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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과 망각의 정치학, 진보정치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작성일 : 14-06-21 16:34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352  

‘4·16’과 망각의 정치학, 진보정치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현재 우리에겐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4·16’ 이전의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4·16’ 이후의 시간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세월호참사’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이 우리의 삶을 두 개의 시간으로 갈라놓았다. ‘4·16’은 우리에게 시간의 ‘근본적인 단절’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단절의 시간’은 ‘4·19’나 ‘6·10’처럼 잠깐 동안의 ‘승리의 순간’을 만들어낸 단절의 시간도 아니며 ‘5·18’처럼 칠흑같이 어둡고 동토처럼 냉혹한 현실에 저항한 ‘불사의 삶으로서의 인간의 영원성’을 드러낸 단절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참극의 순간’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단절시킨 사건이었다.
현대문명은 근대적인 합리성의 정신을 따라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듯이 시간과 공간마저 기계적으로 분절하고 접합시키며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 우리의 욕망은 ‘물질적 풍요’와 ‘스펙터클한 전경’ 속에 코드화되었고 이제 그것은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마저 벗어던진 ‘크로노스’가 되었다. 여기서의 정언명법은 ‘생산하라, 접속하라, 소비하라’이다. ‘가짐(haben)’이라는 자본의 욕망과 권력은 그렇게 우리 자신의 욕망이 되었으며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이 만들어내는 생성의 힘은 누군가의 ‘권력’과 ‘부’가 되었다.
‘세월호참사’는 마치 우리네 삶 전체를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반하고 있는 것은 ‘세월호참사’가 아니라 ‘세월호참사’를 야기한 우리 자신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왔던 삶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16’ 이전의 시간은 자본의 욕망과 권력의 노예가 된 채 살아온 일상의 시간에 속하며 그 시간의 연속은 ‘세월호’처럼 우리 삶의 총체적 파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4·16’은 우리가 기존에 만들어 온 일상의 시간, 노예의 시간에 대한 중단이자 존재물음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망각할 수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생명의 빚을 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빚을 지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우린 자연에 대해서도 빚을 진다. 게다가 우린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우리가 살아있는 한, 다른 생명체의 힘을 빼앗아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망각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저하게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에 굴레처럼 박혀 있는 죄이자 벗어날 수 없는 죄로서, 단죄의 대상이란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요구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망각됨으로서 우리 자신을 달래야 하는, 그런 종류에 슬픔에 속하는 참사가 아니다. 물론 인간은 너무나 아픈 과거에 대한 망각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달래지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인간에게는 결코 망각되거나 망각되어질 수 없는 기억들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망각하려 해도 망각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생명과 자존, 존재의미에 관한 기억들일 것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프로이트의 모토처럼 ‘생명의 근본적 위협’과 ‘자존의 심대한 손상’, ‘존재의 근본적인 와해’에 해당하는 사건은 결코 망각의 심연 속에 갇혀 있지 못한다.
‘세월호참사의 주검들’은 죽었으나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죽어서도 죽지 못한 산죽음’이 되어 우리 곁을 떠도는 ‘유령’이 되었다. 우리는 이 ‘산죽음’을 통해서 ‘4·16’이라는 지나간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화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이후 시간에서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오며 존재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의 ‘부재’로부터 올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 있음이 아니라 없음, 삶이 아니라 죽음을 떠올릴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원환 속에 갇혀 있는 무사유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추구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4·16’이라는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대면하고 그것을 정치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에게 이와 같은 대면은 근본적인 위협일 뿐이다. 자본과 권력에게 중요한 것은 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안정성이며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는 자동인형 메커니즘의 창출이다. <모던 타임즈>에 그려진 노동자들처럼 컨베이어벨트와 한 몸이 되어 지속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지배’도 ‘탐욕’도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음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모든 사건과 시간에 대한 기억들은 망각되어야 한다. ‘4·16’이라는 시간이 망각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공포, 국가의 불완전성과 무능력을 환기시킴으로써 국가라는 초자아 안에 존재하는 평온한 일상과 시간의 연속적 흐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망각의 기제는 이미 작동하고 있다. ‘눈물의 퍼포먼스’는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애도’로 전치되며 ‘치유’는 ‘악’으로 상징화된 ‘적’들에 대한 ‘원한의 감정’으로 전이된다. ‘적폐를 청산’하는 ‘국가개조’와 악에 대한 단죄는 다시 ‘초자아’의 권력으로 전화되고 있다. 세월호선장의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6·4지방선거’에서 여야는 ‘대통령의 눈물’과 ‘원한의 감정’에 호소했고 둘 다 동일하게 국민을 기만했다. 그들은 겉으로 매우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민들의 일상을 평온하게 관리하는 ‘치안의 정치’를 수행하는 초자아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벌이고 있다.
‘6·4지방선거’에서 여야는 동일하게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으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진짜 성공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새누리당’이며 ‘새정치국민연합’은 단지 절반만 성공했을 뿐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진보정당이 ‘4·16’이라는 사건을 기억하지 않거나 그 단절의 시간을 현재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진보정당 또한 ‘초자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개칭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파란색을, 민주당은 노란색을 취했다. 빨간색은 한국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자 반국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거꾸로 ‘새정치국민연합’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파란색을, 새누리당은 빨간색을, ‘정의당’은 노란색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근대정당정치가 서 있는 지점과 위치, 가치의 좌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가만히 있으라. 나를 믿으라. 내가 당신의 안정과 평온을 보장하겠다.’고 선동할 뿐이다.
곧 월드컵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경계하고 있듯이 ‘월드컵’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두고 거대한 망각의 늪으로 이끌 수 있는 최고의 ‘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바우먼이 말한 진정한 공포가 시작된다. 바우먼은 공포 중에서 진정으로 위험한 공포는 ‘공포를 망각하도록 하는 공포’라고 하면서 이런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공포퇴치의 소비경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텔레비전에 자신의 눈과 마음을 잡아 둔 채 맥주를 마시며,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하면서 이미 망가진 대한민국의 국가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상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세월호참사’와 같은 참화를 자신의 삶에 불러들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미래는 불투명한가? 그럴까 봐 걱정하지 않을 그럴듯한 이유가 하나 이상 있다.……이제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즐겨라, 대가는 나중에’라는 이 고대의 격언은 신용카드 회사들에 의해 이렇게 업데이트 되었다. ‘갖고 싶으세요? 그러면 기다리지 마세요.’”라고 말이다. 여기에 우리 자신의 삶을 속이고 배반하는 ‘자본의 욕망’이 작동한다. 우리는 지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 곁에 ‘죽어도 죽지 못한 산죽음’을 떠나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치유’라는 달콤한 속삭임, 가장된 ‘애도’의 몸짓을 우리는 경계해야 하고 기억하고 대면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세월호참사는 한국사회의 민낯, 추악한 우리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대면하기 싫은, 잊어버리고 싶은 사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의식을 타자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감정’으로 덮어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구를 기억하자. “슬픈 영혼들이 상납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폭군을 필요로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폭군은 성공하기 위해서 영혼들의 슬픔을 필요로 한다. 어쨌든 이들을 통일시키는 것은 삶에 대한 증오이며 삶에 대한 원한이다.” ‘세월호선장’과 ‘유병언일가’, ‘해경’에 대한 단죄가 그들을 떠나보내는 진정한 애도, 우리 자신에 대한 치유의 길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세월호 참사가 보여주듯이 현대 대의제 정치체제가 더 이상 국민들의 목숨조차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있다. 거기에는 진정한 ‘정치’는 고사하고 ‘치안’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투쟁과 정치를 ‘쇼’로 바꾸어 놓는 상품화된 정치만이 존재한다. ‘4·16’ 이후 사람들이 국가의 책임을 물었을 때, 그들은 ‘세월호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했다. ‘죽음’은 순전히 인간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6.4지방선거’에서 가장 열심히 ‘박근혜대통령의 눈물’을 이용하여 정치적 마케팅을 했던 자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비정치적인 인간적인 문제로 바꾸어 놓고 가장 정략적인 지배의 정치학을 작동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장을 전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가장 인간적인 문제가 가장 ‘정치적인 문제’이며 진정한 애도의 눈물은 ‘산죽음’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권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명에 의한, 우리 자신을 위한 우리들의 생명 정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한국진보정당운동이 새롭게 출발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6.4지방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퇴행적인 행보를 반복했다는 점에서 냉정하게 말한다면 더 철저하게 실패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진보정당운동은 기본적으로 초자아로서 국가가 가지고 있는 균열과 틈새, 불완전성을 봉합하거나 은폐하는 지점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돌출하고 빗겨져 나가면서 ‘단절의 시간’을 만드는 ‘사건’들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들의 힘’에 근거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대의제적 게임 룰’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으며 그럴수록 그들은 더 실패해왔다. 그렇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교육감선거는, ‘교육’은 ‘비정치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이 ‘4·16’을 기억하는 생명정치와 그간 진보교육운동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계급적 진보운동들은 ‘이념’의 선명성을 내세우고 깃발을 세우는 데 앞장세워왔다. 그런데 그랬기 때문에 이제는 거꾸로 진보운동 스스로 이념적 색채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념은 ‘깃발’의 선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4·16’과 같은 ‘시간의 중단’이 보여주는 ‘국가와 체제의 균열’ 속에서 발견되는 ‘사람들의 삶’에 있다. 진보교육운동은 바로 이런 균열을 보여주는 교육 사안들로부터 대안적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에서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왔다. 따라서 문제는 이념적 선명성이 아니라 사람들의 분열적 삶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가는 진정성과 실천의 일관성이다. 이번 진보평론이 특집으로 기획한 지역정치에 대한 논의도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지역을 중앙과 대비하여 반정립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역은 중앙에 대한 반정립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중앙에 대한 반정립으로 규정된 지역정치는 오히려 탈정치화와 탈정당화, 보수적 지역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주의’가 ‘보수주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중앙’에 대비하여 지역의 전통과 가치를 말하기 때문이며 진보적 지역정치조차 지역개발동맹에 말려드는 것도 중앙에 대비하여 지역의 발전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번 진보평론 기획특집에서는 이런 지역정치의 문제들이 각 지역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새로운 버전이랄 수 있는 마을만들기로 진보정치가 흡수되고 있는 현실,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대거 결합했지만 6·4지방선거에서 후보조차 선출하지 못하고 해단해 버린 추대위, 4개의 진보정당이 난립하는 상황 등…….
먼저 서영표의 글, “당연한 것을 낯설게 하는 실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정치: 참여와 실천의 공간인 지역정치”는 이미 상품이 되어버린 현대정치의 풍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는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은 행위로 전락해버린 ‘왜곡된’ 민주주의의 뿌리를 ‘왜곡된’ 지역정치 구조에서 찾고 있다. 그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뿌리내리기’라는 지역정치는 “나무뿌리에 기생하는 ‘잔뿌리 정치’”로, “기득권이라는 거목을 지탱하는 ‘나무뿌리’ 정치”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는 민초들의 잠재적 역량에 기초한 ‘잡초’들의 ‘뿌리 내림’이라는 차원에서 지역정치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의 기득권 동맹”을 지지하고 “보수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공모자”가 되는 지역정치의 왜곡을 “집합적인 행위자로 권력의 토대가 되지만 개인으로 돌아가면 권력의 희생양이며 착취의 대상”이 되며 “집합적으로 지역공동체의 대의에 동의하지만 일상의 개인으로 돌아가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그는 “공모자-피해자로부터 저항적 주체로 전화할 수 있는 공통의 체험과 실천을 가능”케 하는 지역정치를 역설하면서 “민주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정보와 자원의 급진적 재분배”, “협동조합과 지역공동체와 연결된 사회적 기업의 활성화”, “참여와 체험이 공유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지역정치”, “풀뿌리 주민에게 결정권을 부여하는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두 번째 글인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평가”는 ‘구로민중의집’ 대표 강상구가 써주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핵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마을공동체사업’을 중심으로 서울의 지역정치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은 일단 ‘마을공동체운동’이 “지역사회 계급 관계의 자유주의적 재편”이자 “신자유주의의 업그레이드 된 버전”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을공동체운동’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마을공동체운동이 “대안적 삶의 양식을 창출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형성해 가는 좌파적 공동체 운동과 보수 세력 위주의 기존 지역사회지배구조 사이의 어디쯤인가에 위치”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마을공동체운동’의 양가성과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발전 경향을 모두 보고자하며 그 속에서 마을공동체운동을 진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정책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가 제기하는 마을공동체운동이 가진 문제는 다음의 4가지이다. 첫째, “마을공동체 운동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조건 그 자체,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을 항상적 위기로 몰아넣은 시스템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는 점이며 둘째, 마을공동체운동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이 “세계·국가·광역적 차원과 관계된 문제”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주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셋째로, 민관거버넌스에 대한 강조가 보여주는 것처럼 ‘마을’이라는 “비현실적 낭만성”, 넷째로, 탈정치적이며 주체를 형성하는, 다른 운동과 연계된 자기 변화를 꾀하는 ‘운동’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에너지 자립마을운동이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지 및 밀양운동과 함께 하는 식의 ① 기존의 다른 대항 공동체와의 연계 강화, ②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이 가능하도록 하는 자기 변화 노력, ③ 행정 권력 일반에 대한 비판·견제·개입 시도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어 전남대 ‘5·18연구소’에 있는 김희송은 “광주지역 시민사회운동의 현황과 과제: 성찰적 연대와 혁신의 모색”이라는 글에서 최근 6·4지방선거를 위해 출범했던 연대조직들이 돌연 해단한 사건에서 광주지역운동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광주연대’와 ‘진보교육감추대위’는 각각 ‘광주광역시장선거’와 ‘광주시교육감선거’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출범한 연대체였지만 공동대응은커녕 내부 갈등으로 인해 추대조차 못하고 스스로를 해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두 연대조직체의 해단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원인을 광주지역운동의 역사 속에서 분석하고 있다.
‘진보교육감추대위’의 해단은 외면상으로 전교조출신 교육의원들 간의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간의 해묵은 긴장 관계”가 드러난 사건이며 “지역사회운동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산물이라고 본다. 반면 ‘광주연대’의 해산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시민단체 내부의 세대 갈등, 즉 사무처장급의 장년층과 대표급의 원로 그룹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는 ‘대표자와 실무자간의 갈등’ 또한 놓여 있다. 따라서 그는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지역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모색은 성찰적 연대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동원된 연대”가 아니라 “더불어 연대”를 구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사회 운동 주체들 간의 삶을 나누는 진정한 네트워크 구축 및 협력과 연대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주의 지역정치에 대해서는 ‘제주환경운동연합 정책연구원’ 문상빈이 “제주의 개발주의와 환경정치, 그리고 괸당”이라는 글에서 논하고 있다. 그는 제주라는 지역경제 단위가 질적으로 변화된 계기를 90년대 초 제정된 제주도개발특별법과 2006년 제주도의 특별자치도로의 행정체제 개편과 특별자치도지사의 개발인허가권의 대폭적인 강화에서 찾고 있다. 왜냐하면 제주도를 특별자치도로 승격시킴으로써 지방자치를 위한 도지사의 권한을 강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개발정책을 위해 복잡한 행정절차를 도지사의 권한으로 집중시켜 수직일원화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이하 JDC)’와 ‘제한적 토지수용제’, ‘토지비축제도’, ‘투자진흥지구와 감면제도’, ‘부동산 투자이민제도’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제주도의 ‘괸당’정치를 분석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제주도의 지역정치가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제주도 특유의 ‘괸당’문화 때문이다. 여섯 번이나 당적을 옮긴 우민근지사가 계속해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지연성이 강한 소지역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괸당문화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괸당문화 또는 괸당문화에 기인한 강고한 연고주의를 뛰어 넘는 ‘정치문화’와 과감한 실험”을 역설하면서 “생태와 복지연대중심의 지방자치 비전을 공유”하는 “시민사회+진보정당 진영”이 “향후 제주의 미래를 책임지고 집권을 목표로 한 강력한 정치주체를 형성”하는 “상설적인 정치연대조직”을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창언은 “개혁적 시민사회와 제4의 선택: 로컬 매니페스토 운동의 현황과 과제”이라는 글에서 2006년 5·31지방선거에서 처음 등장한 한국의 매니페스토운동에 대한 총론적인 평가와 방향을 다루고 있다. 그가 보기에 매니페스토운동이란 기본적으로 민주화, 세계화와 정보화 및 분권화, NGO의 ‘거버넌스’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네거티브적 방식의 사회운동을 지양하고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정치”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매니페스토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진단하면서 현재 한국의 매니페스토운동이 도달한 지점을 ‘제4의 선택’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제1의 선택’이란 “공정한 감시자 입장으로서의 선택: 공명선거감시운동”이며 ‘제2의 선택’이란 “감시를 넘어선 적극적 비판의 선택: 낙천·낙선운동”이다. 또한, ‘제3의 선택’이란 “후보에 대한 선호의 표현: 지지·당선운동”이며, ‘제4의 선택’은 “정당화·정치세력화: 시민정당화운동, 정보제공·생활정치 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형 매니페스토운동의 특징을 ①인물과 정책경쟁을 동시에 제안하며 ②연대 기구 및 기성정당에 대한 적극적 지원방식을 취하며 ③계몽적 홍보방식에서 벗어나 시민소통공간을 제공하는 역할로서의 변화를 꾀하며 ④지속적 정치참여운동으로 대국민 정치참여의 시너지를 견인하려 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그는 로컬 매니페스토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를 위한 “매니페스토 시스템의 정상적 작동”과 “시민참여와 매니페스토의 제도화”를 제안하고 있다.
‘발언대’에서는 7년이 넘게 국가와 한전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을 다루고 있다. ‘리슨투더시티 디렉터’이자 ‘수유너머N 회원’인 박은선은 옴니버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들>과 밀양구술프로젝트로 진행된 "밀양을 살다"를 통해 밀양 투쟁 당사자들의 삶 속에서 우리가 사유해야 할 지점을, ‘반가운 손님’이라는 위치 설정 속에서 발견해가고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이념이나 전사라는 이미지 속에서 신비화된 ‘할매’들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은 “고향 상실의 시대에 우리의 삶과 장소의 영속성에 대한 질문”이며 “우리가 겪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를 자리매김해야 할 의무”이다.
이번 ‘정세’란에는 두 편의 글이 실렸다. 우선, 윤현식은 2013년 말의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 돌풍과 철도파업, 그리고 최근 세월호 참사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들을 다루면서 진보정치의 위기와 난맥상을 다루고 있다. 그가 보기에 ‘안철수현상’은 “탈정치의 정치화”이다. 이것은 비단 안철수라는 개인을 통해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주영, 문국현 등의 현상에서 보듯이 “기성정치와의 차별성”이라는, 기성정치에 대한 대중적 환멸이 ‘탈정치화’로 전화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진보정치의 토양인 대중적 환멸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의제나 기획들로 전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치이다. 이에 그는 “지역정치”와 “노동(계급)정치”의 결합 및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할 것이냐’와 같은 정치적 결단에 근거한 “좋은 정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창준은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뒤이어 한때 정국을 주도했던 ‘통일준비위원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애초 4월에 출범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통일준비위원회는 출범은 고사하고 언제 출범할 것인지도 기약이 없는 상태이다. 이에 필자는 통일준비위원회의 지체 및 좌초의 원인을 지난 3월 23일 있었던 ‘드레스덴선언’이 보여주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태도와 그 후 형성된 남북의 첨예한 상호비방전의 양상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따라서 그는 “통일대박론과 통미통남론이 만날 기회의 창”을 열기 위해서 “2·14 합의 정신을 다시 살리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란에서는 미국 발 국제 금융 위기 이후 이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 5년 동안 지속된 미 연준의 양적완화정책이 신흥국 금융시장에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본지의 해외편집위원이자 라이트 주립대학 경제학과 조교수인 신희영은 “미 연준의 자산 매입 축소와 신흥국의 금융시장 불안,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에서 미국의 새로운 통화정책이 2014년 하반기에 신흥국의 부채 및 외환위기를 낳을지 여부를 다루고 있다. 현재 이를 판가름할 수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서구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우회적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위험성을 경고하면서도 전면적인 금융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루비니를 비판하고 라잔의 “국제적 정책공조”와 로드릭의 “자본 유출입 통제” 등을 소개하면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일반논문’으로는 김민정의 “‘기후변화’에 관한 쟁점들”이 실렸다. 오늘날 녹색조차 상품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기후변화를 둘러싼 3가지 주요 논점들을 다루면서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과 운동의 조직화를 제안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① ‘기후회의론과 지구 종말론’은 “기후변화가 자연현상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② ‘온실가스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그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은 “기업의 책임을 회피하고 지구인 모두에게로”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본다. 또한, ③ ‘기후변화법 제정 운동’은 기득권에 대한 도전 없이 “정치와 계급, 계층을 초월해서 ‘지구인’이라는 관점에서 기후변화의 해결책을 마련”하려 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필자는 현재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규제완화 및 녹색의 상품화정책을 비판하면서 “진보 사회운동은 과다 배출업계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집단적 사회운동을 조직하여 실질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경제학비판’을 연재하고 있는 김정주는 네 번째 글로, “캔커피의 진정한 가격은 얼마인가?: 내재적 가치와 경제적 거품”을 써주었다. 그는 이 글에서 매장에 따라 캔 커피 가격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수요-공급’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특히, 그는 “생산자 비용에 기초해서 상품의 내재적 가치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오랜 전통임에도 현대 경제학의 ‘수요-공급이론’은 이런 ‘상품의 내재적 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비정상적인 시장가격’을 형성하고 ‘거품경제’를 향해 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경제적 거품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것이 붕괴하면서 왜 경제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려면……상품의 내재적 가치, 따라서 상품의 정당한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소수자 이야기’란에는 병영적 군사문화와 낡은 전통적 도덕의 잣대 속에서 은폐되고 있는 군대내 동성애 문제를 “군대와 동성애: 로맨스, 폭력, 범죄화, 그리고 시민권”이라는 제하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및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서 한가람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겪은 체험을 기반으로 쓰고 있기에 생생한 현장성과 성소수자의 시민권에 대한 분석이 돋보인다. 특히, 그는 남성중심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에 근거한 “동성애공포/혐오”를 동반하는 “남성집단으로서의 군대” 안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전략들을 소개하는 한편 이것이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군대 바깥에서 동성애자들이 겪는 삶이” “반복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군형법상 ‘추행’죄”를 중심으로,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논리가 궁극적으로 “성이 위험하다”는 “성에 대한 통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읽기’란에서는 오늘날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하여 공동체운동들이 주목하고 있는 증여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성찰을 제공하는, 반가운 글이 실렸다. 컬럼비아대에서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승철은 “"증여론"과 "세계사의 구조": 순수증여의 존재론”라는 글에서 너무나 유명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비교·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모스의 "증여론"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변화된 현실 속에서 재구성하고 있는 "세계사의 구조"를 공통점만이 아니라 차이점까지 매우 쉽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증여론"의 한계로, “신성한 사회와 순수증여의 불가능성”,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불가능성”의 사유에 대한 봉쇄 및 “자유주의 정치”로의 퇴행을 지적하면서 순수증여의 차원으로 교환양식 X를 제시하는 가라타니의 사유의 진전된 지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가라타니 또한 “순수증여를 성급히 독립적 교환양식으로 ‘실체화’하면서,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한 탈정치적 분석으로 귀결되고 만다.” 따라서 그는 “사회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사회가 적대로 분열되는 지점, 즉 사회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사유하기 위한 반복적 시도”로, 이 두 저작을 읽어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끝으로,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팀장인 김동원은 “비판과 운동의 맑스주의 형성사”라는 관점에서 "탈정치의 정치학"에 대한 서평을 써주었다. 이 서평은 다양한 저자들의 논문을 엮은 이 책의 공통기반인 “부르주아적 범주들의 전 체계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라는 목적에 맞춰 독해하면서 그들이 제기하는 구조주의와 자율주의에 대한 논쟁점들을 드러내고 또 이 논쟁점들에 대한 자신의 읽기를 덧붙임으로써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읽기를 위한 안내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주옥같은 글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여담 같지만 이번호 진보평론은 여러모로 힘들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글을 쓰는 필자들도 지쳐있는 듯하다. ‘세월호참사’가 불러온 충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월호참사’에 대해 무얼 쓴다는 것은 아직도 버거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정한 대상 및 사태에 대한 분노와 공감 같은 정서적 연대에서 출발하면서도 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포함하여 사태 자체를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는 행위를 전제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이 너무나 어렵다. 변명인지 모르지만 이번호 진보평론에 ‘세월호참사’에 관한 글이 없고 ‘페미니즘 고전 읽기’란에 글을 게재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은 아닐까 싶다. 미비한 점들에 대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함과 동시에 다음 호에서는 ‘세월호참사’를 특집기획으로 다룰 것이라는 점도 밝혀 드리며 진보평론을 사랑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질책과 격려, 참여를 부탁드린다. 
2015. 6. 5.
편집위원장 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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