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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15 16:39
진보평론 61호(가을호) 발간 안내
 글쓴이 : 최고관…
조회 : 786  

멈춘 것은 유족들의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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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아빠의 단식이 중단되었다. 40여 일이 넘게 진행되었던 단식은 결국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중단되었다. ‘세월호 특별법제정을 위한 그의 단식이 요구했던 것은 매우 단순하고도 간명했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450만 명이 넘는 국민의 동조하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 외면에는 여당과 야당이, 행정부와 입법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장 기본적인 헌법의 정신조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권력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유민아빠의 단식으로 상징화되는 유가족들의 요구는 결코 현 국가권력의 법정신을 위배하지 않으며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권력이 기본적인 근거로 삼고 있는 법정신에 너무나 충실하며 을 보존하고자 한다. 그것은 대통령에 대해서 욕하지 말라’, ‘법을 지켜라라고 말하는 보수 언론을 비롯하여 국가권력의 수호자들의 주장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투쟁에는 기묘한 역전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수호자들을 자처하는 자들은 국가권력의 대행자들로서 그들 스스로 권력의 수임자로서 행동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행위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권력의 근거(ground)’가 되는 법을 내팽개치고 그것을 누더기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권력의 근거가 되는 법을 붙들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권력에 저항해서 광화문과 시청에서, 길거리에서 세월호 특별법제정을 요구하며 싸우는 자들이다. 그것은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과도 유사하다. 미하엘 콜하스는 단지 그의 말을 원상태로 돌려달라는 것만을 일관되게 요구했을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것을 법 보존적 폭력에서 법 제정적 폭력으로 전화되는 중요한 사례로 제시한 바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무수한 많은 미하엘 콜하스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민아빠의 생사를 넘나드는 단식은 대한민국에서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미하엘 콜하스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와 함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싸우고 있는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또 다른 미하엘 콜하스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자 하는 한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어떤 책무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불온’(?)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요구할 뿐이라는 주장이 보여주듯이 미하일 콜하스처럼 너무나도 단순한 원칙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단순하고 자명한 일관성이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권력 앞에서는 을 파괴하고 입헌질서를 훼손하는 불온한 행위로 간주된다. 그들은 말한다. ‘법을 지켜라라고.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제정을 둘러싼 투쟁에 나타난 기묘한 역전처럼 우리가 그들 주장의 진실을 보려면이 또한 역전시켜야 한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 아니라 권력이다. ‘대통령에게 욕하지 마라’, ‘대통령을 지켜라’, ‘대통령을 욕보이지 말라라는 구호들만큼 법과 권력이 일체화되어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여기서 정확히 법은 특정한 개인의 인격과 동일화되어 있으며 법의 자리는 권력자의 자리로 전치(displacement)되어 있다.

그렇다면 법정신과 법의 원칙을 고수하는 자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국가 권력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문 부호에 붙여지는 것은 대통령을 필두로 한 행정 권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입법권력사법권력전체를 포함한다. 더 나아가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각종 데마고기를 서슴지 않는 언론과, 예술과 학문의 영혼을 팔아먹는 지식-문화 권력을 포함하는 국가 권력 그 자체이다. ‘경제프레임으로의 전환을 통해 재보선에서 승리한 새누리당을 비롯한 정부여당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맞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세월호정국과 경제위기의 책임을 연결시킨다. 그리고 유민아빠를 비롯한 사람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신비방과 흑색선전을 전()방위적으로 펼치면서 사법 권력을 동원하여 길들이기에 나선다. 따라서 오늘날 세월호정국과 관련하여 본격적인 심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 권력 그 자체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번 진보평론 61호 특집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던지는 질문,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특집은 모두 6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창규의 글, "어떤 죽음을, 어떻게 슬퍼할 것인가: 세월호에 대해, 세월호로부터"는 나머지 5편의 글을 읽기 위한 길잡이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는 지금까지 진행된 세월호정국의 경과를 네 국면으로 나누고 두 가지의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국가의 정체와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 던져진, ‘국가란 무엇인가이며, 다른 하나는 기억과 망각을 둘러싼 애도의 정치와 관련하여 던져진, ‘오늘날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격과 조건은 무엇인가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이 물음을 나머지 특집 글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상기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그가 던진 마지막 질문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투쟁은 세월호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애도하는 각각이 연대하는 일, 곧 진실 규명을 위한 사회정치적인 조건 만들기란 무엇을 위한 실천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평범한 구호가 되어버린 안전한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좋다. 이 안전이란 자본이 안전한, 혹은 자본과 결탁한 권력이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 생명이 안전한 나라, 자본과 권력이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나라이다. 세월호 사고는 벌거벗은 생명들에 대한 자각이자 연대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는 않다. 지난 재보선에서부터 현()정권은 세월호정국경제위기와 경제 활성화라는 신자유주의적인 프레임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망각책임회피의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실제로 이런 프레임의 전환을 통해서 보수층을 중심으로 한 반세월호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국가란 무엇인가가 결코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정치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창룡의 "세월호 참사와 책임회피 정치: 신자유주의 국가권력의 무능 전략"과 최원의 "멈춰진 세월, 멈춰진 국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과 폭력의 새로운 형상"은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국가와 관련하여 제기하면서 그 속에서 길을 찾고 있다.

오창룡은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가주도의 위기관리방식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특수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관리 메커니즘이 존재하며, 국가의 본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흡수하고 은폐하는 특정 전략이 지속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에서 제기된 국가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국가에 대한 비판이어야 함에도 인격화된 국가기구에 대한 공격이 신자유주의국가에 대한 비판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 이후 신자유주의국가에 대한 비판도 있다. 하지만 보수일간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언론은 참사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유병언 일가와 선원들, 공직사회에 대한 공격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이것은 바로 1970년대 서구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관찰되는 “‘국가권력의 인격화현상으로, “위기와 불안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자체가 신자유주의정치의 핵심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위기국면을 돌파하는 자본주의국가의 고유한 전략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그는 권위주의국가론에 대한 풀란차스의 논의를 빌려 의회가 획득했던 대표성이 효율성이란 명분하에 행정부로 이관되고 국가권력이 행정부 최고지도자를 통해 인격화되는 경향을 통해서 감춰지는 책임회피의 정치가 신자유주의정치의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 전개되는 양상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청와대와 청와대 보호를 자처하고 나선 여당과 일부 깽판을 치면서 반인륜적 패륜을 서슴지 않는 보수일베-할배들의 모습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적대적 분열양상과 정치적 공작, 정치적 무능력은 일부 몰지각한 인격 파탄자들이나 한국정치의 기괴성에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최원의 글에서도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인재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인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다는 문제제기에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그는 미셸 푸코의 안전권력과 그것의 현대적 양상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폭력의 새로운 형상에 대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의를 빌려오고 있다. 여기서 그가 내린 결론은 세월호 참사는 어떤 특정 개인이나 관료집단(그것을 관피아라 부르든 해피아라 부르든 적폐라고 부르든 간에)의 책임방기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국가가 필연적으로 취하게 되는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국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 바로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박근혜나 새누리당만의 무능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국가 일반의 무능력을 자각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은 극단적 폭력이라는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극단적 폭력이라는 문제를 국가 해체나 폐지, 또는 아나키적 전략에서 찾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시민공존(반폭력)의 관념을 다중의 자율성이라는 관념과 화해시키려는 시도속에서 국가에 의한 인민의 교육이 아니라 정반대로 인민에 의한 국가의 교육을 받아들이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세월호특별법제정을 제안하고 있다.

최원이 말하듯이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 순간에 멈춘 것은 유족들의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간, 따라서 세월 그 자체이다. 멈춘 시간은 다시 흐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흐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전과 다른 어떤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종언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새로운 세월을 시작하라고 명령하는 그 모든 원혼들, 유령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약속할 것인가? 무엇을 맹세할 것인가?” 권창규가 던진 두 번째 질문인 애도의 정치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국가란 무엇인가와 다시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416일 이후, 140여 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그 악몽의 시간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팽목항 앞바다의 질퍽하고 혼탁한 개펄 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또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시커먼 미궁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악몽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공포를 불러오는 것은 그 침몰이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법정신의 근거를 스스로 해체하고 무능력과 무책임을 오히려 통치의 전략으로 구사하는 신자유주의국가와 동일하게 바닥(ground)’이 없다. 팽목항 앞바다의 수심은 37m에 불과했다. 그러나 145m의 길이와 24m의 폭을 가지고 있었던 세월호는 304명의 순연한 생명들과 함께 가라앉아 버렸다.

최첨단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우리는 그것이 가라앉는 동안, 앵무새처럼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 TV 화면으로 전송되는 세월호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죽음이거나 그것을 지고 살아야 하는 실존적인 죽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죽음의 문제이다. 물론 실존적인 죽음의 문제가 사회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나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삶을 공유했던 내 안에 있는, ‘너의 죽음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적인 문제이다.

실존적인 죽음의 문제가 사회적인 절차와 의례로 형식화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위해 애도의 절차를 만들고 장례의 의식을 치른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떠나는 자의 혼을 달래고 저승에서의 삶을 기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그것의 본질은 떠나는 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에게 있다. 죽은 자의 혼을 달래지만 실상은 우리 자신의 아픔을 달래는 것이고 이미 죽은 자를 다시 보내는 의례를 치르는 것은 실상 나로부터 그를 떠나보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인간은 두 번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할 때, 죽은 자는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산 죽음이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런 실존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죽음의 문제조차 세월호 추모공원 건립과 같은 것으로 정전화하고 경제위기와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논리보상 문제와 같은 돈의 논리로만 환원시키려 한다. 이것은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 국가가 취했던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했다. 따라서 애도의 문제는 실존적이거나 사회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라 극도로 첨예한 투쟁을 동반하는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은 진행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상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최소한의 진상규명조차 없는 상태에서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산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종곤의 "세월호 트라우마와 죽은 자와의 연대"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의문사에 대한 진실규명이 넓은 의미에서 애도(哀悼)라고 한다면, 이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정상은 바로 애도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한 애도가 어떤 방식으로 제한/규격화되고 있는가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보기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규격화하고 있는 것은 외상경험을 선/악의 구도로 만들어가면서 상징화하는 탈정치화라는 작동방식이다. 세월호 선원들과 유병언일가에 대한 악마화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대상 바꿔치기라는 교묘한 조작이 작동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의무, 국가에 의한 권리의 박탈과 배제, 책임등을 /악의 구도로 전치시킴으로써 정치의 영역배제하는 탈정치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문제를 실존적인 문제로 개별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멜랑콜리에 대한 분석은 이것을 보여준다. 멜랑콜리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理想)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자아의 실존적 몸부림이지만 그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자기파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멜랑꼴리 속에 애도하는 자들을 가두려는 것은 애도하는 자들을 어떠한 자격도 없고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죽은-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죽은 자는 -비존재가 되고, 살아 있는 자는 -존재가 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진행된 한국의 정당정치를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적 정세는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고민택의 "세월호 참사 후 한국사회 정치지형 변화 가능성"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룬다. 그는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세월호정국에서 나타난 양상들이 지배세력과 정권의 무책임과 무능을 덮기 위한 방편으로 유병언과 그 일가, 그리고 구원파라는 종교집단에게만 책임을뒤집어씌우는 방식으로 진행된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세월호투쟁이 지배계급을 향한 투쟁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주체 내부의 논쟁의 필요성에 주목하고 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가 찾아낸 쟁점은 세월호 참사를 참살로 선규정할 것일가 아니면 진상규명을 요구할 것인가 박근혜정권 퇴진요구를 걸 것인가 아닌가이다. 이에 대해 그는 세월호 진상규명 요구박근혜정권 퇴진요구를 분명히 하는 입장에 대해 지지를 보낸다. 그가 보기에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이윤체제 때문으로, “세월호투쟁을 반자본주의투쟁과 단 하나의 생명도 구하지 않고 몰살시킨 박근혜 정권 퇴진투쟁과 분리할 수 없으며 하나로 합체시켜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진행된 야권연대를 비판하고 박근혜 퇴진투쟁을 전면에 내세우고 한편으로는 특별법에 제약되지 않는 독자적인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투쟁을 해나가되 규제완화, 민영화반대 등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결합시키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아마도 앞의 네 편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독자들조차 이 글의 주장에 대해 이견을 표출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상처와 분노, 공감적 유대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열시키는 지배 권력과 국가장치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며 현실적으로 그것을 돌파해가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상처와 분노, 공감적 유대감이 이 땅의 현실 속에 뿌리내리고 길을 내고 찾아가는 것이 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우리의 애도를 끊임없이 멜랑콜리에 가두려는 지배 권력의 책략에 말려드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는 이견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견들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차이들이 분열과 적대가 아니라 죽은 자와의 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난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서영표의 "국가만 문제 삼는 우리들이 더 큰 문제다!"는 이 난제를 다룬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정국을 이끌어왔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40여 일 동안의 단식을 했던 유민아빠를 비롯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학생과 교사 희생자들의 유가족이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여야의 세월호법야합이 있은 이후, 세월호유가족에 대한 반인륜적 인신공격은 야수와 같은 몰골로 대한민국 곳곳에서 노골화되고 있다.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인신공격과 조롱, 비아냥. 권력의 개가 되어 버린 언론과 방송들, 교수들, 정치인들. 최소한의 공감능력도 없는 사이코패스들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서영표는 바로 이 야만적인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그는 단적으로 이 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권력의 정당성이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다소 당황스럽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덕적으로 타락한 부패집단의 기득권을 보장해주고 있는 국가와 제도에 대해 도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현실. ‘저들은 게임의 법칙을 지키지 않지만 우리는 강박적으로 그것에 집착한다. 이해는 할 수 있다. ‘저들은 자신의 법칙 위반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저항을 법치위반으로 단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쉽게 수긍되지는 않는다.”

이에 그는 소위 종속주체라고 할 수 있는 서발턴과 지배질서 사이의 공모관계를 파헤치고 경쟁과 승자독식에 중독된 사회”, 자신의 고통만을 호소하면서 정작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마비된 사회의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이것은 사이버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중지성들 또한 얕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 담론의 세계에서의 말싸움에 익숙해진,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게임의 규칙’” 안에 존재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풀란차스와 밥 제솝의 논의를 빌려 자본가 계급에게 친화적이며 자본의 재생산과 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재생산하는 기능에 주목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생산을 분석하고 국민 안 해라는 자기 부정으로부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연대의 원리를 향해 나가는 첫 걸음을 시작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특집글 이외에도 이번 진보평론에는 한국의 진보운동의 발전을 위한 너무나도 반가운 글 두 편이 실려 있다. 쟁점란은 편집위원회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꼭지이다. 한국의 진보운동에서 치열한 고민과 쟁점을 담고 있는 논쟁적인 글쓰기기가 사라진 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편집위원회는 이를 되살려내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쟁점과 논쟁을 위한 꼭지를 만들고 독자들의 투고를 기다려왔다. 그런데 이번 호에는 본격적인 논쟁을 열 수 있는 글이 실리게 되었다. 전교조의 교육운동 전체를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새로운 고민과 혁신의 방향을 담고 있는 하성환의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과 이 글에 대한 반비판인 이철호의 "전교조, 불순한 정치를 말하다: 하성환의 전교조 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적 제언을 비판하며"가 바로 그것이다.

하성환은 예산도 많고 조직도 막강한 전교조가 왜 NGO단체들보다 대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으로 시작하여 그간 전교조가 보여준 운동노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본부-지부-지회-분회로 층층이 관료화된 구조를 본부-분회로 슬림화하고 현장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과 4가지의 노선전환을 제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철호는 하성환의 글에서 전교조 운동이 순수했을 때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순수하지 못하고 정치적이어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순수함에 대한 집착을 떠올리면서 그가 제출하고 있는 네 가지 각각을 논쟁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앞으로 이 논쟁을 시작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지상 논쟁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논쟁의 포문을 열어주신 하성환선생과 이에 맞대응을 해 주신 이철호선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정세란에는 올해로 15회째를 맞이하고 있는 2014년 퀴어문화축제를 다루고 있는, 나영의 "2014년 퀴어문화축제의 경험, 성적 혐오의 조직화를 방관해서는 안 되는 이유" 등 세 편의 글을 실었다. 나영은 2014년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반인권적인 보수기독교와 뉴라이트들의 조직화된 폭력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기독교 근본주의와 선민사상을 근간으로 대한민국을 성시화(聖市化)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보수가 어버이연합 등의 보수 세력과 연대하여 어떻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든든한 물질적, 정치적 기반이 되어주고 있는지를,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복음주의 보수 기독교 집단이 성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매개로 가족가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며 미국 보수 정치권의 강력한 정치적, 재정적 지원 기반이 되었던 역사와 교차해가면서 분석하고 있다.

퀴어에서도 세월호유가족에 대해 행하는 반인륜적 범죄는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성소수자의 문제가 결코 성소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증오와 혐오를 먹고 자라나는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영오 씨의 단식에 대한 보수 진영의 비난 여론은 그가 이혼한 가정의 가장이며, ‘노동조합의 조합원이라는 사실을 공격의 주 무기로 삼는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위 정상가족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혐오와 낙인찍기,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혐오(‘노동조합=빨갱이=사회 불안 조장 세력’)를 동원하여 참사로 사랑하는 딸을 잃고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권력을 내면화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전복은 남성적인 이성애자중심주의 아비투스 그 자체를 전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 우리의 연대는 일상의 곳곳에서 촉수처럼 뿌리내린 권력에 대한 전복적 실천들과의 접속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두 편은 노동현장에 관한 글이다. 박점규의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며: 밑바닥 인생 하청기술자들의 저항"과 최병승의 "현대차비정규직, 불법파견을 둘러싼 쟁점과 해결방안"이 그것이다. 지난 628일 삼성과 노조가 단체협약을 체결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금속노조와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의 위임을 받은 경총이 단체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박점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현장이 비정규직 중심의 불안정한 일터로 바뀌는 과정에서 벌어진 지난 15년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개괄한다. 그리고 2013년 노조 설립 후 1년 동안 4명이나 목숨을 잃었고, 그 중 3명은 배고파서 못살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해야 했던 삼성전자서비스동자들의 투쟁과 그 결실인 노조 인정의 과정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한국의 거대 재벌들에 의한 폭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일상이며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포획하는 책략 또한 더 교활해지고 있다. 최병승은 이 책략에 대한 논쟁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818, 10여 년 동안 한국사회의 뜨거운 쟁점이었던 현대자동차 불법파견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로 296일간 철탑 고공농성을 했던 최병승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의 단초”, “노사 자율적인 합의의 모범의 찬사를 받은 이 합의가 선고를 앞두고 있는 근로지위확인 소 취하불법파견노동자의 정규직화 대상 축소라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현대차비정규직3지회 조합원은 8·18 합의를 거부하고, 끝까지 소송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와 함께 법원이 집단소송 선고를 빨리 내리도록 투쟁하는 한편, “모든 사내하청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위한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조건과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호 국제란에는 김강기명의 "2014 유럽의회 선거와 좌파의 대응"이 실렸다. 그는 지난 522일부터 25일까지 치러진 유럽의회선거가 유로존 경제위기와 더불어 분열로 가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통합을 지향하는 제도를 통해 치러진 선거였다며 선거 결과를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보수화와 낮은 투표율, 탈정치화이다. 그러나 우익 혹은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높은 득표율을 올렸지만 유럽 좌파의 득표 결과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일국 차원의 좌경화나, 어떤 하나의 단일한 좌파 전략으로는 유럽을 좌파적 관점에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늘날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유럽의 각 좌파운동, 그리고 코포라티즘을 넘어 노동 불안정화에 맞선 반격을 서서히 시작하고 있는 노동운동들의 다양성 속에서의 협력’”이라는, “모자이크 좌파의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진보운동, 특히 정치정당운동이 새겨서 들어야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과 함께 같이 읽으면 좋은 글이 있다. 그것은 일반논문인 손호철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한국민주주의를 생각한다"이다. 그는 오늘날 위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에 대한 발본적인 고민을 분석적으로 천착해가고 있다. 이를 위해 정치적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생산자민주주의’, ‘일상성의 민주주의라는 네 가지의 범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한국 진보의 위기를 민주진보진영의 도덕성의 상실과 무능, 오만과 독선, 그리고 북한변수와 신자유주의등으로 보고 이런 분석들을 통해서 진보의 대안적 방향으로, “노동, 생태, 평화, 페미니즘을 어우르는 --21세기적 무지개연합정당을 포함한 4가지의 방향을 제안하고 있다.

다시읽기로는 홍철기의 ""대표의 개념""선거는 민주적인가": 정치적 대표와 대의 민주주의의 미래"가 실렸다. 그가 다시 읽고 있는 글은 1967년에 발표된 미국 정치학자 한나 피트킨의 "대표의 개념"1997년에 발표된 프랑스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두 편이다. 그는 이 글들을 통해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이자 메커니즘인 대표, 혹은 대의제도대의제의 위기라는 정세 속에서 새롭게 사유하고 있다. 대표-재현(re-presentation)’은 무엇인가가 대표-재현되기 위해 부재해야 한다는 역설과 그것이 보여주는 정치적 대표의 이중성과 다면성등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일련의 대표관계와 상이한 대변자들과 대리인, 그리고 대의원들이 필요, “근본적인 형태변화”, 기존의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청중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이번 남성이 읽는 페미니즘 서평에는 조배준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실었다. "‘소수자의 리액션혹은 울프식의 뼈 있는 수다’"라는 제하의 글에서 1929년 울프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의뢰 받아 대중 강연을 위해 쓴 6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이 책을 각 장별로 읽어가면서 적당한 수위에서 페미니스트와 연대하는 하는 치사하고 이기적이며 나태한 수컷일 뿐인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러면서도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고정적인 소득자기만의 방이라는 독립된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울프의 주장에 대해서는 생활인으로서의 절실함과 가부장성이라는 가치에 담긴 억압과 지배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속성,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속성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주장하고 있다.

서평란에는 오세영의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소수자들의 삶과 문학")이 실렸다. 이 책은 성소수자·장애인·병역거부자·넝마주이 등과 같이 한국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이 직접 쓴 수기와 문학 작품의 모음집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오세영 또한 자신을 망원동 주민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 즉 소수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들을 통해서 소위 주류의 목소리에 의해 배제되고 소위 주류에 의해 써지고 있는 밝은 세상 이면에 진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는 소수자의 문학을 발견하고 있다.

끝으로 이번호에는 독자가 직접 투고한 글을 실었다. 논쟁란의 글과 더불어 이 글은 진보평론의 독자가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필자로서 함께 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소중한 의미가 있다. 이건민은 "최진석 비판: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경계와 교차로에 선 철학"에서 최근 창조 인문학의 전도사등으로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철학노트와 강연에 대해 논쟁적이면서도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철학적 주장이 명쾌함과 과감성, 신선함이라는 커다란 무기를 갖고 있음에도 명쾌함과감성의 원천이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 설정사회와 역사가 빠진 개인의 철학에 있음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열풍과 더불어 상품화의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대중적 지지와 호응, 인기를 가져오는 효과와 더불어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예민한 촉각을 동원하여 드러내고 있다.

멈춘 것은 유족들의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간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일상의 시간을 중단시켰다. 우리는 이 중단된 시간을 부여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중단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든 제도와 체제, 일상과 나 자신의 몸을 전복적으로 해체하는 사유와 실천을 시작해야 한다. 거기에 진리의 자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를 다시 봉합하고 그것을 기존의 시간들, 국가의 시간이고 자본의 시간이기도 한 일상의 시간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시도는 진리에 반하는 자들의 반동적 몸짓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진보평론은 이 시간을 부여잡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쪼록 이번호가 이런 발본적이면서도 전복적인 중단의 시간이 열어놓은 진리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그렇기에 진보평론 편집위원 일동은 진보평론에 옥고를 주신 필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필자들에게가 아니라 세월호유가족들을 필두로 하여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드리고 싶다. 이 진리의 자리를 열어주고 그것을 허락해 준 것은 바로 그 진리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세월호투쟁의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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