시민권으로 재구성하자고 실험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건준은 “노동을 지배하는 배신의 프레임들”에서 희망은 빠지고 위기만 남아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공포와 위기의 틀에서 벗어난 ‘자존감’과 ‘희망’에 기초한 노동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그는 현장운동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이 내적으로 성찰해야 할 지점들을 생생한 체험적 언어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필자들의 제안은 제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산의 패러다임’ 또는 ‘노동의 과잉상징화’에 기초한 현재의 노동운동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생산의 패러다임은 암묵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규정되는 ‘생산’의 의미체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사회적인 지배담론을 만들어내는 통념의 틀이 되고 있다. 여기서 노동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과잉상징화’와 ‘생산의 패러다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생산’과 ‘노동’이라는 생산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우리의 대안 세계적 상상력을 ‘부채’와 ‘장애인’에 대한 영역으로 넓힘과 동시에 이를 통해서 노동운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자본을 넘어선 대안 세계적 전망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제출되기는 했지만 박영균은 “향유하는 사회”라는 맑스의 전망을 통해서 “자본 없이 살기”에 기초한 “생산-소비의 코뮌”을, 조정환은 “보편적 채무관계를 특이성들의 보편적 공통되기로, 보편적 상호부조로 만드는 것”을, 김도현은 “자립/의존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함께 어울려 섬’, 즉 연립”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 시평에 실린 김수행의 “미국 대선과 한국 대선을 비교하면”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국면에서 화두로 떠오른 경제민주화가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노동하는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현재의 다양한 논의들의 대안적 전망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정세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분명하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 후보가 둘이라는 점도 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갈 길은 더욱 험난하고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선은 현 시기의 정세를 규정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변수라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이번 진보평론에는 많은 선거 관련 글들이 배치되어 있다.
국제 란은 원영수의 “베네수엘라 대선: 차베스 4선의 정치적 의미”, 오창룡의 일반논문, “제왕적 우파 권력은 덧없이 사라지는가?: 프랑스 좌파의 사르코지 비판과 그 한계를 중심으로”가 그러하다. 이 글들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국제 정치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선과 좌파정치운동에 새로운 상상력을 주고 있다. 특히 오창룡이 말하고 있듯이 “국가론의 ‘부재’ 혹은 ‘재구성 실패’”와 “‘자본주의 국가’의 지속적인 변이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 한국의 좌파 정치운동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정세 란에서 정원현의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한발 전진을 꾀하며!: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에 대해”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복직을 요구하며 송전탑에서 농성하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 곧 희망을 담고 있다.
일반논문으로 신희영의 “한국 경제 성격 논쟁과 사회화론에 대하여”에서 한국 경제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최근 전개되고 있는 논쟁의 역사와 쟁점들을 살펴본다. 김상조(유종일, 홍종학 등)와 장하준(정승일, 김종태 등) 외에도 생산수단의 국유화론자와 주식회사에서의 노동자 경영권 실현 논자들, ‘연기금 사회주의 방안’ 논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한국의 독점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경제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은 법적 제도적인 차원의 개혁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등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급진적 운동을 수반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은 기간산업에 대한 국유화와 연기금을 통한 사회적 통제 그리고 개별 기업 차원에서 새로운 소유권 관계를 실현하고 노동자 경영 참가 운동을 동시에 펼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일반논문으로 남기업의 “지대 기본소득의 잠재력과 마르크스의 착취론”과 김효진의 “장애여성운동의 의제와 도전”을 실었다. 남기업은 토지는 원칙적으로 모두의 것이고 지대는 사회가 만든 것이므로 지대를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1/n’씩 지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대 환수는 경제효율을 높이기까지 하며 지대 기본소득은 내용상으로 보면 토지사유제의 폐지이므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즉 구조화된 노동착취를 극복할 수 없다는 좌파 일각의 비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본다. 김효진은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장애인으로서의 경험’이라는 구체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하여 한국의 장애여성운동의 의제들을 다루면서 “생산성과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옛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개발하면서 비장애여성, 장애남성들과의 연대를 추구해 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번 호 청년마당 란에는 이종희·이영롱의 글 “24시간 사회의 이면: 야간 파트타임 노동자를 중심으로”를 실었다. 이 글은 “24시간 사회”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 사회가 노동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지탱되는 사회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야간 파트타임 노동자들의 입을 통해서 현재 24시간 사회가 이루어지는 상황과 구조적 강제가 무엇이며 그것이 포획하고 있는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분야 연구에 새로운 촉발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는 좌파의 상상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세 사람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첫째는 홉스봄 추모글이다. 올해, 10월 1일 우리는 위대한 맑스주의 역사가를 잃었다. 남종석은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를 통해서 홉스봄을 읽으며 성장했던 시대를 거슬러 간다. 홉스봄의 대표작들과 일생을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며 평생 동안 맑스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역사가의 삶을 현재 우리의 문제로 돌려놓고 있다. 둘째는 다니엘 게랭(Daniel Guérin)이 쓴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이다. 이 글은 윤수종이 번역했으며 물질[관능]적(matériel)이라고 부른 육체적 사랑의 우위를 선언한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에 대한 주석적 성격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푸리에는 성과 사랑을 보는 기존의 상식이 가지고 있는 이기주의적 관점의 편협성을 파괴하면서 무수한 연대를 형성하는 ‘활발한 유대’의 원천으로서 사랑의 실천을 주장한다. 셋째, 서영표가 쓴 “참여와 자치 위에 세워진 녹색공동체들의 연방”은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서유석 번역)에 대한 서평이다. 여기서 서영표는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의 함의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이론적 문제들까지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목차
□특집: 노동 중심의 생산패러다임 넘어서기 
*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과 현대자본주의체제 분석/박영균
* 신용과 노동: 화폐적 시초축적으로서의 부채체제와 노동의 이중화/ 조정환
* 정립에서 자립으로, 자립에서 다시 연립으로/ 김도현
* 노동을 지배하는 배신의 프레임들/ 조건준
□시평
미국 대선과 한국 대선을 비교하면/ 김수행
□정세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한발 전진을 꾀하며!: 현대차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정원현
□추모의 글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 남종석
□국제
베네수엘라 대선: 차베스 4선의 정치적 의미/ 원영수
□일반논문
* 한국 경제 성격 논쟁과 사회화론에 대하여/ 신희영
* 지대 기본소득의 잠재력과 마르크스의 착취론/ 남기업
* 제왕적 우파 권력은 덧없이 사라지는가?: 프랑스 좌파의 사르코지 비판과 그 한계/ 오창룡
* 장애여성운동의 의제와 도전/ 김효진
□청년마당
24시간 사회의 이면: 야간 파트타임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종희·이영롱
□기획번역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다니엘 게랭(Daniel Guérin)
□서평
참여와 자치 위에 세워진 녹색공동체들의 연방(〈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서영표

*가격 : 15,000원/ 1년구독료 5만7원/ 2년11만/ 3년 16만원
매월 4,700원(계좌이체나 CMS 신청 가능)
*문의: 02) 2277-7950/ jbreview@hanmail.net/ FAX:02) 6008-5138
http://jbreview.jinbo.net

진보평론 사무실이나 서점(알라딘, 교보, 영풍, 풀무질, 그날이오면, 레드북스 등)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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