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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철학과 한국사회의 대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과 횡단’, ‘교차’다!
작성일 : 14-03-18 11:13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376  

현대 정치철학과 한국사회의 대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과 횡단’, ‘교차’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아오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1820년 출간된 헤겔의 "법철학"의 서문 말미의 말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가 부리는 종복으로, 철학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해가 진 ‘밤’이다. 사유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대낮에 보았던 세계는 ‘명증한 세계’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것은 무너진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밤 중’에 끝내 잠들기를 거부하고 그 ‘밤’을 사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1980년대의 우리는 이런 헤겔의 말을 조롱했다.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1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철학은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맑스가 예언자적으로 선언했던 ‘갈리아의 수탉’은 지금까지도 울지 않았다. 동녘 하늘은 이전보다도 더 깊은 밤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사람들은 1980년대의 엄혹했던 ‘밤’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다. ‘대낮처럼 밝은 스펙터클한 자본주의’라는 ‘잠’에 말이다. 그래서 푸코처럼 대낮에 등불을 들고 우리 주변을 수색해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착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너무나 긴 밤에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와의 불화’는 지속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사유가 보여주는 실천의 풍요로움은 바로 이런 ‘시대와의 불화’,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의 사유가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끝끝내 잠들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여명을 보지 못하는, 그런 ‘밤’이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풍요로움’은 ‘사유의 간결성’을 해친다. 1980년대의 밤은 ‘밤’이 아니었다. 그 시대는 밤을 밝히는, ‘대낮보다 더 명증한’, 태양의 빛에 이끌렸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 시대는 지젝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눈이 ‘태양’을 직시함으로써 ‘실명’되었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0년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포스트담론’의 열풍 이후, 그 깊은 ‘밤’, 별빛조차 그 빛을 감춘 어둠 속에서 시대의 불화가 낳은 새로운 사유의 모색 또한 진행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포스트 담론 이후의 사유들’은 바로 이런 시대와의 불화가 만들어내는 ‘고통스런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포스트의 포스트, 이후의 이후’(?)라고 명명해야 할까? 어쨌든 그들은 1980년대도, 1990년대도 아닌, 그것을 넘어선 ‘이후’를 사유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쟁점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하나의 별’이 아니라 ‘다양한 별’들로 밤을 밝히며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교차하거나 어긋나는 궤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 진보평론에서는 바로 이런 사유들이 펼쳐놓은 문제의식과 지적 여정들을 함께 사유함으로써 ‘포스트 이후’의 사유를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그래서 “현대정치철학에게 한국사회를 묻다”라는 주제로 ‘푸코’, ‘랑시에르’, ‘아감벤’, ‘흑인페미니즘’, ‘네그리’,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라는 현대정치철학의 거장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각의 현대철학자들의 사유를 이 한 권의 책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새로운 철학적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들의 사유를 함께 사유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사유들의 궤적을 쫓아가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 현대정치철학의 거장들이 내놓은 사유들은 우리 시대를 사유하는 데 반드시 참조되어야 할 지적 고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최대한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흐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물론 여전히 어떤 명료한 결론이나 성급하게 ‘실천’만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은 198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논쟁을 ‘현학적’이라고 비판하듯이 이런 지적 고투의 산물을 또 다시 ‘현학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현학’이 아니라 ‘평이함’이다. 삶은 쉽지 않다. 이론은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일정한 추상화를 동반한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아로새겨져 있는 지배의 흔적들을 해체하면서 전복적 ‘불온함’을 설파하는 논의들이다. 사회가 제도들과 그 제도들을 지탱시키는 이데올로기들로 만들어져 있고 사회의 재생산은 그 제도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생산’된다는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이번 특집에서 철학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 안에 이미 지배이데올로기들을 담고 있고, 그래서 정치철학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닌 ‘자본주의의’ 정치철학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매일매일의 실천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매일매일의 실천 속에서 재생산되는, 그렇지만 그 실천 속에서 비껴나가면서 지배이데올로기에 파열음을 내는 전복적 행위들에 기초한 사유여야 한다.
그러나 이번 호 특집의 첫 번째 글인 서동진의 “푸코의 사회적 유물론과 그 불만”이 보여주듯이 오늘날 지배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과거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치/경제라는 이분법에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를 정치적 교의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서동진은 푸코의 ‘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을 통해서 “교조적 맑스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적 토대의 외양이자 표출로서의 국가라는 관점”을 벗어나 “인구, 정치경제학, 안전이라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삼항구조를 통해서 “근대 권력이 더 이상 왕의 신체가 아니라 사회적 신체를 관류하며 작동하도록 자신의 프로그램을 조직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경제’라는 자율적 심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말하면서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푸코의 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이 그 같은 관점에 대한 적절한 교정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는 푸코의 ‘반경제주의’가 “경제적인 것 자체의 부재”로 나아갔다고 하면서 푸코가 좌절한 지점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자유주의 ‘비판’으로, 노동가치론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내재적 비판으로 읽어내면서 맑스의 물신주의를 “초월적이면서도 경험적인, 감각적이면서도 초감각적인, 사유내적 주관이면서 사유외적인 대상인 것으로서의 상품과 화폐의 세계, 즉 자본주의를 가능케 하는 원리”로 위치지우고 있다.
반면 윤영광의 “윤리로서의 정치, 혹은 장치라는 문제: 기업(가)적 주체의 출현과 주체성의 재생산”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의 사유화와 실질적 포섭에 관한 이야기를 푸코의 삶권력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네그리와 하트는 삶권력에 의한 주체의 실질적 포섭을 현실적 조건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하기에 푸코와 문제설정의 지평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네그리와 하트는 “대안적 장치, 대안적 주체의 가능성을 생산의 지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모색”한다는 점에서 푸코, 들뢰즈, 아감벤과도 다르다. 따라서 그는 “다중을 정치적으로 기획한다는 것은 잠재력과 주체적 조건으로서의 존재론적 다중이 역사적 다중으로 현실화되는 방향을 모색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보여주었듯이 오늘날 ‘탈산업사회’의 기술적 구성의 변화는 가치의 축적을 공장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노동가치론과 같은 고전적 가치법칙은 법칙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화폐라는 척도에 따라 자본주의적 주체로 재생산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네그리와 하트의 논의를 따라 ‘엑소더스’를 주장하면서 탈출은 “척도를 넘어서는 것, 즉 ‘초과’이며 초과한다는 것은 척도에 의해 정해진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 “우리의 다른 것-되기”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탈거”와 해방”을 구분하고 “대안적 장치의 가능성”을 “가난-사랑-공통적인 것”의 계열 속에서 찾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현대정치철학은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찾는데 주력한다. 이것은 이후의 모든 글에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박기순의 “랑시에르의 민중 개념: 민중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과 그 대안의 모색”은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을 한국의 급진적 진보운동에 직접적으로 가져와서 ‘새로운 주체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80년대 혁명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던 맑스주의가 사실상 ‘낭만주의-반지성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랑시에르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사유가 ‘민중에 대한 믿음’을 보존하면서 ‘동일성으로서 낭만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불화의 정치’와 ‘두 언어 사이의 대립’을 근거로 하여 ‘정치의 주체’로서의 민중은 “할당된 몫, 자격, 능력과 그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몫, 자격, 능력 사이의 거리, 한마디로 불평등과 평등 사이의 거리”를 제기하고, 이러한 불화를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박기순의 글을 박영균의 “알랭 바디우, 후사건적 주체와 둘의 철학”과 교차해서 읽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 박영균은 ‘동일성’이라는 환상을 ‘낭만주의’가 아니라 바디우가 말하는 ‘선/악’ 개념으로부터 가져와 80년대 운동을 5.18광주민중항쟁이라는 사건에 뒤이은 ‘후사건적 주체’가 ‘선의 힘’을 절대화하고 명명 불가능한 것을 명명하려는 실재의 열정이라는 차원에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인권’과 ‘다원주의’를 신자유주의로의 투항으로 간주하는 바디우처럼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 이후 진행된 ‘민주화’ 속에서 이루어진 자유주의 개혁과 포스트담론의 ‘해체 작업’을 이념의 상실이자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대한 투항으로 읽고 있다.
바디우의 정치철학은 국가가 재현체계로서, 끊임없이 부분집합들을 하나로 셈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런 ‘하나로 묶기’라는 집합체계는 필연적으로 부분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집합이라는 ‘공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의 철학이 가진 독특성은 바로 이런 공백을 단순한 거짓이라는 의미에서의 허구가 아니라 불사의 존재로서 인간의 ‘영원성’이라는, ‘유적인 허구’로 본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바디우는 ‘하나로 묶기’가 은폐하는 공백을 드러내는 사건을 통해서 그것에 개입하면서 “다수가 공속적인 진리 생산 공정에 유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후사건적 주체’와 ‘둘의 철학’에 주목한다. 또한 이런 점에서 박영균은 오늘날 한국의 급진적 진보운동이 단순히 ‘공감’과 ‘차이’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 아니라 …임’이라는 ‘이념’과 ‘진리’를 창안하는 주체화의 모험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연결해서 주목해야 할 현대정치철학자가 있다면 바로 슬라보예 지젝일 것이다. 지젝은 오늘날 포스트모던적 지평에서 보자면 바디우보다 더 도그마틱하며 더 모험적이다. 그는 라클라우의 계급, 성, 인종, 생태의 접합을 강조하는 헤게모니적 정치를 비판하면서 계급, 성, 인종, 생태는 등가적인 것이 아니며 “계급투쟁은 헤게모니적 실천에 참여하는 하나의 특수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요소들의 헤게모니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영역 자체를 구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예외”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의 예외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주주의는 오늘날 대표적인 사회적 환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한의 글 “한국사회에서 지젝의 위험한 철학?”은 바로 이런 지젝의 정치철학을 다루고 있다.
김정한은 “어떤 혁명적 시도도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협박에 맞서서 레닌을 반복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지젝의 공헌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곳곳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찬가가 일방적으로 울려 퍼지고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고금지’의 시대에 공산주의를 본격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새로운 사유를 촉구했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정당 형태야말로 공산주의 이념을 새롭게 사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일 수도 있을 텐데, 지젝은 이 지점에서만큼은 새로운 공산주의적인 조직적 실천을 고민하기보다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하면서 “우리에게 지젝이 세계적인 명사 중의 한 사람”, 또는 지식상품으로 환영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사실, 이번 진보평론의 특집이 암묵적으로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현대정치철학의 사유를 ‘횡단’하고 ‘교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횡단과 교차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현대정치철학을 통해서 한국사회를 본다는 것만 해도 현대정치철학에 대한 철저한 독해와 자기이해를 전제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한국사회의 실천적 과제들과 연결시켜서 자기화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어려운 작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특집을 쓴 필자들만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당장 직면하게 되는 과제이다. 당장 독자들은 이번 특집 글 속에서 공명하는 듯이 보이는 지점에서 차이를 드러내거나 심지어 적대적으로 분열하는, 무수한 이론적 전선들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박기순의 “랑시에르의 민중 개념: 민중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과 그 대안의 모색”과 김상운의 “랑시에르와의 ‘교전’을 통해 본 아감벤의 ‘한국적’ 유효성 모색”은 상호 논쟁과 쟁점을 함축하고 있다. 박기순의 글은 김상운의 글보다 훨씬 더 ‘한국의 진보운동’과의 직접적 대화를 드러내고 있지만 이들 간의 쟁점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정치’ 그 자체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삶에서 정치와 생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거기에는 포함과 배제가 항상 동시에 작동하며 둘을 분리해서 사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몫이 없는 자들의 몫’, 기존 공동체의 합의에 파열을 내는 ‘불화’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를 사유한다면 아감벤은 “구성하는 권력/구성된 권력의 변증법적 악순환”을 벗어난 “탈정립적 권력”을 사유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김상운은 랑시에르가 아감벤을 ‘정치적 삶’과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하고 정치적 삶을 우선시하는 순수정치로 치우친 아렌트를 계승하고 있으며 순수정치를 탈정치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것은 적절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그는 “랑시에르의 불화조차도 이미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의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감벤의 비판을 통해서 “더 이상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에 기반하지 않는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아감벤의 극한적 사유를 통해서 제기되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는 정치적 권리 바깥에 있는 자들이 절대적 평등의 원리에 기초해 생산하는 ‘불화’와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실체적 주체를 상정하는 정치에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아감벤과의 논쟁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분열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진보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박기순이 ‘월드컵 대중’을 ‘전체주의적이고 파시즘’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대중의 흐름을 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민중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가시화하고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네그리의 대중, 운동과는 다른 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정한의 “한국사회에서 지젝의 위험한 철학?”과 박영균의 “알랭 바디우, 후사건적 주체와 둘의 철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젝과 바디우는 연대 전선을 구축하고 있지만 이들 내부에 쟁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최원의 “한국 진보 운동 재구성의 몇몇 쟁점들: 발리바르의 관점을 중심으로”라는 글까지 들어오면 사태는 더욱더 복잡해진다.
최원은 한국진보운동이 직면한 세 가지 문제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열’, ‘폭력의 전면적 비판(비폭력)과 수용(대항폭력) 사이의 갈등’,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돌파하는 길을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에서 찾고 있다. 그는 발리바르를 따라 인권-시민권 개념이 일방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 안에 저항의 계기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진적으로 재전유된 시민권 개념은 현실 비판과 변혁적 정치기획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연결고리를 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그는 발리바르의 ‘반폭력’이라는 문제설정과 관련하여 반폭력이란 “지배계급의 폭력의 도착을 제어할 수 있는 헤게모니적 대항권력을 대중 속에서 구축해 내고, 또 이를 통해 기동전이라는 내전이 발발했을 때조차 그곳으로 ‘전쟁’이 아닌 ‘정치’를 다시 도입할 수 있는 대중의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발리바르의 ‘씨테에 대한 권리’에 근거하여 “민족국가들의 경계선”을 “민주화”하고 “자본의 초민족적인 운동을 통제하기 위한 대중들의 연대를 지역적 차원으로부터 민족적 차원, 그리고 초민족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면서 “자본의 이동만큼이나 인간의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어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특집의 글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국 진보운동의 길을 모색하면서 서로 공명하기도 하지만 그 공명의 지점에서 분열하고 각각의 차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날 현실의 냉혹함과 어두운 밤의 지속에 성마른 사람들에게 이 차이들이란 ‘혼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미선의 “여성주의 좌파 이론을 향해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과 교차성 이론”은 그것이 혼란이 아니라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지평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박미선은 흑인 페미니즘에 주목하고 대표적 이론가들이 주장한 ‘교차성’을 “낡은 진보와의 결별에 기여할 여성주의 이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그의 ‘교차성’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여성주의 이론의 소개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교차시켜야 할 지점들을 사유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가 콜린스의 논의를 빌려 말하고 있는 ‘교차성’은 “계급, 젠더, 인종/종족, 섹슈얼리티, 나이, 시민권상의 지위, 장애유무, 종교 등이 특정한 억압구조를 구성하며 이러한 여러 체계가 특정하게 맞물려 사회조직과 권력배치의 특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차성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더하기 모델’이 아니다. ‘더하기 모델’은 “백인여성과 흑인/유색 여성이 경험하는 젠더억압을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가정”한다.
이에 반해 그가 주장하는 교차성은 “젠더의 의미가 인종·종족에 따라 상이할 수 있으며 인종의 역사적 의미 역시 남녀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상이한 집단에게 질적으로 다르게 경험되는 지점에 주목”함으로써 “차별과 지배의 다층적 형식들과 복잡한 역동적 관계를 초점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상황에 따라 결정적 변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러 가지 권력이 교차하여 구성되는 ‘지배 매트릭스’ 분석에 주목하고 있다. 지배 매트릭스는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민족과 같은 특정 축을 따라 형성되는 방식과 서로 긴밀히 연결된 권력의 구조적, 훈육적, 헤게모니적, 대인관계적 영역을 통해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권력은 집단 소유물이 아니라 지배 매트릭스 안에서 순환하는 무형적 실체이자 다양한 위치에서 개개인들이 맺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지배 매트릭스 분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개개인이 주체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은 넓어지며 집단적으로도 효과적 저항전략을 다양하게 구상하여 실천”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그녀는 “맑스주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비전을 중시한 좌파”가 “교차성 이론에 대한 이해와 교차성 분석틀의 좌파적인 사용을 통해 이론적 자기변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좌파여성주의 이론의 모색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의 급진적 진보운동이 출발해야 할 ‘자기 혁신’을 위한 ‘횡단’과 ‘교차’의 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의 유일한 방향이거나 출발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번 특집 글들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결코 소통으로만 해소될 수 없는 쟁점들이 있으며 ‘지배 매트릭스’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게다가 이번 특집에서 다루고 있는 현대정치철학은 현대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이론들 전체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것은 이번 특집이 ‘한국사회’를 초점으로 했으며 한국의 진보적 지성들이 주로 다루고 있는 현대정치철학을 중심으로 기획하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용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외연적 측면에서만 보아도 이번 특집 기획에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데리다’뿐만 아니라 ‘라클라우’, ‘무페’같은 급진민주주의자들의 이론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내포적 측면에서 보아도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현대정치철학을 다룬다는 애초의 기획의도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번호 특집 ‘현대정치철학에게 한국사회를 묻다’는 지속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실패한 지점이다. 일부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학문을 기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 한국에는 특정한 이론가에 매달리는 전문가들은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담론적 실천 속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 학문적 풍토가 부족하다는 말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평론도 학술운동의 길은 깊이 있는 연구 영역을 가진 전문가들이 서로 소통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지향해 왔다. ‘누구의 전문가’는 기존 학계의 장벽에 막혀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향을 향한 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정치철학’과 ‘한국사회’를 대질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시도에 대한 평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이것을 보고 실망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며 너무 현학적이거나 추상적이라고 치부해 버릴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 연구자들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학계가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단절과 소통부족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편화된 지식들과 부분적인 통찰들을 가지고 있을 뿐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지적 지도’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특집의 글들은 그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 이후의 작업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겨놓고자 한다.
이번 호는 특집에 많은 글이 실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코너들이 빈약해졌다. 그럼에도 새로운 코너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쟁점란’이다. ‘쟁점란’은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논쟁적 글쓰기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쟁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기획된 코너였다. 그러나 야심차게 기획했던 쟁점란은 필자를 구할 수 없어서 번번이 무산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런 상황 자체가 한국 진보운동의 현 상태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쟁점란에 실린 협동조합에 대한 비판이 한국 진보운동 내부의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쟁점란에 실린 정상은의 “협동조합과 사회주의”라는 글은 협동조합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활동가의 시각에서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론적 쟁점에서 시작하여 현장에서 벌어지는 쟁점들까지 포괄적이며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글을 통해서 독자들은 활동가로서의 체험과 이론적 논의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최근 도입된 <협동조합법>과 서울시가 지원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와 협동조합운동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는 비판이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상은은 현재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운동이 지배적 담론에 이용당하고 있는 측면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지는 잠재적 힘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일반논문으로는 류청오의 “노동사회의 재편성과 기본소득”이 있다. 그는 기본소득이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지급되기에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글을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동사회” 개념을 제시하고 이것의 구조적 변화와 그에 따른 노동의 위기를 논의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런 변화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과학기술의 혁신으로 인한 정보혁명”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렇기에 “구조적인 차원에서 노동사회가 변화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노동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체형성의 필요가 제시되며, 그것을 위한 조건으로서 기본소득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란에는 “완전경쟁이라는 실현불가능한 꿈”이 실렸다. 벌써 3회째에 접어들고 있다. 혹시 앞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앞의 글과 연속적으로 읽는 것도 좋겠다. 이 글에서 김정주는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위치에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지향하는 완전경쟁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현실과 완전경쟁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이론적 강박이야 말로 경제학을 현실과 단절된 이론적 ‘유토피아’에 유폐시키는 가장 주된 요인”으로 꼽고 있다. 게다가 더 나아가 그는 시장과 독점의 관계를 다루면서 최근 철도파업에서 쟁점이 되었듯이 “경쟁체제의 도입만이 경제적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점 또한 보여주고 있다.
소수자란에는 임소연의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장애인 탈시설자립생활 운동의 현황과 과제”라는 글이 실렸다. 흔히 이야기 되듯이 우리 사회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장애인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통합학교의 경험으로부터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함께 교육받을 때 서로간의 교육효과가 높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장애인들을 분리해서 ‘우리’가 아닌 ‘그들’로 가두고 있는 것이다. 임소연은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자행된 폭력과 인권유린을 밝혀내고 처벌하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에 어울려 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 운동, 즉 ‘탈시설자립생활 운동의 현황을 소개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다시읽기에서는 최철웅이 이탈리아 자율주의 이론가들인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금융자본주의의 폭력"과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인간"을 함께 검토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우리의 일상은 대학생으로부터 노인까지 부채에 저당 잡혀 있다. 주택담보대출에서 카드사용에 따른 빚까지 부채 위에 올라 앉아 살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라찌와 라자라토는 “20세기 후반 금융화한 자본주의의 특징”과 우리가 겪고 있는 “금융위기의 원인, 그리고 그 정치적 효과와 대안”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새롭게 설명하고 있다. 그 새로움은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본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포스트포드주의적 인지자본주의’나 ‘부채경제’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자본주의의 양상을 분석하는 능력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두 명의 저자에 대한 읽기를 통해서 “오늘날 정치적 권력관계의 핵심에는 금융 또는 부채가 놓여 있으며, 그곳이 바로 자본과 노동의 억압적 관계가 재생산되는 계급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평론 편집위원회는 쉽지 않는 주제임에도 옥고를 보내주신 특집 글의 저자들과 쟁점란, 소수자란, 다시읽기에 글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 노고에 대한 실질적인 감사는 편집위원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정한 감사는 그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이며 글의 완성은 비로소 독자와의 소통을 만들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평론 편집위원회는 필자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독자들의 적극적인 읽기와 소통, 그리고 논쟁을 기대한다.

2014년 3월 1일
편집위원 박영균·서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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