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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글
 
 
진보운동의 낡은 패러다임과 운동양식들, 혁신을 위한 정치적 소통을 시작하자
작성일 : 13-12-12 15:43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542  

진보운동의 낡은 패러다임과 운동양식들, 혁신을 위한 정치적 소통을 시작하자


현재 한국사회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최근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반격에서 시작된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은 곧이어 국회에서의 ‘이석기의원 체포동의안’ 처리로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한 때 10%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통합진보당을 강제로 해산하는 ‘정당해산청구심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은 고사하고 보수양당체제의 한 축인 민주당조차 ‘종북프레임’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이것은 과거 80년대의 ‘민주 대 독재’라는 프레임이 오늘날 ‘종북 대 대한민국’이라는 보수독점적 프레임으로 전이됨으로써 한국사회 전체가 ‘대한민국=반북’이라는 분단국가주의적 프레임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사태에 분노하며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어디 우리뿐인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민중과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심지어 더 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분노’와 ‘저주’의 말들은 힘없는 자들의 푸념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그처럼 분노하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세력도, 거점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한국사회에 ‘반북-반공 콤플렉스’가 사람들에게 먹혀들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개탄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핵심도 아니며 더더구나 출발점도 아니다. 이명박정권 5년이 그러했듯 박근혜정권의 탄생 자체가 이미 이와 같은 사태들을 예고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 ‘종북프레임’은 1990년대 후반까지 작동되었던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남긴 트라우마를 환기시키면서 호전적인 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대한 적개심으로 내부를 통합해왔던 ‘반북프레임’과는 다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전쟁의 공포’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 있었을 때에도, 2013년 북이 ‘휴전협정을 파기하고 전쟁상태를 선언’했을 때조차도 사람들은 과거처럼 사재기를 하면서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진보운동은 ‘종북 대 대한민국’이라는 분단국가주의 프레임 하에서 진행되는 ‘반동적 파쇼화’에 대항할 수 있는 거점과 세력들을 잃어버린 것일까? 혹시 그것은 한국의 진보운동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을 하는 것처럼 오늘날 한국의 진보운동 또한 그런 것은 아닐까? 실제로 진보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을 개탄하고 박근혜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말도 되지 않는 ‘종북프레임’으로 진보운동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진보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애초 지배권력의 탄압을 모르고 시작한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지배권력에 대항하여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지배자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권력의 관계에서 그것은 언제나 비합리적이다. 그것은 진리나 진실을 따지지 않는다. 오직 힘만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입증할 수 있다. 따라서 80년대의 운동이 그러했듯이 한국의 진보운동은 모든 억압적 권력에 대항하여 민중의 힘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권력의지를 조직함으로써 ‘대항권력’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진보운동은 ‘반동적 파쇼화’로 나아가는 국가권력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조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세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남의 탓’으로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탓’을 중심에 놓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냉혹하게 따져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한국의 진보운동이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있으며 추락하고 있다는 징후가 드러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김대중-노무현정권을 거치면서 자신의 비전을 갖지 못했고 정권과의 야합 속에서 그 스스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거론하기를 꺼려했으며 심지어 김대중-노무현정권의 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영합하기도 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그들의 의도와 달리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첨병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외의 세력들이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소위 근본적인 변혁을 주창하는 세력들의 정치적 무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이념적 선명성은 언제나 ‘이상’과 ‘이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진보평론은 이런 정치적 무능력을 진단하고 한국의 진보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획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난관에 봉착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필자를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석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지만 막상 그것을 공론화하는 글쓰기를 요청했을 때에는 손사래를 쳤다. 왜였을까? 그것은 바로 지금의 급진적 운동들이 자기 성찰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조직 내적 문제들이나 운동의 경향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글이 되었을 때,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집중포화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진보평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보평론에 대해 쏟아지는 무수한 질책들 중에는 ‘선의의 충고’와 ‘비판’도 있지만 단지 그들의 문제를 들추었다는 것만으로 ‘비난’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한국의 진보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좌파운동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좌파운동이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온전하게 ‘시민권’을 누리고 있지 못한 국외자들의 운동이며 국가의 억압에 대항해 싸우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국가폭력에 노출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이 그러하듯이 평가 또한 주체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엄혹한 현실 속에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꿈꾸면서 그것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자들이 벌이는 것이 운동이며 그렇기에 환경을 탓하기보다 주체적으로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운동이나 조직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한답시고 ‘환경 탓’만 하는 것은 운동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악적이기까지 하다. 평가는 그들이 지고 있는 그런 역사적 무게조차도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노고나 어려움에도 그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운동 그 자체의 공과를 냉정하게 따져가는 작업이다.
몇 년 전, 내가 속한 운동조직에서 이런 비판이 오히려 조직 내부의 집단 간의 ‘데마고기’로 작동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들과 나는 같은 조직 안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동지였다. 그러나 내가 우리 조직의 운동과 주체의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그들은 화를 내며 이렇게 비난하곤 했다. ‘너는 어떻게 자신이 속한 조직을 대상화하는가? 너는 너와 같이 싸우고 있는 동지조차 대상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맞다. 나는 나의 조직과 동지들을 대상화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만 대상화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대상화한 것이다. 도대체 자기 자신, 자기 조직, 자기 운동을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엄혹한 현실을 바꾸는 주체적 삶과 운동적 실천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일기를 쓰거나 나의 잘못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때, 나는 나를 대상화해야 한다. 자기애적 인간(나르시시스트)은 결코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애에 빠져 ‘남 탓’만을 하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라 자기 안의 현실, 즉 ‘관념’ 속에서 세상을 보며 그렇기에 주체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방향을 찾는 것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유물론자가 아니며 ‘변혁운동가’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사람들은 현재 나와 모든 정서, 가치, 감정 등을 있는 그대로 공유하고 있는 복제인간을 꿈꾸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와 어떤 것도 나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답답해 미칠 것이다. 왜냐면 내가 아플 때 그도 아프고 내가 비통함에 젖어 있을 때 그도 동일하게 비통함에 젖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치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적 동일화의 욕망 속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 하는 짓거리처럼 소위 급진적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작동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들의 동질적 집단성을 부추기고 그것으로 권력을 만들고 특정한 사람들을 매장하는 정치적 술수와 책략을 작동시킨다. 같은 조직 내에서 비판을 수행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기 조직과 다른 조직들을 비교평가하면서 어떤 문제들을 들추어내면 당장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봐라. 저 자가 우리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다.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그는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뉴라이트처럼 이렇게 외친다. ‘그는 우리의 적이다’.
‘대상화(Vergegenständlichung)’란 말 그대로, 특정한 대상을 자기와 분리시켜 하나의 독립된 실체처럼 자기 앞에 세워 놓는 것이다. 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되고 객관화된 노동으로, 노동의 대상화이자 노동의 실현이다. 반면 ‘소외(Entfremdung)’는 그렇게 대상화된 것이 오히려 자신을 배제하고 억압하면서 지배할 때 발생한다. 노동의 소외는 죽은 노동의 집적인 자본이 임노동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통해서 노동을 지배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소외’는 지배의 권력을 생산하고 사람들을 ‘억압’으로 이끌지만 ‘대상화’는 자기 스스로를 혁신하면서 끊임없는 ‘생성’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진보운동, 특히 급진적 진보운동을 죽이고 있는 가장 큰 주범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생성’의 힘을 조직적으로 차단하고 자기애적 조직문화(패밀리주의) 속에서 자기가 속한 그룹과 집단들을 조직하고, 더 나아가 지배권력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데올로기 안에서 ‘힘=권력’을 만들어가는 운동풍토에 있다. ‘원한감정’에 기초한 ‘부정적 정의’의 방식과 ‘반정립의 정치’는 이 속에서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최근 사태가 통합진보당 내의 특정 정파의 문제라고 단정하면서 ‘한국의 진보가 NL에 의해 과잉 대표되고 있으며 이를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과잉 대표되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가 무능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모든 정치-사회운동세력은 자신의 가치와 노선을 보편화하려 노력한다. 그런데도 NL이 과잉 대표되었다면 그것은 그 외의 세력들이 NL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무능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운동, 특히 급진적 진보운동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NL 대 PD’라는 한국의 오래된 정파적 대립의 틀 속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무능력과 실패라는 관점에서 자기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진보평론의 특집은 이런 관점에서 기획되었다. 특히, 이번 기획은 자기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시민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NL/PD라는 두 당파들의 운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거나, 또는 관여했거나 애정을 가지고 지켜본 사람들을 필자로 선정하여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번 호의 특집은 총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이광일의 글, “자유주의 정치의 ‘역사적 헤게모니’, 그 긴 그늘과 좌파”는 이번 호 특집의 시대적 상황과 총론적인 맥락, 우리가 출발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늘날 한국의 진보운동, 특히 진보좌파에게 핵심적인 과제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의 대중적 헤게모니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빨갱이라는 딱지붙이기’를 통해서 진보좌파를 배제하는 보수독점프레임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면서 자유주의정치세력의 대중적 헤게모니가 브레튼우즈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유주의정치세력의 대중적 헤게모니는 강고하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한국의 진보좌파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은 “좌파헤게모니 구성의 조건과 방법을 냉정하게 살피는 것을 넘어서는 실천의 결단”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승원은 “자살, 한국 정치와 사회의 최대 위기: 진보세력은 위기의 대안일 수 있을까?”라는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서 오늘날 진보에게 요청되는 정치는 자신의 생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치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기에 진보의 정치는 보수 정치가 수행하는 ‘치안이나 억압적 통제’와 달리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정치”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진보운동은 보수의 정치와 별로 다르지 않는, ‘숙청과 배제의 보수 프레임’에 빠져 있다. 따라서 그는 진보세력이 “치안을 넘어선 정치의 헤게모니를 위해”,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친구로 만들고, 우리 또한 그 친구로 변할 수 있는”, “다양하고 대립하는 정체성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구성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의 두 글이 총론적인 문제제기를 중심으로 한국의 진보운동을 다루고 있다면 서영표의 “인식되지 않은 조건,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 노골적인 계급사회의 탈계급 정치”와 심인호의 “노동‘해방’없는 노동‘조합’운동: 대공장 노동운동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 그리고 이승환의 “새로운 ‘평화지향적 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늦봄 문익환 20주기를 맞으며”는 각각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 글들은 각각의 운동 내부에서 그 운동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앞의 글이 총론적성격의 글이라면 이 글들은 한국진보운동에서 영역별 운동들을 다루는 각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영표는, 역설적이게도 진보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와의 은밀한 공조라는 결과를 낳은 기든스의 구조화이론과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처럼 한국의 시민운동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시민운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과대평가하고 “구좌파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과의 차이”에서 패러다임의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가져야 할 주체형성전략”은 사라지며 대신에 사회적 경제와 마을 만들기와 같은 “자본과 국가가 열어 놓은 세련된 사회적 경제 담론에 공모”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의 병행, 그리고 “민중의 정치주체화”의 복합적 구성물인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제안하고 있다.
심인호는 오늘날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은 ‘철밥통’을 차고 있는 ‘귀족노동자’일 뿐이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떼잡이’들일 뿐”이라고 문제제기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패배감’과 ‘고용불안 심리’에 따른 실리주의적 경향이 현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민주노조운동이 집단이기주의와 같은 행태로 전락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현장’을 부각시키고 ‘현장’에 초점을 맞추면서 ‘현장’으로 정치가 축소”되어버리는 현재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자본의 ‘외부’를 지향하는 운동”이라는 관점 속에서 “다양한 문화정치적 실험과 지역운동의 활성화를 통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는 최근 ‘종북논란’의 핵심에 서 있는 이석기그룹의 한반도 현실 인식을 다루면서 ‘평화지향적 통일운동’ 담론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석기그룹의 현실인식은 ‘일방주의적 대북인식’으로, 그 근저에는 ‘군사력 숭상의 과도한 현실주의’와 ‘안보주의’가 놓여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분단체제의 재생산에 분단기득권자들과 협업하고 있는 모순된 결과를 낳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과거의 민족주의적, 안보국가적, 전통주의적 통일담론의 유산”을 청산하고 “① 국민의 참여와 공감을 얻는 광범한 시민참여형, ② 통일과정의 사회적 갈등을 완화, 극복하는 사회통합적 시야, ③ 남북관계에서의 민간통일운동 의제의 확대(생태, 탈핵, 평화, 인권 등) 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문익환의 통일운동으로부터 남과 북의 관계에서 ‘중립성의 원칙’과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 전개되는 민 주도의 통일운동’이라는 원칙을 찾아내 이를 제안하고 있다.
위의 세 가지 글이 각각 한국의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을 다루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개의 글, 이창언의 “반제적(NL) 급진주의의 한계와 혁신과제”, 그리고 박영균의 “낡은 NL/PD의 패러다임과 급진적 진보운동의 방향”은 한국의 급진적 진보운동, 특히 근본변혁을 꿈꾸었던 1980년대 운동으로부터 형성된 두 당파의 운동노선과 양태들을 살펴보면서 급진적 진보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 두 개의 글은 각각 NL적 전통에서 NL계열에 대한, 그리고 PD적 전통에서 PD계열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근본적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글은 오늘날 두 계열로 반정립되어 있는 한국의 급진적 진보운동이라는 지형에서 서로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만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창언은, 이 글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정치 위기가 전체 통합진보당 주류세력의 ‘민족해방론’에 내장된 한계로부터 누적된 위기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상황과 도전 앞에서 혁신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급진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NL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시작하여 그 내부의 여러 가지 계열들의 역사적 전개 및 PD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NL이 가진 문제의식 및 성공요인 등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가 본질적 모순”이라는 특권화 및 “애국주의와 민족대단결론”, “‘정상국가 숭배’”라는 NL에 대한 비판은 이런 분석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는 “반제환원론, 북한에 대한 편향적 인식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 기초한 “대중의 삶의 양식에 대한 천착 속에서 자주성”을 재구성할 것과 “정파 패권주의의 폐해 극복과 운동조직 내 건강한 소통과 협력의 문화, 내부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한 “복수의 진보-민주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박영균은 NL/PD의 분화가 시작된 1980년대 사회구성체와 변혁론 논쟁 당시로 돌아가 ‘NLPDR’이 ‘NL’ 대 ‘PD’라는 두 개의 당파로 반정립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서 그 당시의 이론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보기에 ‘NL/PD’라는 논쟁의 핵심 쟁점은 ‘민족해방 대 계급해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NL=민족해방=통일운동/PD=계급해방=노동운동’이라는 연쇄적 의미 사슬”이 만들어진 것은 “그 당시의 사회구성체론과 변혁론 논쟁이 ‘식민지’ 또는 ‘종속’의 문제를 이론화하는 데에서 한편으로는 ‘정치주의적 편향’을, 다른 한편에는 ‘경제주의적 편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대립적 틀의 프레임”을 벗어나 분단-통일문제를 ‘반제-반미’가 아니라 분단을 생산하는 두 분단국가의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재정립하고 이 속에서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라는 민중권력”을 생산하는 횡단의 정치와 실험적 모험을 감행하는 전위적 실천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평론은 그동안 한국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진보운동은 자기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한국 진보운동에 대한 위기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는 퇴행을 거듭해 왔으며 지금의 상황도 그런 퇴행이 불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런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퇴행 또한 총체적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진보평론은 이번 특집에서 ‘한국 진보운동의 낡은 패러다임과 운동양식들’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을 수행하고 이런 내재적 비판을 통해서 이미 낡고 병든 한국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독자들은 이번 특집 글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진보운동이 대립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서로 간의 벽을 허물고 만남을 만드는 길을 여는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이번 특집에 실린 글들 사이에도 간극과 균열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 특집 글들이 모두 다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더 이상 한국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가 지금처럼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정립’, ‘부정’, ‘자기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벗어나 근본으로 돌아가 ‘인민을 위한 정치’를 향한 자기 성찰과 혁신, 그리고 정파를 넘어선 소통이 필요하다. 진보평론 편집위원회는 아무쪼록 이번 특집이 이런 자기 성찰과 소통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진보평론은 발언대, 정세, 국제란을 통해서 한국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거나 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이론적 개입을 수행해 왔다. 이번 호 발언대에는 이영수의 “수서발 KTX 노선 분할 민영화와 정부조달협정 개정은 한국철도의 재앙이다”라는 제하의 글을 실었다. 국토부는 지난 6월 14일 ‘철도산업의 분할을 골자로 하는 철도 민영화 정책’을 공식 발표했다. 그 핵심은 수서발 KTX노선을 철도공사 30%+연기금 등 공적자금 70%로 구성된 자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11월 5일에 철도부문을 외국자본에 개방한다는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되면서 철도민영화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에 철도노조는 올 12월 13일 열리는 철도공사이사회에서 수서발 KTX 운영 회사에 대한 출자가 의결되면 곧바로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영수 연구위원은, 수서발 KTX 노선 분할 민영화와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의 문제점을 낱낱이 밝히면서 철도노조 파업이 왜 정당한지를 밝히고 있다.
정세란에는 두 개의 글, 이기훈의 “그들의 대한민국 역사: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역사 인식”과 천보선의 “법외노조 공방 중간평가와 향후 전교조운동의 과제”가 실렸다. 여기서 이기훈은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한국의 진보와 보수 간의 역사 서술을 둘러싼 ‘역사전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교과서의 관점은 “<자본주의 문명=자유 민주주의=대한민국의 기초>라는 등식” 하에서 “적과 방해자”, “정통과 영웅”을 만들어내는, “적과 이단”이라는 “분노와 증오”의 역사 교과서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천보선은 최근 한국사회의 ‘매카시즘적 광풍’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전교조 법외노조화’라는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전교조 내부의 상황과 대응 방향 등을 논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월 16일-18일 사이에 진행된 조합원총투표에서 80% 참여율에 69.7%라는 압도적 비율로 정부의 시정명령을 거부한 사례를 들면서 현재 전교조 안에는 정부의 탄압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있다는 점을 분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를 근거로 그는 현재의 위기에 수세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활력과 단결을 끌어올릴 기회”로 바꾸기 위해 ‘참호’를 더 튼튼하게 하고 광범위한 연대체를 만들어가면서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란에는 고민택의 “동북아 정세 전망”을 실었다. 그는 최근 동북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미중 간의 패권경쟁이라는 신냉전질서를 ‘북핵문제’와 함께 다루고 있으며 현재 동북아에서 전개되는 각국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미중만이 아니라 남북, 일의 관계, 그리고 북핵문제와 6자 회담 등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탈국민국가’나 ‘제국’이라는 관점과 달리 ‘세계공황’과 ‘제국주의론’이라는 관점에서 동북아와 북핵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북아 국제 정세와 남북관계의 향방을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체제-제국주의론적 관점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일반논문란에는 라캉과 발리바르를 전공한 최원이 쓴 글, “1957-58년 세미나에서의 라캉의 이중전선: 욕망의 그라프 구축의 쟁점들”을 실었다. 그는 여기서 슬라보이 지젝이 해석하는 라캉의 욕망의 그라프에 대한 논의를 반박하면서 욕망의 그라프의 하층을 상상으로, 그리고 상층을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은 전공자가 아닌 경우, 읽는 데 어려울 수 있지만 라캉을 이해하고 라캉적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사유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 최원이 겨냥하고 있는 이론적 개입의 지점은 라캉을 가지고 혁명정치의 이론적 정당화를 꾀하는 라캉주의자들이다. 그가 보기에 라캉의 “상징에 대한 강조”는 “혁명 정치 이론을 가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성의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평론이 새로 기획해서 연재하고 있는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란에는 김정주의 “순환론과 동어반복: 수요-공급이론은 가격의 결정을 잘 설명하는가?”를, 소수자이야기란에는 밀사가 쓴 “성노동자 권리운동의 방향”이 실렸다. 정치경제학 비판란에 연재를 하고 있는 김정주는 이번 글에서 모든 자본주의경제학이 신조로 삼고 있는 수요-공급이론이 설명하고 있는 가격이론의 순환론적 오류와 이윤 배제라는 이론적 결함을 대중적인 용어로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경제학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또한, 밀사는 ‘성노동자의 권리운동’이라는 다소간 생소한 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글은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과 더불어 시작된 집결지 운동과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의 역사와 한계로부터 시작하여 성노동자 권리운동의 의제와 성노동이론의 정교화 방향, 그리고 성담론의 사회적 확산과 연대의 방향까지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진보평론은 그 동안 진보적 지성의 확산을 위해 대중적인 코너들을 개발해왔는데, 위에 소개된 정치경제학 비판란과 함께 ‘다시 읽기’란, 그리고 ‘페미니즘 서평’란 등이 그러하다. 이번 호의 다시 읽기에는 오창룡이 쓴 “"오래된 미래"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현대 사회 인간성 상실의 평행이론”이 실려 있다. 여기서 그는 250여 년의 차이에도 양 텍스트가 오늘날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1991)를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이라는 눈으로 읽어가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교차시키는, 텍스트 간의 소통을 통한 사유라는 흥미로운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텍스트란 현재적 문제의식 속에서 읽어질 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이와 같은 텍스트 읽기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적 문제의식 속에서 텍스트는 새 생명을 얻고 그렇게 우리의 양식이 되는,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독자는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이번 호 페미니즘란에는 이철호의 “잉여의 시대: 타자의 삶”이 실렸다. 이 글은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서평으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쓴 페미니즘의 고전, "제2의 성"을 택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성"에 나오는 핵심적 테제들을 중심으로 책 내용을 정리하면서 ‘타자’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과 더불어 자신의 읽기를 사유로 전환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는 “타자화된 성적 소수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빈곤과 자연재해까지 ‘여성’에게 차별적인 현실을 드러내면서 그 속에서 ‘해방’을 사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평으로는 장귀연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부채, 부채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다룬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수탈한다(홍석만·송명관, "부채전쟁")를 실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비판적 독서를 부탁한다. 이번 호에는 다양한 쟁점들을 소개하거나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들이 많다. 물론 모든 살아 있는 글은 시대와 호흡하며 그 속에 존재하는 지성은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것이 전도되어가는 듯이 보이는 세계 속에서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여기 실린 글들이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진보평론은 독자들과 함께, 독자들의 힘으로 그 길을 찾고자 하며 여기에 실린 글들에 생명을 주는 것은 독자들이다. 아무쪼록 독자들의 격려와 비판, 그리고 엄혹한 세상에 길을 찾는 ‘소통’의 장에서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2013년 12월 1일
편집위원장 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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