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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선언문
 
 

결성선언문

지금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자본의 세계화는 일국적·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양극화과정을 격화시키고 있다. 자본측의 계급투쟁의 현재적 형태인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노동자, 민중의 오랜 투쟁의 성과물들을 무로 돌리려 하고 있고, 삶의 전 영역에서 비인간적·야만적인 결과들을 초래하고 있다. 중심부 나라들에서는 '복지자본주의'가 '정글자본주의'로 대체되고 '20대 80의 사회'가 고착되어 가고 있으며, 투기적 금융자본을 위시한 초국적 독점자본의 제약받지 않는 축적운동이 주변부, 반주변부 나라들의 민중의 삶과 희망을 유린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전세계적으로 분출되고 있다. 근년의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 실업자운동,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봉기, 1996-97년 한국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 등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그러나 착취와 억압에 대한 수세적 저항은 좁은 한계를 지닌다. 변혁은 착취의 모순이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결합함으로써만 일어난다. 오늘날 변혁운동의 근본적인 어려움의 하나는, 착취의 모순이 격화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대중이데올로기로 전화하여 대중을 사로잡고 대중의 반자본주의 투쟁을 추동할 변혁 이론이 부재하다는 데에 있다. 종래의 사회변혁 이론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형상으로는 더 이상 대중을 사로잡기 어렵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정세 하에서 진보적 이론진영의 근본적인 과제는 계급적대를 유일한 보편적 적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종래의 변혁 이론의 한계와 모순을 냉철히 인식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개조·발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성격과 분배에 관련된 적대, 성적 분할에 기초를 둔 갈등, 종족적 갈등과 같은 여타의 사회적 적대 내지 갈등과 계급적대와의 절합을 사고하고 이론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적대 내지 갈등의 복수성을 승인한다는 것은 해방의 정치의 다차원성을 승인한다는 것, 곧 사회적 관계들의 변혁이라는 강한 의미의 정치가 계급정치로 모두 환원되지 않음을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의 지평은 계급관계에서 지적·성별적·종족적 관계 등 다른 사회적 관계들로 확장되어야 하며, 사회적 관계들에 더하여 신체, 욕망, 성 등이 해방의 또 다른 지평으로서 사고되어야 한다. 계급적·지적·성별적·인종주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들은 신체, 욕망, 성 등을 작용지점으로 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들을 지향하는 운동들과 연대하고 교통해야 한다. 연대와 교통은 이 모든 운동들이 유효성을 지니게 되는 조건이다. 나아가 계급운동을 위시하여 이 모든 해방운동들은 인식과 실천에서 생태주의적 진전을 이루어야 한다. 어떠한 범주의 인간집단도 인류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며 심지어 절멸의 위협까지를 불러일으키는 현재의 절박한 생태적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의 이론정세, 이데올로기적 정세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면서 오늘 우리는 '{진보평론} 발간모임'을 결성한다. 세계체계 수준의 대전환기인 지금 전세계의 진보적 연구자들의 짐은 무겁다. 우리는 유효한 진보적 이론들에 대한 시대의 요청에 힘을 다하여 부응하고자 한다. 우리는 진보적인 이론적 작업이 지식인만의 일이 아니라 투쟁하는 대중의 일이기도 함을 안다. 대중들의 운동 밖에서는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이 산출될 수 없으며, 어떤 혁명적 이론도 대중운동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물질적 힘으로 전화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의 개입지점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이게 된다. 우리는 {진보평론}이 추상적인 이론적 탐구의 장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운동들의 구체적인 경과들과 경향들의 조사의 장, 운동들의 직접적 요청에 실천적으로 부응하는 장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임과 잡지가 전문적인 연구자들과 실천적인 지식인 활동가들의 결합과 교류의 장, 생산적인 분업과 협업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해방의 지평이 복수로 있다 해도 우리에게 이론의 정박지는 노동착취와 관련된 적대이다. 우리 모임 안에 이론적·정치적 입장의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넘어 계급해방의 기획에 힘을 모으고자 한다. 나아가 착취와 모든 종류의 억압, 배제에 반대하는 우리는 {진보평론}이 이론적 작업의 영역에서 계급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반제국주의운동·반인종주의운동·환경운동 등의 연대와 교통의 장이 되기를 희망하며, 외국인노동자, 동성애자, 장애인 등 다양한 소수자운동이 발언하는 장이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 대중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운동하고 있으며 투쟁의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해가고 있다. 우리는 {진보평론}의 발간이 대중들의 운동의 진전에 기여하도록, 우리의 이론적 작업이 대중운동과 결합하여 진보와 해방의 도정에서 유의미한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1999년 4월 17일

'{진보평론} 발간모임'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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