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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한 알 장일순 선생의 삶과 사상
리영희의 유산: 계몽적 지성의 의의와 경계 긋기
민중사건의 증언: 안병무의 민중신학
탈냉전의 선지자, 문익환 통일사상의 현재성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민족의 미학화를 넘어
 
쟁점
‘진보 재편(결집)’ 논의를 보는 불편한 시선
<국제시장>, 혹은 어떤 가족 영웅의 뭉클한 도착…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
전교조운동의 성찰과 전망: 하성환의 ‘교육노동운…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
 
정세·시평
‘존엄과 안전’을 새로 쓰자: 4·16 인권선언운동에…
첫 발 뗀 민주노총 2015년 총파업: 박근혜 정부의 노…
특별법 이후, 4.16 운동으로 다시 한걸음
민주노조운동의 새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다시 함께 광화문으로 걸어야겠다: 세월호참사와 분…
 
국제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둘러싼 쟁점들
분리된 팔레스타인, 독립의 길목의 장애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과 한반도에 …
2014 유럽의회 선거와 좌파의 대응
미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와 신흥국의 금융시장 불안…
 
발언대
통합진보당 해산 이유와 교훈: 싸워야 할 때 싸워야 …
밀양을 말하다: 옴니버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수서발 KTX 노선 분할 민영화와 정부조달협정 개정은 …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
공단조직화를 위한 모색, 새로운 가능성: 서울디지털…
 
일반논문
가사노동자 노동주체와 노동성격 변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영원한 미생未生’만을 위한 노동 공간: 30-40대 직…
우파적 감성과의 사상사적 대결: 오에 겐자부로의 “…
 
기획연재
계급투쟁에서 경쟁협조주의로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국가와 폭력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3권 서평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
캔커피의 진정한 가격은 얼마인가?: 내재적 가치와 …
완전경쟁’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
순환론과 동어반복: 수요-공급이론은 가격의 결정을 …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소수자이야기
청소년성매매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바다, 다른 사람, 상처는 아문 적이 없었다
거지와 국가
군대와 동성애: 로맨스, 폭력, 범죄화, 그리고 시민권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장애인 탈시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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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주술(화)의 관계: 막스 베버와 발터 벤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의문시하기: ‘포스트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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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고전
성의 정치경제학과 섹슈얼리티의 정치학
'소수자의 리액션’ 혹은 울프식의 ‘뼈 있는 수…
잉여의 시대-타자의 삶
책임 담론이 책임질 수 없는 것
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 부수기: 페미니즘 지식이론
 
서평
프레카리아트의 호명과 그 이후
‘나’의 인권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들’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소수자들의 삶과 문학 )
비판과 운동의 맑스주의 형성사("탈정치의 정치학")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수탈한다(홍석만 송명관의 부…
 
기타
일곡유인호학술상(인권과 인권들) 수상소감 및 심사…
제7회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소감문 및 심사의 변
최진석 비판: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경계와 교차로에…
24시간 사회의 이면: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
 
 
 
  편집자의 글
 
 
민주주의의 공동화, 시민운동의 은밀한 공모?: 사회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성일 : 13-03-19 13:13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539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유독 추운 겨울을 보냈다. 추웠던 겨울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졌던 이유는 독재자의 딸이 청와대로 귀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재자의 자식이 당당히 대통령으로 당선되도록 한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한국 땅에 신자유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진보의 이름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온몸 바쳐 지지했던 소위 좌파 정치인들의 ‘희극적’ 행태는 한국 좌파의 바닥을 보여준 ‘비극적’ 사태였다. 이 비극적 결말을 애도하기에는 그 전개 양상이 너무 희극적이어서 이 겨울이 더욱 추웠는지도 모르겠다.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의 전통은 1980년 광주를 통해 혁명적 좌파 운동의 씨앗을 틔우고 1987년의 민주항쟁 이후 조직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은 1990년대 초반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그 이론적 기초를 상실하고 ‘때 이른’ 쇠퇴와 분화를 경험하게 된다. 운동권들의 ‘고백’이 유행했고 사실 그 이론적 기초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에 대한 ‘고발’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계급정치의 종언이 선언되고 시민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운동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낯선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로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풍운아 노무현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시민운동도 성장했다. 1990년 말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시민운동은 가장 신뢰받는 집단으로 한국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진보정당도 성장했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단박에 제3당으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고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민주화의 모습 이면은 추한 것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광주와 87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이 두 정권이 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벌거벗은 자본의 착취와 폭력을 수용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민주주의라고 강변하면서. 민주주의, 그리고 때로는 진보의 이름으로 한국사회를 금융세계화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시민운동은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도덕적 정당성과 신뢰를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지지와 그에 동반되는 거래로 갉아먹었다. 시민운동에게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민주당과 새누리당(한나라당)의 대결이었다. 또한 시민의 지지를 받는, 시민사회에 뿌리 내리는 독자적인 운동으로 서기보다는 명망 있는 시민운동가의 정치권 진입의 통로 내지는 민주당에게 정책을 ‘구걸’하는 수동적 정책 파트너로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치세력에게 스스로를 걸어버림으로써 시민운동이 가져야 할 독자성과 비판성마저 잃게 된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할지라도 이것이 시민운동이 제기했던 다양한 사회적 문제와 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운동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많은 시민운동가들은 여전히 비판적 정신을 구현하려 하고 있고 잘 알려진 큰 단체는 아니지만 풀뿌리에서 진보적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호 특집은 이러한 시도들에 눈을 돌리고 있다. 특집의 제목은 ‘한국사회 시민운동 평가와 새로운 사회운동’이다. 제목에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을 따로 적은 이유는 지금까지의 시민운동이 사회운동적 성격보다는 엘리트적인 싱크탱크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자유주의 정당의 지지부대 역할로 전락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 반영되어 있다. 현재의 시민운동에 대해서는 반성적으로 사고하지만 계급운동과 나란히 발전해야 하는 사회운동의 새로운 구성이 절실히 필요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물론 특집에 실린 글들 모두가 이러한 기획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린 글 모두가 편집진의 의도에 부합할 필요도 없다. 다만 특집을 통해 마련된 토론의 장에 편집진의 의도가 자리매김 됨으로써 독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린 글들을 소개하기 전에 한국 좌파의 지적 풍토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 좌파의 지적 풍토는 외국 이론에 대한 압축적 수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외국 이론은 오랜 동안의 논의를 통해, 그리고 실천을 거쳐서 소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으로서의 이론이 수입되고 짧은 시간 논의되다가 용도 폐기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이론이 발생하는 역사적 맥락, 이론의 내용과 실천은 유실된다. 30년이란 시기적 단절이후 복원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용이 그러했다. 이미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로 타락한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북한사회주의 체제의 건설과 방어, 그리고 그것의 좌절과 타락이라는 역사에 대한 표면적 이해와 감성적 수용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적 운동을 좌절시키는 소위 ‘민주정부’의 옹호로 귀결되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에 대항하는 소위 피디적 입장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혼동하기도 했다. 이론 수용의 ‘경박함’에 있어 대동소이했던 것이다. 19세기 말 수정주의 논쟁으로 표면화되었고 1960년대 전면화되었던 마르크스주의 위기에 대한 무지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수많은 운동가들의 좌절, 변절, 전향, 그리고 이에 대한 반경향으로서의 정통적 입장에 대한 무비판적 고수가 그 대가였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사회운동과 다양한 조류의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전개된 동구사회주의 체제와 서구 사민주의 노선에 대한 동시비판이라는 기나긴 논쟁은 잘려나간 채 라클라우와 무페라는 낯선 이름과 읽기 힘든 번역본으로 다가 왔을 뿐이다. 설익은 수용은 이에 대한 소위 정통마르크스주의자들의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더욱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용과 맥락은 마르크스주의 폐기와 이에 동반되는 사상적 ‘전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동했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에 대한 논쟁은 어땠을까? 우리에게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고민하게 했던 그람시에게 시민사회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지만 혁명이 일어나기는커녕 파시즘이 출현했던 1930년대 유럽의 상황에서 도출된 것이었다. 파시즘 하에서의 혁명의 경로를 고민하려 했던 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람시의 시민사회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사민주의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세대와 모순과 갈등에 의해 과잉 결정된 역사적 구성물로서의 신사회운동과 공산주의로의 새로운 경로에 대한 유로코뮤니즘의 고민이 출현하면서부터이다. 한국의 좌파는 촘촘하게 써진 이러한 운동과 이론적 논쟁의 역사를 이미 만들어진 체계로 수입하고 그것만으로 논쟁하거나 그것을 운동의 현장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는 핑계거리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신사회운동이 제기했던 문제들, 그리고 이념적으로 한국의 시민운동이 천명했던 다양한 투쟁과 모순을, 현실을 넘어서는 비판과 상상력으로 접합시키지 못한 채 기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수정’하는 수준으로의 ‘후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한 것은 아닐까?
특집의 첫 번째 글인 정병기의 「한국 시민운동의 흐름과 ‘시민성’」은 앞에서 언급된 시민운동의 ‘시민성’의 부족을 지적하고 있다. 정병기는 시민운동이 상정하고 있는 ‘시민’은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일 뿐임을 비판하고 시민운동의 운동적 성격은 이러한 협소한 틀을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시민운동이 다양한 부문적 쟁점을 둘러싼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본주의적 모순과 계급정치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병기의 글은 간략하지만 매우 유용한 한국 시민운동의 연대기를 제공한다.
정경섭의 「노동조합, 진보정당, 그리고 풀뿌리 운동의 결합-민중의 집」은 진보적 정당의 활동영역 확장으로 접근하고 있는 글로서 저자 스스로가 진보정당 활동가로서 유럽의 민중의 집 운동의 경험에 기초해서 시민운동적 의제와 진보정당운동의 결합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의 집이 시민운동적 성격을 가지지만 그 주체가 노동자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제기하는 지역적 의제와 노동자운동이 결합하고 그것이 진보정당의 토대가 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마포에서 시작된 한국의 민중의 집 운동은 이런 방향에서 풀뿌리 운동을 개척하는 노력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권오범은 「한국 생협운동과 공동체운동의 평가와 전망」에서 근래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생활협동조합운동(생협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다룬다. 생협운동과 공동체 운동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향한 점진적인 이행의 교두보로 인식되기도 한다. ‘필수적 사용가치와 토지, 생산수단을 탈상품화해 나가자는 공유지 탈환, 해방구 전략처럼 비자본주의적 영역을 하나씩 늘려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생협과 공동체운동에 대해 일면적으로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좌파가 아래로부터의 이러한 운동과 연대, 협동, 공진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경섭이 실천하고 있는 민중의 집 운동은 풀뿌리에 근거한 생활정치를 좌파정당의 사회적 토대로 확장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현실운동 방향에서 부분적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연대와 공진화’가 아닐까?
박래군의 「인권운동의 현 상황 진단과 방향 제언」은 인권운동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다룬다. 인권운동은 민주화와 사회진보에 기여한바 컸지만 현재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IMF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의 결과는 노동권과 사회권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했다. 하지만 형식적 민주화의 진전에 따른 착시현상으로 오히려 인권담론이 가지는 진보적 성격이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래군은 인권운동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진보적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창언의 「한국 로컬 거버넌스(지방의제21)의 현황과 민주적 재구축」은 리우환경회의 이후 구체화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지역 거버넌스 모델인 지방의제21이 열어놓은 정치적 기회구조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거버넌스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참여모델인지 아니면 참여를 내세운 새로운 통제전략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유엔, 정부, 지방정부에 의해 열려진 개입의 공간으로서의 지방의제21에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창언은 지방의제21이 민·관의 협력관계에 기초해서 주민 주도의 비전과 계획수립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그 과정에서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적, 제도적 조건의 미비와 외부적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등의 한계 또한 지적하고 있다.
특집란에 실려 있는 글이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모든 쟁점을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정병기의 논문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진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등 부문운동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편집진이 의도한 한국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한 토론의 장의 마련으로서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발언대에 실린 강은숙의 「난민, 고통과 희망의 경계에 선 사람들」은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 준다.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의 권리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논의가 있었지만 난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강은숙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난민을 향한 한국사회의 차별적 시선이 부끄럽다. 사회운동의 또 다른 쟁점이 국제연대라면 한국의 사회운동이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이기까지 한다.
정세란에는 세 편이 글이 실렸다. 조희연의 「대선 이후의 진보정치의 혁신 과제」는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포스트―87년형 민주주의로의 수동혁명적 이행’으로 본다. 그리고 2012년 대선결과는 ‘심각하게 나쁜 48%’이며 진보정당의 비극 속에 ‘한국정치발전의 선순환구조’가 해체되고 미국의 2당체제도 아닌 일본의 보수패권체제보다 더 퇴행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분석을 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진보적 성찰’, ‘좌파적 성찰’이 필요함을 전제로 진보정치의 과제를 제기한다.
홍성준의 「론스타게이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2012년 외환은행을 매각하여 4조원의 이익을 챙긴 론스타펀드가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활용하여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에 소송을 의뢰한 사건의 전후 내막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홍성준은 2003년 외환은행이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매각된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본다. 법률사무소, 회계법인, 외환은행 경영진, 론스타 등의 정관계 불법로비, 회계조작, 사전공모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근본적인 대응이 없는 한국사회의 구조에 분노를 자아낸다.
김태연의 「2013년 노동자 투쟁의 현황과 과제」는 박근혜 정부 하의 노동자 투쟁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쌍용차 정리해고, 현대차 사내하청, 유성기업 노조파괴 등의 장기투쟁 사업장에 주목하고 노동자운동의 조직된 역량이 현장투쟁의 승리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일반논문은 3편이 실렸다. 박영자의 「북핵과 김정은 체제 권력구조」는 북한 핵실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김정은 체제의 권력구조를 해부하고 있다. 수령과 소수 지배연합이란 북한의 권력구조는 생각보다 안정적 체제이며 북핵문제 또한 중단기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 구조적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북핵을 실질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북한 내부의 민주화가 필요하며 민주화를 위한 주체 형성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원혁의 「보호와 복종의 완성으로서 사회계약」은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공화주의적 해석이 가지는 문제점을 분석한다. 스트라우스의 홉스 해석은 홉스가 고귀한 자연권을 전제하고 이를 관장할 강력한 주권을 구상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자연권은 주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환상구조’로서의 ‘고귀한 거짓말’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홉스철학과 미국 보수주의의 철학적 근원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이다.
김원태의 「가사노동(논쟁) 비판」은 한동안 좌파 학계에서 논쟁거리였지만 지금은 크게 주목받고 있지 못한 가사노동 논쟁을 되돌아보고 있다. 단순히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가사노동 논쟁의 기여와 한계를 짚어 내고 ‘노동’과 ‘활동’의 구분을 통해 자본주의에서의 가사노동의 지위를 분석함으로써 ‘가사노동의 은폐와 차별을 폭로하고 취업노동-임금노동 중심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 있다. 이러한 이론적 재해석을 통해 ’화폐획득을 목표로 하는 노동의 증대 및 자본주의의 노동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로부터 이끌어낸 정치적 함의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읽기란에 실린 이종영의 「"전태일 평전”에 대하여」는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에, 20대를 보낸 세대들이 읽고 감동받았던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의 기록을 철학적으로 재음미하고 있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전태일 열사의 노동자로서의 경험은 지식인들이 아주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얻게 되는 계급적 통찰이라는 점에 대한 감동을 전한다. 철학하기 또는 이론적 통찰은 추상적인 말싸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천착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닐까?
서평의 첫 번째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다. 이성민은 「세계사가 보여주는 몇 가지 답들」에서 고진의 교환양식에 근거한 세계사 구조 분석이 칸트적인 세계공화국 전망과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결합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교환양식에서 핵심은 증여로서 마르셀 모스의 작업도 참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많이 섞여 있지만 그가 주장하는 어소시에션들의 어소시에이션은 논의해 볼만한 주제다.
권범철이 「노동을 넘어 행위로」에서 소개하고 있는 존 홀로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도 흥미롭다. 홀로웨이는 마르크스의 구체노동과 추상노동 사이의 적대에 주목함으로써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체적 노동이 주는 함의는 ‘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투쟁’, ‘따라서 자본에 대항하는’ 행위의 투쟁인 것이다. 홀로웨이의 주장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그것은 ‘거부’일 것이다. 권혁범은 ‘거부’하는 행위의 호소력이 강하지만 ‘거부’에서 ‘창조’로 나가지 못하는 힘의 부족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정정훈의 「공통적인 것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는 연구공간L이 엮은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을 다룬다. 책은 네그리와 하트가 주도하는 자율주의에서 대중지성과 인지자본주의를 기초로 하여 제기하는 ‘공통적인 것’을 향한 투쟁을 소개한다. 자율주의가 현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다중의 협동에 의해 구축되는 공통적인 것을 수탈하는 기생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본이 더 이상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율주의의 이러한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혁명운동이 전진하기보다는 퇴조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반문한다. 자율주의자들이 답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게재된 글 한편 한편에서 필자의 지난했던 운동과 성실한 연구와 성찰적 인식을 느낄 수 있다. 운동의 전환기에서 선 독자들의 고민에 의미 있는 방향제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독자들의 비판과 격려, 질책을 바란다. 


2013년 3월 2일
편집위원 서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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