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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유산: 계몽적 지성의 의의와 경계 긋기
민중사건의 증언: 안병무의 민중신학
탈냉전의 선지자, 문익환 통일사상의 현재성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민족의 미학화를 넘어
 
쟁점
‘진보 재편(결집)’ 논의를 보는 불편한 시선
<국제시장>, 혹은 어떤 가족 영웅의 뭉클한 도착…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
전교조운동의 성찰과 전망: 하성환의 ‘교육노동운…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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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 이후, 4.16 운동으로 다시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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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둘러싼 쟁점들
분리된 팔레스타인, 독립의 길목의 장애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과 한반도에 …
2014 유럽의회 선거와 좌파의 대응
미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와 신흥국의 금융시장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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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해산 이유와 교훈: 싸워야 할 때 싸워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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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
공단조직화를 위한 모색, 새로운 가능성: 서울디지털…
 
일반논문
가사노동자 노동주체와 노동성격 변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영원한 미생未生’만을 위한 노동 공간: 30-40대 직…
우파적 감성과의 사상사적 대결: 오에 겐자부로의 “…
 
기획연재
계급투쟁에서 경쟁협조주의로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국가와 폭력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3권 서평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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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경쟁’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
순환론과 동어반복: 수요-공급이론은 가격의 결정을 …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소수자이야기
청소년성매매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바다, 다른 사람, 상처는 아문 적이 없었다
거지와 국가
군대와 동성애: 로맨스, 폭력, 범죄화, 그리고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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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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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정치경제학과 섹슈얼리티의 정치학
'소수자의 리액션’ 혹은 울프식의 ‘뼈 있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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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 부수기: 페미니즘 지식이론
 
서평
프레카리아트의 호명과 그 이후
‘나’의 인권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들’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소수자들의 삶과 문학 )
비판과 운동의 맑스주의 형성사("탈정치의 정치학")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수탈한다(홍석만 송명관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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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곡유인호학술상(인권과 인권들) 수상소감 및 심사…
제7회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소감문 및 심사의 변
최진석 비판: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경계와 교차로에…
24시간 사회의 이면: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
 
 
 
  편집자의 글
 
 
무너지는 세계, 방향의 상실과 성찰의 모색
작성일 : 13-06-14 11:19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766  

참 피곤한 세상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한 이야기까지 신경 써야 하니 말이다. 연방준비은행 총재인 버냉키라는 사람의 ‘양적완화’에 대한 몇 마디가 세계 곳곳의 증시에 영향을 미치고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서 대출과 카드빚에 기대어 살고 있는 나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
혼자 앉아서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다. 아예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잊은 듯하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서는 연신 카카오톡과 문자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울린다. 빠른 손놀림으로 답을 해야 한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제목처럼 ‘잊힐 권리’를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의 시간이 없다. 사색의 시간이 없다. 따라서 반성과 성찰의 시간도 없다. 그냥 순간순간을 밀리고 밀치면서 사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자본과 권력이 짜 놓은 격자 안에서 맴을 도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몸에 부과된 규율과 내면화된 규범이 공부하고, 일하고, 소비하게 하니 말이다. 자본과 권력에 순응하는 육체가 되어 버린 듯하다. 하지만 자본은 한순간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문제는 ‘팔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하는 기계가 되기 위해 자본이 쳐 놓은 거미줄 안에서 스스로 욕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우리의 판단과 선택을 요청하는 욕망-상품의 연쇄가 우리의 삶을 휘감아 온다. 우리 몸의 체험과 감각은 이런 욕망의 사슬을 피곤해 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몸의 체험과 감각이 가지는 부피는 ‘경제적 인간’의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평면 위에 절단되고 파편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안으로 유폐된 몸의 감각은 우리를 조울증과 분열증에 시달리게 한다. 지금-여기로부터 오는 무력감과 피곤함,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하다는 자각에서 오는 좌절!! 어쨌든 피곤하고 지친다.
항상 누군가에 노출되게끔 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스마트한’ 정보통신망은 넘쳐나는 정보로 채워진다. 말들의 홍수다. 비난, 비방, 거짓, 욕설, 신념과 열망이 사실(fact)과 뒤엉켜 실재와 가상이 헷갈리게 된다. 그래서 ‘스마트한’ 세상은 정보를 소비할 뿐 비판하거나 창조하는 데는 미숙한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사람들을 양산한다. 이런 세상에서 차라리 실재나 원본을 찾으려는 것은 한심하고 헛된 지난 시대의 꿈이라는 포스트모던한 경구를 믿고 싶어진다.
원본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원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복사본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의 근거로 팩트를 말한다. 역설적인가? 그래서 우리는 가상의 세계를 쉬지 않고 떠돌아야 하기 때문에 피곤해지지만 동시에 말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며 판단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된 원본을 찾아 헤매면서 지쳐간다.
실재가 있긴 하다. 자본과 상품-화폐의 논리가 만들어 낸 추상적 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절단되어 교환 가능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기억과 체험, 우리가 타자들과 맺는 관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 평면화되고 교환가능해진 시간과 공간의 추상성을 견디지 못하는 삶이 실재다. 그래서 착취당하는 몸, 분열증과 조울증을 시달리는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실재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그 실재와 대면하지 못한다. 우리의 의식은 실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말들의 유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불만으로부터 몸을 가두고 절단하는 지배와 착취의 구조적 원인으로 찾아들어가기보다는 그냥 배설하는 말들의 장난에 만족한다. 서로를 종북, 좌빨, 수구꼴통, 파시스트로 몰아 부치고 역설과 비방을 내뱉는다.
소위 보수지배세력은 이런 상황은 은근히 즐기면서 방조한다. 점잔을 빼면서 정도를 넘어서지 말라고 넌지시 타이르면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지배의 논리가 쳐 놓은 격자 안에서 ‘적’을 찾아내고 말의 공격을 퍼붓는다. 자신들의 생각만이 진리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보수와 시대착오적인 좌파 모두를 단죄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적 사이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체제의 한계를 말하고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좌파들은 언제나 비슷한 레퍼토리를 들이대며 추상과 이상의 세계를 설교한다. 그들 역시 유폐된 몸의 감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일상의 불만과 저항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몸의 저항과 체계에 대한 비판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말의 다툼은 가시적이다.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은 재미가 없다. 애초부터 대화와 소통을 할 의지조차 없다. 극단만이 부각된다. 이미 찬반만이 있다. 그래서 말의 ‘난투극’으로 재현되는 실재는 드라마보다 재밌다.
정말 ‘스마트한’ 사이버공간에서는 스스로를 들어내지 않고도(들어내는 용기가 없어도!) 먹잇감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다. ‘실제로 때리고 찌르는 것도 아닌데 뭐!’ 가상공간 속 게임에서 폭력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다. 타자의 고통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이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이번호 특집인 “한국사회의 적대성과 파시즘의 정치학”에 실린 세 편의 글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베’ 현상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한윤형의 “한국 좌우파 투쟁의 흐름 속에서 ‘일베’를 바라본다면 ‘일베’는 기존의 좌우파와 어떻게 닮았고, 또 다른가”는 일베를 낳은 한국의 정치담론을 짚어본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일베를 저급한 쓰레기 문화로 공격하지만 사실 그들도 일베를 낳은 ‘부모’일 수도 있는 것이다. “486세대는 1987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소수 대학생 운동권에 불과했던 자신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지지라고 믿는 착각을 저질렀다. 대중은 올드라이트의 정서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486운동권의 정서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은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은 피해자이며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은 독선을 낳았고 결국 ‘노빠’로 상징되는 맹목적 투사 집단을 만들어 낸다. 일베는 이들의 독선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대 간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젊은 세대의 진보성에 기대었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젊은 세대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박영균이 일베를 ‘나꼼수’의 “정치의 오락화”가 불러온 “사후복수”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빠’와 ‘일베’는 “반지성주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일베현상을 단순한 기존 세대에 대한 반발, 비꼼, 풍자로 보기에 그들의 담론은 패륜적이고 천박하다. 윤보라의 “일베와 여성 혐오: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특히나 여성혐오는 혐오스럽다. 윤보라의 표현처럼 “여성에 대한 총체적 거부”가 매우 공격적으로 드러난다. 우승열패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패배감을 보상받을 수 있는 먹잇감으로서의 약자로 여성을 선택한 것이다. “성적욕망과 소비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면서도 결혼이나 출산은 유예하는, 이 대담한 여성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베의 담론이 몹시도 불편한 것은 그 표현의 과도함뿐만 아니라 ‘된장녀’나 ‘김치년’으로 표현되는 소비주의 시대 여성의 천박함을 공격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남성우월주의적 성문화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웃음과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저씨들의 천박함은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이것은 일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베 같은 괴물을 탄생시킬 충분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베를 단죄하기보다는 일베를 낳은 우리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박영균의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정치학을 넘어 진보의 정치로”는 일베를 탄생시킨 우리 사회의 근저를 분석한다. 승자독식의 사회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승리를 ‘상상할’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는 조건, 교과서에서 배우는 정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자가 되기를 부추기는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오는 좌절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젊은 세대는 일할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그 가치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자들, 소위 ‘몫이 없는 자’, ‘빈곤한 자들’이 되어”가고 있다. 박영균은 “잉여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필자는 이러한 좌절이 일베 또는 더 나아가 파쇼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원인에 대한 무지”라고 지적한다.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는 명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공격은 무차별적”이다. 하지만 세 명의 필자 모두 일베현상을 일베 구성원 개개인들의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일베와 파쇼적인 것 모두 “자신들의 미약한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끊임없이 강요되는 위기 속에서 경험하는 분노와 증오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박영균은 이러한 분노와 증오를 파쇼적인 것이 아닌 진보정치의 “물리적 비판”에 근거하여 “희망의 정치”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발언대에는 신희영이 학술연구를 제도라는 틀에 가두려는 한국연구재단에 대해 “한국연구재단 공모 사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한 제언: 일반 공동 연구 지원 사업의 자격 요건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써주셨다. 연구자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을 듯하다.
정세란에서 정원각의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현재”는 협동조합의 이념과 역사, 외국 사례와 한국의 역사, 그리고 협동조합의 종류 및 운영의 문제들까지 매우 폭넓게 다루고 있다. 협동조합법이 개정되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협동조합운동이 각광받고 있다. 이 글은 현 정세에서의 협동조합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협동조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충실하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협동조합 문제를 접근할 때 필요한 자세인지도 모른다. 한편에서는 협동조합을 만능처럼, 다른 한편에서는 협동조합의 한계만을 지적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란에서는 최근 이집트의 정세를 다루고 있다. 뉴스에서 보듯이 최근 이집트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럽다. 이집트는 우리에게 매우 먼 곳이자 낯선 곳이다. 따라서 이슬람세력권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대부분 단순화되는 것이 다반사이다. 특히, 서방 언론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정보들은 이런 단순화를 부추긴다. 그러나 현재의 이집트 정세는 민주화 이후 들어선 무시르-이슬람형제단 정권과 이를 무너뜨린 군부의 쿠데타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이집트의 세력관계와 내부사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최재훈은 “쿠데타냐 또 다른 혁명이냐, 이집트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방정식 풀이”의 “유일한 변수는 이집트 시민들”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논문에는 세 편이 실렸다. 최시현의 “한국 중산층의 세대 간 경제적 자원 이전과 가족주의의 강화”는 “캥거루족”이라 불리는 우리 시대 2-30대 젊은이들로 상징되는 가족 내 세대 간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관심은 이러한 현상이 중산층 가족의 계급재생산과 어떻게 연관되는가에 있다. 이들의 부모 세대는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자수성가’의 모델로 자식들로부터 존경받는다. 하지만 자식세대는 신자유주의 시대 직업전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부모에게 주눅 들고 의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자원의 세대 간 이전은 부모세대의 자연화된 ‘사랑’과 ‘헌신’의 언어로, 또 신자유주의의 불안담론을 내면화한 자녀세대의 ‘투자’와 ‘보상’의 언어로 각기 다른 담론 형식”을 갖지만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상위중산층 가족의 개별화된 가족전략[편법증여와 같은]으로 봉합된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세대 간 재분배와 계급 간 재분배가 이루어지 않는 상태에서 중산층에서 강화되고 있는 가족주의는 위험해 보인다.
송경숙의 “1960-1980년대 일본 노동운동 내부의 헤게모니 변동”은 "진보평론" 독자들에게는 조금 낯선 일본 노동운동을 다루고 있다. 형식적으로 “기업 또는 사업장 수준에서 노동의 경영참가 및 노사협의체제가 강화되고, 정부의 노동정책심의회에 노사참가가 제도화되는 등 코포라티즘적인 3자협의기제가 관찰되고 있지만”, “전체 노동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는 조직구조적 기반 위에서 계급타협을 하고 그로부터 얻게 된 이익을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분배하려는 노동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 협조한 대가로 성과를 분배받기로 한 기업의 테두리 안에 갇힌 노동이었기 때문에” 네오코포라티즘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조운동의 혁신이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들여다보아야 할 주제이다.
이창언의 “남북한 핵무장론에 대한 비판과 비전평화운동의 과제”에서는 핵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 그리고 한반도 주변의 국제 관계를 정리하고 핵무장을 정당화하는 좌우파 담론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필자에 의하면 ‘주변부민족해방론’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남한의 보수주의자들은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핵무장은 손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핵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제, 핵은 단순히 무기의 차원이 아니라 에너지의 문제, 그리고 핵발전에 동반되는 위험의 문제로,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고 있다. 비전평화운동과 탈핵운동의 접목을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이번 진보평론에는 전체 10회 분량으로 대중적인 글쓰기와 현대사회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를 위해서 ‘정치경제학비판’란을 신설하였다. 이번에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라는 제목 하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기적으로 계산하는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관과 시장이 자원을 최적으로 분배한다는 맹목적 믿음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준다. 이글을 통해서 많은 독자들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에 만연해 있는 ‘경제학의 제국주의’에 대해서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이야기에 실린 루인의 “규범적 슬픔, 젠더의 재생산: 장례식, 트랜스젠더, 그리고 감정의 정치”는 개인사를 통해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파쇼적인 것’의 토양을 드러내 준다. 윤보라가 지적했듯이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가진 ‘자연스러움’과 ‘정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어디에나 있는’ 일베의 뿌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자연스러움’과 ‘정상적인 것’의 내면화가 불러온 언어적 폭력으로 누군가에게는 일베충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시 읽기에 실린 최원의 “스피노자, 야생적 별종인가 반-오웰인가?: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해석을 중심으로”도 특집과 관련시켜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스피노자, 그리고 네그리와 발리바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읽기에는 조금 난해하다. 그래도 핵심은 읽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최원이 발리바르 독해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피노자가 다중(대중)의 역량이 민주정치에서 가지는 힘과 더불어 그 위험성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이성 또는 준칙에 의해서 완전히 설명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념과 동떨어져 이성과 준칙만을 외워대는 좌파의 무능을 보고 있지 않은가? 다중의 역량은 민주주의의 토대이지만 보통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느끼는 분노와 저항과 접속하는 카운터헤게모니전략의 부재가 오히려 파쇼적인 것의 토대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지난 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남성이 읽은 페미니즘 고전’란에 “책임담론이 책임질 수 없는 것들”(아리리스 M. 영이 쓴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이 실렸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듯이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감춘 채 ‘의사-페미니즘’을 자처하는 경우도 많다. 이순웅은 과거 자신의 경험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불편한 기억’들로 시작하여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 이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쩌면 우리가 진정한 ‘소통’을 위해 나누어야 할 자세인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서평으로 조규준이 강수돌의 "팔꿈치 사회"에 대해 “중심을 향한 경쟁보다 변방에서 새로운 중심을 같이 만들자!”라는 제목으로 써주셨다.
이번 "진보평론"은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현실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면서 사실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한 발자국 물러서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독자들이 편집진과 필자들에게 격려와 비판을 보내주기를, 그래서 좋은 토론의 장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2013년 9월 1일
편집위원 서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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