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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글
 
 
복지의 실현, 민주적 통제와 체제전환의 상상력이 결합해야
작성일 : 11-12-09 17:15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1,222  
최근 한국정치의 최대 이슈는 ‘복지국가’다. 좌우를 넘나드는 모든 정당이 복지논쟁을 벌이고 있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진보평론》도 이러한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호 특집은 진보적 시각에서 복지논쟁을 해석하고 복지논쟁에 개입해 보았다. 물론 이번호에 실린 글들은 생각보다 이념적, 이론적 편차가 크다. 복지 그 자체가 가진 진보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 현재의 논의구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장기적으로 복지논쟁이 가질 긍정적인 효과를 인정하는 입장, 복지논쟁 그 자체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한다. 여기에 복지와 녹색가치를 결합시키려는 논쟁이 더해지면 이번호 특집은 논의를 정리하고 공통분모를 찾기보다는 차이를 더욱 부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호에 실린 글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환기하고 있는 것은 복지에 관한 논쟁구도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진보평론》의 역할은 논의의 지형을 왼쪽으로 이동시켜 생산적인 복지논쟁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특집에 실린 글들은 복지논쟁의 좌선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welfare라고 표현하든 well-being이라고 표현하든 복지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할 삶의 질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합의도, 인간다운 ‘삶의 질’의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복지’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이다. 2011년 한국의 복지논쟁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채, 복지는 이미 고정된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얼마만큼 공적으로 충족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세금은 얼마만큼 걷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제한되어 있다.
왜 그럴까? 만약 복지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필요(needs)와 욕구(wants)의 충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필요와 욕구가 있다. 개별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어린이의 필요와 욕구, 노인의 필요와 욕구, 장애인의 필요와 욕구, 여성의 필요와 욕구, 노동자의 필요와 욕구, 성소수자의 필요와 욕구 등등. 그리고 종종 이러한 필요와 욕구는 서로 겹치기도 한다. 여성이면서 성소수자이고 동시에 노동자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필요와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위로부터의 관료적 복지시혜가 아닌 민주적으로 열린 토론과 합의를 통해 계획되고 실행되는 복지정책이 요청된다.
복지와 관련된 민주주의의 문제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인정(recognition)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못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인간이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앞의 입장은 선별적 복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고 뒤의 입장은 보편적 복지론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이 보편적 복지론과 똑같지는 않다. 보편적 복지론도 아직 ‘시혜되는’ 복지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인정에 근거한 복지는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상적’ 삶을 누리는데 불편함이 없게 해 주어야 할 뿐이다. 그럴 때에 장애는 차별의 근거가 아닌 단순한 차이가 된다. ‘도움’을 받음으로써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의 정의와 관련된 또 한 가지 문제는 복지실현의 기준이 되는 필요와 욕구를 물질적인 것에 국한시키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도 필요와 욕구는 이미 주어진 화폐적 가치에 의해 판단되는 물질주의적인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심리적으로 좌절하고 불행한 현대인에게 복지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복지논쟁에서 제기되는 쟁점은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 기준을 넘어서는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먹고 살만한 중간계급의 사치 정도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물질적인 필요와 욕구만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초래되는 자원의 낭비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복지를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물질주의적인 복지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져서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성장을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경쟁과 파괴, 그리고 낭비를 반복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복지를 누리는 사회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복지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의 협동성과 상호성마저도 침식하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격차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성장을 통해 유지되는 복지란 어떤 것일까? 결국 정의와 수단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 결여된 복지, 그것도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차이를 부유한 자의 입장에서 완화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복지국가는 가난한 나라를 희생으로 한 부유한 나라의 복지에 불과하다. 복지국가를 논하는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에 있다.
악순환의 종식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산과 삶의 양식으로의 전환 없이는 어려워 보인다. 여기가 바로 녹색가치가 비판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정필의 “한국 사회 대안담론으로서의 ‘녹색복지’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이러한 복지와 녹색가치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를 다양한 녹색복지담론을 비교설명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녹색의 가치는 맹목적 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장한다. 녹색의 가치는 위로부터의 시혜로서의 복지가 아니라 민주적인 참여와 토론을 통해 결정된 복지를 주장한다. 그래서 녹색의 가치는 중앙집중화된 관료적 체제가 아니라 권력의 분권화를 제시한다. 그리고 녹색의 가치는 이러한 삶의 양식과 생산 양식의 변화만이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그래서 자연착취적인 자본주의적 문화를 전변시켜 자연과 공존하고 자연을 고려함으로써 복지(well-being)가 성취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현재 복지국가 논쟁은 세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세수의 확보는 복지의 범위와 정도와 연결되어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주은선의 “한국 복지국가 논쟁에 관한 소고”는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보수정당, 진보정당, 시민사회가 각각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복지국가 논쟁의 전면화가 가지는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노동부문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는 성장연계 또는 근로연계 복지의 한계를 우려하고 있다. 또한 복지국가가 단순히 정부의 시혜가 아니라 세력관계의 변화를 동반하는 정치적 과정의 결과이며 이 과정에서 노동정치가 여전히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당의 좌선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박근혜, 민주당의 복지론이 지닌 시장의존적 한계는 귀담아 들어야 지적이다.
홍헌호의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한 복지논쟁의 주요 쟁점들”은 복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홍헌호는 복지를 낭비적이며 투자를 저하시키는 포퓰리즘이라고 말하는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해 반론을 제기한다. 유럽 국가들의 과잉복지가 현재의 경제위기를 불러왔다는 주장도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 타당성이 낮다고 판명된” 토건사업을 강행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 아닌가 라며 보수적 담론은 비웃는다. 그리고 실제로 토건사업이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투자를 촉진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교육·보건·복지 부문의 투자가 경제성장에 더 크게 기여했음을 증명한다. 주은선이 정당과 시민사회의 입장을 비교검토하면서 계급관계의 변화와 복지정치의 주체를 강조했다면, 홍헌호는 복지에 대한 보수적 담론을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그들’의 논리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지만 홍헌호의 입장은 제갈현숙의 입장과 날카롭게 대립할 수 있다. 제갈현숙의 “복지의 색깔은 무엇인가?”는 “복지는 자본주의 국가를 중립적으로 보이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제갈현숙은 현재 복지논쟁이 선거정치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통합으로 쏠리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이 정권교체만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제갈현숙의 글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할 것은 복지담론이 전면화된 사회·구조적 조건을 분석하는 부분인데, 노동의 약화에 의해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시민으로 개별화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중산층마저도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불안정한 삶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조건은 노동자계급과 중간층 모두 복지에 대한 강한 욕구를 표현하게 한다는 분석은 앞으로 좌파적 전략구성에서 좀 더 깊게 생각해야할 대목이다.

현 체제 아래에서 복지국가를 유지할 정도의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급진적으로 누진적인 조세제도가 요청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은 누진적 조세제도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연대의 문화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며 그것을 떠받칠 수 있는 경제적 성장이 지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우리의 정치인들은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속적인 성장은 시장경제를 통한 물질주의적 성장일 뿐인데, 한국이 처한 세계체제의 위치에서 분배정의가 실현되는 복지국가를 도입하는 것은 곧 성장의 동력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에는 일종의 모순이 있다. 복지국가를 지탱할 누진적 조세제도는 세대 간, 계급 간 연대에 기초해야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는 그나마 존재하던 연대성을 밑동부터 잘라 없애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과 정당들이 이러한 딜레마와 모순을 자각조차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낡은 생각의 뿌리에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이분법이 있다. ‘그들’에게 시장은 경제성장의 동력이다. 그래서 경제성장 없이는 복지도 없다. 그런데 시장경제에 동반되는 불가피한 부정적 효과가 있다. 빈부격차의 확대나 빈곤의 심화가 그런 부정적 효과일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이에 개입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시장이 인간 복지의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은 독점적이다. 시장은 이윤이 되는 경우에만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윤을 넘어선 필요와 욕구 충족을 제공해야만 하는 국가는 어떨까?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획일화하고 관료적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시장의 영역으로 떠넘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장하는 복지는 이러한 시장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영역에도 국가의 영역에도 민주주의는 없다. 화폐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 복지의 실현은 누가 얼마만큼의 세금을 내는가의 문제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에는 세금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만큼 민주적인 통제 아래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러한 민주적인 통제가 어떻게 체제전환의 상상력과 결합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세대 간, 사회세력 간 연대성이 확장되고, 국가에 의한 공적인 복지제공이 국가권력의 확대와 강화로 귀결되지 않고 시장의 작동을 보조하는 것으로 되지 않아야 한다. 보통 사람들의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능력(capabilities)을 고양시키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다양한 결사를 통해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확장하는 동시에 국가제도의 급진적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시평란의 “99%의 반란”에서 남구현은 전지구적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축적 전략이 야기한 모순들에 대한 전지구적 차원의 저항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모순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할 수 있는 정치를 모색하되 전 사회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나아갈 때 전복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국제란의 “미국 경제 위기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서 신희영은 미국 사회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Occupy Wall Street)의 발생 원인을 미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과 그 거품의 붕괴에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 그리고 그 위기에 대처한다는 미명하에 미 연방정부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이 지닌 본질적인 한계라고 본다. 이 운동은 미국경제 회복, 미 정부의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조치, 심각한 미국내 소득 불평등과 빈곤율 등의 문제 해결 정도에 따라 새로운 양태로 번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본다.

발언대의 “성폭력을 딛고, 작은꽃 노동자로 피어라!”는 사내하청에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14년 동안 근무한 사업장에서 관리자들의 성폭력을 고발했다가 일방적으로 해고된, 피해자의 대리인인 권수정의 글이다. 회사는 폐업 후 회사를 신규설립하고, 가해자들은 신규설립된 사업장에 재고용되고, 원청업체인 현대자동차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양재동 현자 본사 앞은 매일 집회신고가 되어 있어, 피해자가 최후로 투쟁장소로 선택한 곳이 여성가족부이다. 여성가족부 앞에서 170여일째 복직을 호소하며 농성하고 있는 참혹한 노동현실을 고발한다.
신희철은 지난 6월 12일 화재가 발생했던 강남구 타워팰리스 건너편 포이동266번지 재건마을의 사연을 다룬다. “화재와 행정폭력에 굴하지 않고 재건한 포이동 재건마을”의 사연은 화재와 강남구청의 복구 불허, 이어진 강제철거를 통해 근 2년간 묻혀 있다가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와 강남구청의 도시빈민 강제이주로 조성된 넝마주이 마을이 30여년 간 겪어왔던 아픔, 화재 이후 주거복구 인정까지의 이야기를 재조명한다.

정세란에서 김정한은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진보정치: 10‧26 서울시장 선거의 기원과 효과”에서 안철수 및 2040세대와 나꼼수로 대변되는 ‘돌아온 정치의 시대’를 2008년 촛불시위와 2009년 노무현의 죽음에서 이어지는 하나의 계열로 파악하면서, 안철수를 ‘사람 사는 세상’의 노무현과 ‘좌파 신자유주의’의 노무현 사이의 갈등 과정에서 대중이 발견해낸 일종의 타협책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여기서 마주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동적 시민(negative citizen)으로 1987년 이후 답습된 선거 패턴으로 귀결될 소지가 크다고 본다. 이는 민주주의의 형식은 온존·강화되지만, 특권적인 엘리트들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면서 민주화를 가능케 했던 평등주의 운동이 현실의 무능으로 이어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진보정치가 새로운 정치모델을 재발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통제하거나 경제권력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일반논문 “정당 정치의 위기와 진보 정치 운동의 전망”에서 정병기는 현대 정당 정치는 국민정당화, 포괄정당화와 선거전문가정당화, 과두제화와 카르텔 정당체제화의 과정을 밟아왔고, 진보와 보수할 것 없이 득표율 제고와 기득권 유지만을 목표로 정당법과 선거법을 이용하며 제도권 안에 안주하려는 현상을 다룬다. 이 현상은 투표참여율의 하락과 네오포퓰리즘 정치의 등장 등에 의한 정당 혐오증과 정치 혐오증을 낳았다. 그러나 제도권을 혁파하려는 노력도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진보 운동의 역할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박가분은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비판적 노트”에서 오늘날 남한의 많은 급진적 지성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주된 전거로 삼아 그의 마르크스 독해를 비판하고자 시도한다. 필자는 그의 독해가 지닌 모순점들과 더불어, 그의 독해가 스스로 자처한 만큼 ‘트랜스크리틱’했는지 여부에 대해 규명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고진의 참신한 해석은 겉보기보다 실망스러운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서찬욱은 “이데올로기, 국가, 권력: 알튀세르, 그리고 푸코의 이름으로”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 개념의 임계점은 이데올로기 장치의 물질적 기반으로서 국가의 특권적 지위, AIE와 호명구조 사이의 접합 근거, 그리고 주체가 체계에 포섭되는 주체적 조건들에 대한 해명이라고 한다. 푸코는 마르크스주의를 배격하지만, ‘모든 권력은 특정한 배치로 물질화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테제를 접점으로 알튀세르와 만난다. 완전한 지배의 불가능성, 지배에 대한 저항과 투쟁, 자유의 실현을 향한 대비되는 두 사유를 돌아보고 있다.
배성인은 “91년 5월 투쟁과 기억의 정치: 단절과 연속의 변증법”에서 올해 91년 5월 투쟁 20년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5월 투쟁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와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는 죽음에 대한 심적 부담감과 학생운동에 대한 부도덕성만 기억되는 정치현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보수적 민주화로의 이행과 ‘현실사회주의’ 몰락으로 인해 그 어떠한 투쟁도 성공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조건이었다고 보면서, 5월 투쟁은 패배를 맛보았지만 97년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2008년의 촛불투쟁 그리고 최근 대중의 다양한 분노로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
“노숙인 점거공동체 ‘더불어사는집’의 형성과 변화과정”에서 윤수종은 청계천변 삼일아파트에 모여들어 살다가 정릉 다세대주택을 점거해 들어간 노숙인들의 활동을 추적한다.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진 노숙인 점거공동체의 활동 속에서 노숙인 당사자들의 역능이 과연 어느 정도 숙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탐색을 통해, 그는 소수자운동과 점거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할 쟁점들을 드러내 준다.

서평으로는 이정구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고전”(루돌프 힐퍼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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