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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유산: 계몽적 지성의 의의와 경계 긋기
민중사건의 증언: 안병무의 민중신학
탈냉전의 선지자, 문익환 통일사상의 현재성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민족의 미학화를 넘어
 
쟁점
‘진보 재편(결집)’ 논의를 보는 불편한 시선
<국제시장>, 혹은 어떤 가족 영웅의 뭉클한 도착…
교육노동운동, 성찰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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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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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둘러싼 쟁점들
분리된 팔레스타인, 독립의 길목의 장애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과 한반도에 …
2014 유럽의회 선거와 좌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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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가사노동자 노동주체와 노동성격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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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적 감성과의 사상사적 대결: 오에 겐자부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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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에서 경쟁협조주의로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
국가와 폭력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3권 서평
모든 정당을 없애야 하는 이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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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소수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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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바다, 다른 사람, 상처는 아문 적이 없었다
거지와 국가
군대와 동성애: 로맨스, 폭력, 범죄화, 그리고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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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주술(화)의 관계: 막스 베버와 발터 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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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 부수기: 페미니즘 지식이론
 
서평
프레카리아트의 호명과 그 이후
‘나’의 인권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들’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소수자들의 삶과 문학 )
비판과 운동의 맑스주의 형성사("탈정치의 정치학")
신자유주의는 미래를 수탈한다(홍석만 송명관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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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곡유인호학술상(인권과 인권들) 수상소감 및 심사…
제7회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소감문 및 심사의 변
최진석 비판: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경계와 교차로에…
24시간 사회의 이면:
홉스봄을 읽으며, 홉스봄을 추모한다
 
 
 
  편집자의 글
 
 
자본주의의 위기와 인간의 위기, 그리고 사회적 이행의 필연성
작성일 : 12-03-12 18:08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692  

자본주의 일상에 다시금 위기가 엄습했다. 미국에서 ‘작은’ 금융부실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대형 투자은행들과 수많은 기업의 파산, 급기야는 몇몇 국가의 파산으로 이어졌으며, 수많은 사람의 삶을 직장 밖 길거리로 내몰았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가 그간 인간이 자랑삼아 의지해오던 자본주의 문명의 이기들을 일순간에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을 때, 후쿠시마 원전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펄펄 끓어 넘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지옥의 아비규환에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공유했던 것은 위기감이 아니라 공포였다. 지금의 삶을 어떻게든 지속해야겠다는 위기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지속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쓰나미처럼 세계 도처에서 그간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져 있던 자본주의 일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공황과 경제위기 또한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속가능하리라 믿었던 삶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 각자는 삶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감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근본적 성찰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절망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위한 숭고한 공포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에너지 위기, 생태위기 등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영원히 지속시켜줄 수 있는 절대불변의 양식이 될 수 없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에 내재된 이러한 위기적 징후들과 모순들이 그간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왔을 뿐이다. 그간 인간의 삶이 기만적인 장식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양식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고 있고 또한 너무 깊이 포섭되어 있었기에, 자본주의 위기는 인간과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익숙해져 있던 것들과의 결별은 불가피한 고통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 우리 삶의 방식은 바뀌어야 하고 우리의 미래는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은 더 이상 이론과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필연성의 문제로 다가온다.

<진보평론> 제51호는 “자본주의 위기, 진보의 재구성에서 사회적 전환으로”란 특집주제를 통해 최근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운동 차원의 대안들을 중점적으로 고민해보려 했다. 그러나 애초 특집의 기획 단계부터 논의의 주된 대상은 경제위기라는 객관적 정세의 분석보다는 운동의 활성화와 대항 헤게모니의 창출이라는 한국사회 안의 주체적 조건을 중점적으로 검토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에도 새로운 사회적 주체를 발견하거나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운동부문의 오래된 정체현상이 대안의 설정과 모색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특집에 세 편의 논문과 전문 연구자들의 좌담을 게재하였다. 소개된 글의 내용과 주장들이 독자들의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지 다소 걱정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시도된 <진보평론>의 기획이 좌파 혹은 진보진영 내부에 가로 쳐져 있던 자폐적인 이론적 벽을 허물고 서로가 직면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정주는 “신자유주의의 파산과 세계경제 위기”에서 2008년 이후의 금융위기와 경제위기가 세계적 수준에서 전개되어 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위기의 원인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김정주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초중반부터 나타난 서구 자본주의의 장기침체와 이윤율 저하에 대응한 정책적 반작용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신자유주의 정책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정책적 모순으로 인해 애초에 지속불가능한 성장모델이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초한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의 성장은 ‘허구적 정책’에 기초한 ‘허구적 성장’으로 그것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또한 김정주는 미국의 달러 헤게모니와 경제의 대외적 조건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정책이 갖는 모순을 은폐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단순한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종전 이후 성립된 미국의 달러 헤게모니 하에 작동해온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적 위기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관점이니 만큼 앞으로 이와 관련된 보다 많은 논쟁을 기대해본다.

김윤철 또한 “사회의 ‘전환’과 새로운 주체의 ‘발견’에 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기존의 운동방식에 대한 다소 도발적이면서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김윤철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보수와 진보 간의 상호 배타적인 쟁투를 체제 안에서 ‘자기 몫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체제 그 자체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체제의 특성을 파악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고, 체제 자체의 전환보다는 인간이 처한 상태에서 사회 전환과 주체의 문제를 고민해보자고 제안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인간의 위기로 파악하면서, 이 때 인간의 위기는 그것이 무슨 이유이든 간에 주어진 틀에서 탈주를 감행, 자신을 해방시킬 줄 아는 ‘역능을 상실한 인간’의 위기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기각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계급과 동일시되는 어떤 선험적 주체가 아니며, ‘시민사회의 시민이기를 그친 시민’, ‘부르주아 사회의 계급이기를 그친 계급, 그런 계급적 체제에서 벗어난 외부자들이고, 부르주아적인 포섭의 체제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집합,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와는 다른 사회로의 지향을 가동시키려는 그런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실 이는 이미 한국사회 내에서 ‘꼬뮌주의’라 불리는 일단의 이론적 그룹에 의해 제시되었던 것이기도 한데, 인간을 특정한 목표와 의도에 따라 바꿔내고자 하는 혁명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역능’을 발견하고 회복하는 것이 주체형성 과정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이러한 관점이 대중적으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지 기대해볼 일이다.
서영표는 “사회주의, 생태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삶의 정치로부터 사회주의 정치로”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아무리 좋은 복지시스템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물질적 필요와 욕구에 기초해 있는 한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와 맹목적 성장주의를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삶의 방식 그 자체를 뛰어넘는 녹색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사고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체제로서 녹색사회주의를 제안하고 있는 셈인데, 이를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양식의 변화, 시장과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인 경제-생활 영역으로서 제3영역의 확대,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한 민주주의의 급진화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녹색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전략으로서 지역 및 지방정치와 지역에서 시도되는 다양한 공동체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 수준의 풀뿌리에 기초한 다양한 실험과 시도야말로 좌파 정치가 “구체적 정치 기획 없이 급진적 담론만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시도된 몇몇 성공적인 실험과 경험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전체 구조와 지역이 갖는 연관성이 다소 애매하기는 하다. 이 또한 앞으로 더 많은 논쟁과 논의를 기대해본다.

“자본주의 위기와 격변하는 운동, 그리고 주체를 논(論)하다”라는 제목의 대담은 지난 1월 18일 <진보평론> 사무실에서 있었다. 김정주의 사회로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인 박승호·서영표·조정환·지주형 등이 참석해 5시간이 넘는 토론을 진행했다. 지면 관계상 장시간 진행된 모든 토론 내용을 소개할 수는 없었고, 토론의 흐름을 끊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축약 정리된 내용만을 소개하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토론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원인, 위기의 진행과 관련된 향후 전망, 주체에 대한 개념 정의, 주체 형성과 관련해 기존 운동 방식에 대한 평가, 경제위기에 대응한 좌파적 요구 등 굉장히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었다. 토론에서 위기를 파악하고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개념이나 인식 상의 차이가 분명했음을 확인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몇몇 주제에 대해서는 논의가 다소 겉돌면서 쟁점이 형성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분석하는 이론과 입장의 차이를 감추기보다는 드러내면서, 이를 연구자들의 육성을 통해 독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번 대담을 통해 독자들은 최근의 변화하는 정세에 대해 연구자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비교적 일목묘연하게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대담에 참석해준 네 분의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국제정세를 다루고 있는 문이얼의 “페르시아(아라비아) 만에서의 미국과 이란 간의 긴장고조: 국제 통화 패권의 숨은 전장”이란 글은 핵무기를 둘러싸고 최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이란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이란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 이스라엘과 유럽 전역을 겨냥할 수 있는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갖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일 수 있지만, 미국이 이란을 비롯한 중동 전역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석유시장을 매개한 통화패권의 유지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글은, 그간 중동문제를 깊이 들여다본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지적하기 어려운 문제로서 최근의 이란사태는 물론 최근의 중동정세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독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일반논문으로 실린 신희영의 “미국 경제위기와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그리고 미국 경제학계의 동향”은 경제학의 역사에 해당하는 매우 복잡한 이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의 문제점과 현실의 경제위기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에도 대학은 물론 세계 경제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경제학으로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왜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문제들을 분석하고 예견하는데 그 동안 줄곧 실패해왔는지 궁금했던 독자들에게 반드시 일독해볼 것을 권한다.

논의의 차원은 다르지만 특집의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의 위기를 두 번째 일반논문인 이성민의 “맑스의 ‘미학’”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성민이 주장하는 부르주아적 숭고함이란 결국 화폐의 힘을 통해 추함을 추하지 않게 하는 논리인 것이다. 김윤철과 서영표가 지적했던 소비주의 문화, 김정주가 분석했던 금융자본에 기댄 자본주의 체제는 곧 우리의 미학적 감각마저도 화폐라는 단일 기준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성민이 맑스의 미학을 다시 끌어들이는 이유는 이러한 부르주아적 미적 기준을 비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앞의 서영표의 글은 부분적으로 농업문제, 유기농, 식품안전성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정세란에 실린 장경호의 “먹거리 위기, 패러다임의 전환은 필수적이다”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지역, 생태, 민주주의의 과제, 그리고 그것을 통한 거대자본에의 저항이 두 글의 공통주장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반논문으로 게재된 윤수종의 “8.15 이후 농민운동의 전개과정”을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특히 윤수종 논문 마지막 부분은 유기농업, 생활협동조합운동, 농촌마을공동체운동을 농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는바 앞의 글들, 특히 장경호의 글과 공감하는 바가 커 보인다.

마지막 네 번째 일반논문은 윤삼호의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이다. 이 글은 한국 장애운동을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로 구분해 살펴보고 있다. 윤삼호에 따르면 전자는 장애운동을 민중운동의 한 갈래로, 후자는 장애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개입에 저항하며 장애운동의 이론·실천·조직을 장애인 스스로 판단·결정·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애운동의 역사는 이 두 입장 사이에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저자는 이제는 양자 모두의 강점과 한계를 논하고 대립을 넘어선 종합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세글로 재능투쟁 1500여일을 맞아 엄진령은 “시선은 처음의 그 곳에 두자. 그것이 방향을 밝히는 등불이다: 재능교사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본 특수고용 노동권 투쟁의 의미와 과제”에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과정에서 등장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경계에 있다고 말하는 특고노동자들은 노동권을 박탈당한 노동자일 뿐이고 재능노동자들의 투쟁요구인 원직복직과 단체협약 체결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에 맞선 노동진영의 정공법임을 강조한다.

“희망버스에서 희망발걸음까지”에서 임천용은 작년 한해 뜨겁게 달구었던 희망버스에 대해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 요구와 국회권고안을 둘러싼 개량투쟁과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을 소개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요구는 정치권에 기대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투쟁으로 해결할 때만이 노동자의 성과로 축적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사회는 또 다시 선거의 계절을 맞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좌파와 진보진영에게 대중과 결합할 수 있는 넓은 정치적 공간이 허락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정치 지형과 주체적 조건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를 분명히 지시해주고 있다. 운동의 방식과 정치적 기획의 변화 없이는 열려진 정치적 공간에서 대중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진보평론>이 한국사회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변화를 촉발하는 데 작지만 진지한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보평론> 제51호의 지면을 귀중한 글들로 채워주신 모든 필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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