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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글
 
 
‘종북’이라는 기표가 생산하는 증오의 정치학
작성일 : 15-03-20 15:41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448  

현재 한국사회에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의미를 규정할 수 없지만 누군가를 단죄하고 사람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하나의 기표가 존재한다. 그것은 ‘종북’이라는 기표이다. ‘종북’은 말 그대로 ‘북을 따르거나 추종하는 자들 또는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매우 모호하다. 이 사회에 북을 추종하거나 따르는 자들 또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종북’이라는 기표가 특정한 정파 또는 당파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다른 모든 사람과 집단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지 않으며 오로지 ‘규정’될 뿐이다.
2012년 대선에서 ‘종북’은 심지어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처럼 대한민국의 국가수반을 지냈으며 지배 권력의 정점에 섰던 사람조차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체제가 북의 적화혁명 노선에 따라 헌법을 비롯한 체제에 변화가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한 사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들은 여전히 남보다 북의 국가에 복무하는 ‘종북’이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체제를 전복하고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민국’을 가져다 바치고자 하는 ‘위험스런’ 자들로 규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의미의 연속적 생산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 무엇보다도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종북’이 생산하는 ‘의미’가,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지시 기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표 그 자체가 연쇄적으로 발생시키는 정치적 효과에 의해 생산된다는 점이다. 김대중, 노무현이 실제로 ‘종북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한국사회에서 특정한 정치계열, 해방 이후 권력을 독점해 온 당파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종북’은 이들에 대한 단죄와 협박의 기표이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에 존재하는 특정한 정파 또는 당파, 예를 들어 새누리당, 심지어 뉴라이트계열을 제외한 모든 개인과 집단들은 ‘종북’이 된다.
여기에 ‘종북’이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위험’,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자신을 일체화하면서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으며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종북이라는 기표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은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가진 ‘이즘(ism)’이 아니라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면서 그들의 분노를 공격으로 전화시키는 ‘동원적 이데올로기(mobilizing ideology)’일 뿐이다.
‘종북’이라는 기표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동원’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종북’이라는 기표는 ‘북’을 환기시킴으로써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면서 대중의 분노를 이들에 대한 ‘공격’적 에너지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기에 ‘인종’이라는 ‘누빔점(quilting point)’을 중심으로 파시즘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듯이 ‘반북’이라는 ‘누빔점’을 중심으로 타자에 대한 공격을 생산하면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과 다른 하나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이 케빈 패스모어에 의해 “이것도 반대, 저것도 반대”라는 부정적 이데올로기로만 묘사될 수 있다면 ‘종북’은 “오직 이것”이라는 도그마(Dogma) 형식으로만 묘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북’이라는 기표든 파시즘이든 그것이 작동하는 토양은 동일하다. 그것은 대중적 분노이다. 하지만 이들이 작동하는 토양인 대중의 분노는 조작된 것이거나 허구는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사회-역사적 토대가 있으며 객관적으로 주어진 그들의 삶에 근거한다. 현실은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며 그들의 분노는 그들을 행동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그런 분노를 권력의 자양분으로 삼을 뿐이다. 권력은 사람들의 집단화와 그런 집단의 행위가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지배자들은 그들의 분노의 에너지를 자신의 권력으로 흡수하고자 한다.
이미 스피노자는, 폭군은 항상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슬픈 영혼들이 상납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폭군을 필요로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폭군은 성공하기 위해서 영혼들의 슬픔을 필요로 한다. 어쨌든 이들을 통일시키는 것은 삶에 대한 증오이며 삶에 대한 원한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증오와 원한을 부추기는 정치학은 분단체제의 적대성을 통해서 작동되어 왔다. 과거의 증오의 정치학은 ‘6·25=북’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키면서 남북의 냉전적 대결을 부추기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가주의 생산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지금의 ‘종북’이라는 기표가 생산하는 증오의 정치학은 ‘북’이라는 공포의 대상에 대한 환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2014년 12월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아이러니한 네 번의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2월 10일 오후 전북 익산시 신동성당에서 열린 신은미·황선 토크 콘서트장에서 벌어진 18살 고등학생에 의한 황산 테러 사건이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9일 후인 12월 19일 이루어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며 세 번째는 올 1월 22일에 이루어진 이석기 내란음모 공판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이다. 네 번째는 3월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 대한 신체적 위해라는 테러 사건이다.
현재 이들 4가지의 사건들은 ‘종북’이라는 기표사슬을 통해서 ‘대한민국 국가주의’를 강화하고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건을 시간의 연속적 계열로부터 떼어놓고 본다면 그 결과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첫째와 넷째 사건은 동일하게 ‘타자에 대한 신체적 위협과 폭력’이라는 ‘테러’적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은 아예 다르다. 첫 번째 사건에서 황산테러의 주범은 근본적으로 위험한 인물이 아닌, 심지어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간주됐고, 한국의 검찰과 경찰, 언론은 테러를 당한 신은미와 황선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갔다. 반면 네 번째 사건의 주범은 참작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악이자 무조건적인 단죄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과 통합진보당 소속의 국회의원 5명에 대한 의원직 박탈 결정은,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열린 ‘이석기 내란음모’ 최종심에서의 대법원 판결과 모순적이다. 대법원은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명분으로 제시한 ‘RO의 실체’와 ‘내란음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최고 법률기관인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기 모순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종북 프레임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충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종북’이라는 기표 자체가 생산하는 프레임 안에서 이미 단죄한 이후, 그들의 유․무죄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진보평론 63호는 특집 기획 대신에 <긴급진단> 코너를 마련했다.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제목 하에 대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과 관련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한 편의 논문을 실었다. “통합진보당 문제와 한반도 모순”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대담에서 이영채는 통합진보당을 둘러싼 최근의 사건들을 한국내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사 및 국제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통합진보당의 문제를 한국의 진보운동에 대한 내적 성찰의 계기로 삼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번 통진당 사태는 한국전쟁 이후, 그리고 탈냉전시대를 맞아 잊혀진 폭력혁명이라는 방식이 아직도 유지된다는 점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검증의 필요성을 일깨워준 사건”이자 “분단체제 속의 모순, 아시아 반공주의, 북한의 이미지, 공론화하지 못했던 폭력혁명론의 모순 등이 중첩된 동아시아에서의 21세기 버전의 혁명운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이를 진단하기 위해 동아시아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는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각국의 공통의 리버럴 세력들이 실패를 했고, 공통의 보수주의 세력이 전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후 진행된 민주화가 ‘국가폭력’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며 “2000년 중반부터 영토문제와 역사 문제가 동시에 등장”한 것은 “전후 60년 간 동아시아 국가들이 국가주의와 내셔널리즘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동아시아의 각국의 노동자들이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을 벗어나 “동아시아의 연대”의 방안을 모색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간략하게 소묘될 수 없다. 이 대담은 통합진보당 문제를 동아시아라는 국제적 차원에서 역사와 현재를 논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6·25전쟁과 천안함 침몰 사건 등과 관련된 흥미로우면서도 다시 음미해야 할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긴급진단>에는 홍철기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과 민주 헌법의 이론”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앞의 대담이 동아시아라는 국제적 차원에서 통합진보당 문제를 다룬다면 홍철기의 논문은 통합진보당의 해산 판결과 관련하여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또한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과 관련된 제반의 논의들이 현재의 법적 체계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면 이 논문은 헌법과 민주주의 관계 속에서 민주 정치를 사유하고 있기에 이전의 논의들과 그 질을 달리하고 있다. 수도 이전에 관한 헌법재판소 위헌 소송 이후 한국에서 현재 헌법재판소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 된 것처럼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근거하여 주어진 사안이 헌법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보면, 헌법은 ‘성경’이 되며 헌법재판소는 그런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목사와 신부처럼 ‘사도’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정치’는 ‘종교’적인 사법적 판단에 의해 실종될 수밖에 없다. 홍철기는 바로 이 점에 착목하고 있으며, “민주 정치의 본질은 헌법과 민주주의 사이에 완전한 일치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갈등과 불일치를 전제로 하는 관계인 동시에 이 간극과 틈에 가교를 놓는 매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정치 대신에 법치를 강조하는 수사와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비판하고 “안과 바깥의 ‘구별불가능성(indistinction)’이라는 모순, 혹은 내부와 외부 중 어느 한쪽만을 택할 수 없는 아포리아”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헌법의 초시간적이고 초월적인 본질로 성역화시키지 않고, 좀 더 내재화되고 상대화된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그 ‘아포리아’가 제공하는 긴장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이런 아포리아 속에서 전개되는 투쟁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지배 권력은 참사 이후 지속적으로 진실을 덮으려고 했다. 따라서 그 진실은 지배자들의 짐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의 무게를 지고 그들과 투쟁하는 자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시평에서는 이들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류의 글, “특별법 이후, 4·16 운동으로 다시 한걸음”은 2014년 11월 7일 제정된 ‘4·16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이후 진행되고 있는 투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싸움은 어렵고 버겁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진보평론 또한 ‘진실규명’, ‘안전한 사회건설’, ‘세월호 관련자 치유 대책 프로그램’이 마련될 때까지 독자들과 더불어 세월호 투쟁에 함께 할 것이다.
발언대에서는 이번에 기획된 <긴급진단>에 맞추어 ‘종북몰이’에 의해 이미 발언권을 상실해 버린 것처럼 매장되어 가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 통합진보당 당직자는 “통합진보당 해산 이유와 교훈: 싸워야 할 때 싸워야 진보정치이다”에서 헌법재판소 판결의 부당함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정당해산판결은 일부 당원의 행위를 진보정당 구성원 전체에 확대 적용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로, 통합진보당의 통일방안은 내용상 연방제보다 연합제에 가깝지만 ‘연방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체제통합 지향적 시각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북의 통일론과 다르다. 셋째, 통합진보당이 북한 핵무기폐기보다 대북적대정책 철회에 초점을 둔 것은 그것이 핵무기 폐기의 결정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북에 동조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쟁점란에는 최근 천 삼백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는 화제의 영화, <국제시장>를 둘러싼 항간의 논쟁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면서 정신분석학적 영화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김소연의 “<국제시장>, 혹은 어떤 가족 영웅의 뭉클한 도착증에 관한 보고”가 실려 있다. 필자는 이 영화가 보수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전쟁 세대의 아름다운 희생을 칭송하는 동시에 은근슬쩍 세대 갈등을 조장한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질문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왜 노인 덕수는 자신의 꿈은 물론 몸의 일부까지도 내주었건만 가족 내에서 환대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왜 덕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 모두의 화목함 속에 덕수가 낄 자리는 없는가. 이것을 오직 싹수없는 젊은 세대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온당한가.” 따라서 독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필자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통해서 <국제시장>을 더 풍부하게 읽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정세란에서는 지난 해 12월 민주노총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직선제에 대한 평가와 신임 집행부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는 고민택의 “민주노조운동의 새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를 실었다. 민주노총의 직선제는 1998년 민주노총 2기 지도부 선거에서 이갑용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공식적으로 등장했지만 시행은 15년이 지난 2014년 12월이었다. 이 글은 직선제가 능사는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무늬만 직선제’로 만들려는 시도”나 현장의 분열을 내세우면서 “이른바 ‘통합지도부론’과 ‘정파 배제론’”을 내세웠던 논의들을 비판하고 오히려 직선제의 의미를 “정파별 차이를 공론화시켜 대중들이 선택권과 결정권을 행사하게” 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또한, 이 글은 현재 계급대표성을 상실한 민주노총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한상균 당선자가 내세운 ‘진보 다원주의’와 ‘4월 총파업투쟁’에 대한 기대와 조언을 하고 있다.
국제란에는 두 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하나는 오창룡의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둘러싼 쟁점들”이며 다른 하나는 김태언의 “분리된 팔레스타인, 독립의 길목의 장애물”이다. 두 글 모두 최근에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오창룡은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의 양자택일적인 강요가 감추고 있는 서구 유럽사회의 인종차별적 현실과 ‘증오 동원의 정치’를 드러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태언은 파타와 하마스 간의 연합정부 구상을 둘러싼 내부 분열과 이스라엘의 간섭 등의 문제를 다룬다. 아마도 독자들은 보수 언론에서 유포되는 상투적인 얘기가 아닌, 다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반논문으로는 진태원의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와 나영정의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제도화의 역설” 등 두 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진태원은, 푸코와 랑시에르, 발리바르를 주체화라는 관점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계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푸코의 논의는 “관계론적 권력론 및 통치성 개념”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푸코는 “여전히 법적 권력론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그는 “정치와 치안(police)의 구별(및 대립), 치안 질서의 중심에 존재하는 잘못(tort)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랑시에르의 주체화 개념을 통해서 이 문제를 돌파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랑시에르 또한 치안과 정치를 대립시킬 뿐 양자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시민권 사이의 이율배반적 관계”라는 발리바르의 논의를 통해서 “새로운 제도적 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발명”,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발명”을 제안하고 있다.
나영정은 2001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된 ‘성적지향’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여 ‘성전환자성별변경특별법’, ‘차별금지법’,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등에서 나타난 법 제정 운동과 쟁점들을 다루면서 한국사회에서 젠더/섹슈얼리티가 법제도 속에서 다루어진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성소수자 제도화의 조건”으로서 “남녀동수제도 논의와 양성평등 담론에 담긴 한계”, “성적 타자성이 시민권에 개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들을 다루면서 “성소수자가 차별금지법에서 차별금지사유로 나열되는 것을 넘어서 특정한 집단으로서 제도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성소수자를 둘러싼 위계와 차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젠더/섹슈얼리티가 법정책 속에서 다루어지는 방식과 소수 집단의 제도화 과정에서 드러난 역설적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타개해나가는 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소수자이야기에서는 이한숙의 “같은 바다, 다른 사람, 상처는 아문 적이 없었다”를 실었다. 글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바다-사람-상처, 곧 “노동권과 인권이 숨을 죽여야 하는 특별한 노동”을 하는 선원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다룬다. 이 글은 중국동포 선원 6명이 한국인 선원 7명, 인도네시아 선원 3명, 중국동포 선원 1명을 살해한 1996년 ‘원양어선 페스카마호 사건’, 2011년 인도네시아 선원 32명이 탈출한 ‘원양어선 사조 오양 75호 사건’, 2014년 연근해어선에서 내린 베트남 노동자들이 강제 출국된 사건 및 연근해어선 인도네시아 선원 폭행사망 사건, 그리고 최근에 있었던 ‘사조산업 원양어선 501 오룡호 사건’ 등을 다루면서 비참한 인권현실을 고발하며 시스템을 바꿀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한 세월호 대책위의 활동이 이들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세월호 대책위는 세월호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 해결과 연동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시읽기에는 영국의 사회학자인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의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 2003)”와 맑스주의 정치학자인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의 “국가, 권력, 사회주의(L'Etat, le pouvoir, le socialisme, 1978)”를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명제와 관련하여 읽고 있는, 이재욱의 “‘비정상의 정상화’를 의문시하기: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국가, 권력, 사회주의’”가 실려 있다. 이 글은 단순한 서평이 아니다. 그것은 “포스트 민주주의”가 묘사하는 현 시대의 풍경과 정치의 ‘비정상성’에 주목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크라우치와 플란차스의 논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계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국가-정치와 시장-경제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전개된 일련의 역사적 맥락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해체·형성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천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고전에서는 박영균이 게일 러빈의 “여성거래: 성 정치경제학에 관한 노트”와 “섹스 사유하기: 섹슈얼리티 정치의 급진적 이론에 관한 노트”에 대한 읽기를 시도한다. 게일 러빈이 “여성거래”에서 입론화하고 있는 섹스/젠더체계의 역사적 기원과 재생산 메커니즘을 다루면서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그런 한계의 지점에서 “섹스 사유하기”에서 제기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를 짚어간다. 그는 게일 러빈이 제기한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다원론(pluralism)”이라는 새로운 전망에 주목하면서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적녹보라의 연대 가능성을 찾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 ‘서평’란에는 이건민의 “프레카리아트의 호명과 그 이후”와 장희국의 “‘나’의 인권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들’”이라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이건민의 글은 가이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과 아마미야 가린의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에 대한 서평이며 장희국의 글은 정정훈의 “인권과 인권들”에 대한 서평이다. 이건민은 이 글에서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두 개의 책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비교분석하며 ‘프레카리아트담론’들에 대한 국내 논의를 소개하며 앞으로의 과제까지 제시하는 등 단순한 서평을 넘어서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장희국은 “급진적이고 불온한 형태로 인권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려 하”는 정정훈의 문제의식을 살리면서 “인권과 인권들이 설정하고 있는 전투영역”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인권이라 말할 때, ‘인간’을 휴머니즘 등과 구분해서 재정의하는 것, ‘인간답게 살아감’을 생존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탈취하는 것, ‘권리’를 국가장치의 외부에서부터 새롭게 사유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끝으로, 이번 진보평론 63호에도 이렇게 좋은 글을 보내주신 필자들에게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특히, 멀리 일본에서 오셔서 대담을 해주신 이영채 선생님과 대담을 녹취하여 정리해주신 김상운선생님을 비롯하여 63호가 나오기까지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오늘 이 책은 없었을 것이다. 독자들의 시야가 확 깨이고 깊이가 더해지는 기쁨을 누리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질책과 격려를 바란다. 
2015. 3. 5.
편집위원장 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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