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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작성일 : 11-03-15 18:15
보편성과 상대성, 그리고 공동체 정의(Justice)에 관하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글쓴이 :
조회 : 2,273  

보편성과 상대성, 그리고 공동체 정의(Justice)에 관하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김건우/ 성공회대 학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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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하나의 독립된 섬은 아니요,
그 스스로가 온전한 것은 아니어라.
사람은 그 누구나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한 부분.
그 한 조각의 땅덩어리를 파도가 밀려와 씻어가면,
씻긴 만큼 유럽의 땅이 줄어듦은 곧 갑(岬)이 줄어듦이니라.
그대 친구의, 그대 자신의 농토가 줄어듦이니라.
어떤 친구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존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에서)

  1. 서론

 아담과 이브가 이성의 열매를 따먹은 후부터, 인간은 이성으로 무장한 인류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이성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구상’하는 능력과 그것을 ‘실행(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이를 통해 인간은 도구(생산수단)를 활용할 수 있었으며, 그 도구를 개량하여 생산력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또 경험을 통해 한 해 농사를 ‘구상’하고 그 구상을 ‘실행’하여 농작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술 작품을 ‘구상’하고 그 구상을 ‘실행’하여 문화와 문명을 번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수 십 세기 동안 인간 이성의 능력은 그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아갔으며, 이러한 인간만의 특수한 능력은 인간을 진화계통수의 최상층에 위치시키게까지 하였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 끊임없이 역사를 ‘진보’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를 통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 인간 이성의 발달과 진보가 전쟁, 홀로코스트, 핵무기, 환경파괴로 귀결되는 것일까? 이는 홀로코스트를 목격한 여러 학자들의 우울한 물음이었다. 특히 홀로코스트 이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여러 학자들은 이 문제를 공동체주의, 혹은 전체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동체의 문제로 돌렸다.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대중의 선택으로 결정된 공동체의 정치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고, 이는 근래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대중독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의 주장은 소련 정치체제의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맞물리며 더욱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갔다. 한마디로 그들의 주장은 하나의 공동체로 결집될수록 개인은 억압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수 십 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더욱 묘해지고 기괴해졌다. 오히려 반세기 전 석학들의 주장이 현재에는 반대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현재 공동체라는 광장은 민주주의라는 울타리를 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 공간에 사람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이를 탈정치화든, 개인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어떤 개념을 붙이든 상관없을 것 같다. 즉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비판대로 후기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거처럼 공동체가 개인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개인이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는 전복되었고, 공동체도 전복되었다. “말하자면 판이 뒤집힌 것이다.”(Bauman. 2009: 64) 바로 이 지점이 우리를 곤욕스럽게 만들고 있는 부분이다.

동물이 군집해서 사는 것과 같이 인간 또한 공동체에 속해서 살 수밖에 없다. 올곧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쓰는 모든 것은 다른 인간노동의 결과물이며, 이는 인간 사이의 강한 상호의존성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다. 이를 사회적 분업이든, 협업이든, 공동체의 연대와 사랑이든 어떻게 명명하든 상관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유는 완전한 개인으로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했을 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공리주의를 신봉하는―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보라. 신자유주의는 모든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만 환원시킬 뿐,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되어 있는 기괴한 ‘자유’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자유주의적인 공동체(주의)의 추구와 복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2. 보편성과 상대성, 그 위태로운 줄다리기

  철학의 논쟁사는 보편성과 상대성의 줄다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편적 진리, 보편적 정의는 존재하는가? 하지만 상황에 따라 진리와 정의는 상대적이지 않은가?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또한 정치철학서의 하나로써 위와 같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책이 여타 정치철학을 다룬 책과 다른 점은, 그의 책은 일관되게 공동체적 요소의 복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책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공동체의 복원’이다.

샌델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공리주의란 단순히 말하자면,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행복)’이 최고의 선(善)이라는 것이다.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는 “허구의 집단”이며, 공동체는 단순히 개인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쾌락과 불쾌를 기준으로 행복과 불행을 얻게 되므로, 개개인의 쾌락을 수치화하고 공동체 전체의 쾌락으로 합산했을 때 공동체의 쾌락이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순간이 최고의 선(善)의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거지를 보면 사람들이 동정심과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이는 전체공동체의 쾌락을 감소시키기 때문에―이들을 구빈원에 모두 집어넣어 일을 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또 범죄자들을 원형감옥에 집어넣고 이 교도소를 민간업자에게 매매하여 민간업자가 죄수들에게 하루 16시간씩 노동을 시켜 상품 생산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Sandel. 2010: 55-57).

이러한 공리주의는 자연스럽게 상대주의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의(Justice)도 도덕적?윤리적 원칙도 없고, 단지 계산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쾌락의 원칙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샌델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로마시대 때 콜로세움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무리 속에 집어넣는 오락을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인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끼며 죽임 당했지만, 공리주의의 원칙대로라면 관중들은 엄청난 쾌락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불행은 공동의 쾌락에 의해 배제된다(Sandel. 2010: 59). 이처럼 공리주의는 기괴한 상대주의로 등장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벤담의 공리주의는 전제조건부터 받아들이기 힘들다. 즉 벤담은 개인과 개인의 합이 곧 공동체라고 단언했지만, 공동체 혹은 사회라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합이 아니다. 공동체 혹은 사회는 [개인 + 개인 = 개인의 총 합 + α[alpha] → 사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주요 목적은 이 ‘α’를 탐구하는 일이다. 즉 개인과 개인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어떠한 ‘α’가 생성되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의 합으로 공동체 혹은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공동체의 특징인 문화, 전통, 관습, 법, 도덕, 규범, 언어 등이 어떻게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공동체에서 개인과 개인이 합쳐져 잔여물과 같이 생성되는 ‘α’부분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칼 맑스(Karl Marx)는 이 ‘α’를 잉여가치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 ‘α’를 무의식으로,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이 ‘α’를 신(앙)으로 간주하고 사회를 탐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개개인의 쾌락만이 전체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것이 공동체의 행복도를 산출해낸다는 벤담의 주장은, 그 전제부터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벤담의 공리주의의 오류는 개개인의 쾌락 혹은 행복을 단일단위로써 측정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는 두 가지로 분화된다. 하나는 사용가치이고, 하나는 교환가치이다. 사용가치는 그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했을 때 느끼는 효용 혹은 유용이고,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화폐가치로 환산되어 획일하게 표현되는 가치이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쾌락 혹은 행복을 교환가치의 측면에서만 다루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하나의 상황 혹은 하나의 재화에는 개개인에 따라서 사용가치가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단일단위인 쾌락으로 묶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샌델은 쾌락의 단위가 단일하다면, 콜로세움에서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그리스도인을 보는 쾌락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는 쾌락이 동일하게 뇌의 시상하부를 자극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둘이 질적으로 동일한 쾌락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반문한다. 샌델은 이와 관련해서,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콜로세움의 학살보다 ????햄릿????이 더 좋은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인간은 일정한 사회구조, 규범관계, 사회관계, 공동체 언어 속에서 일정한 행위를 하도록 구조화된다는 의미에서 올곧이 자유로운 주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칸트의 정언명령대로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르는 행위, 그 자체만이 ‘자유’일 수 있다. 즉 완전한 의미에서의 순수한 자유인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유로워지기 위한 그 반복된 행위만이 하나의 ‘자유’로써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예를 들어, ‘자유로워지기 위한’ 행위가 없는 인간을 생각해보자. 그는 단순히 구조에 순응만 하며, 동물과 같이 주어진 환경대로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을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러한 인간은 짐승 혹은 기계와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은 자유로워지기 위한 행위에 있고, 이는 인간의 ‘구상’과 ‘실행(노동)’에 의해 추구된다. 즉 인간은 주어진 상황을 변형시키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념적으로 ‘구상’하고 이를 ‘실행’하여 창작활동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사랑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구상과 실행은 아름다움 혹은 진리에 대한 탐구와 맞물리게 된다. 즉 인간은 관념적으로 ‘구상’한 것을 더욱 완벽하게 ‘실행’해내는 것을 추구하고, 바로 이를 통해 더 완벽한 아름다움, 더 완전한 선함,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구상’과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실행’에서 발생한 노동의 결과물을 통해 인간은 행복감을 느끼고,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화가는 자신이 어떻게 그림을 그릴지 ‘구상’을 한다. 그리고 ‘실행’을 통해 결과물인 그림을 얻게 될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제작한―노동의 결과물인―그림을 바라보며 어떤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낄 것이고, 바로 이것이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형이든 유형이든 인간의 제작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은 제작자의―구상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가치관이 투영 될 수밖에 없다. 즉 제작자가 대상물에 자신의―통상적인 의미로 표현하자면―‘혼’을 불어넣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노력했는지에 따라서 그것의 질적 측면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보며 제작자의 의도와 공명하고, 이를 통해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쾌락은 질적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샌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햄릿????을 위대한 예술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보다 못한 오락거리보다 ????햄릿????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급 능력을 끌어내고 더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Sandel. 2010: 82).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공리주의가 말하는 쾌락만이 인간의 행복과 운명을 결정지을 수 없다. 국내총생산(GDP)이 10배로 증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리산의 가치를, 혼이 깃든 그림을, 아름다운 시 한편을, 어떤 장소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공동체의 연대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가? 공리주의는 인간의 일부분만을 보여주는 작은 척도일 뿐이다.

우리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화되어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공리주의적인 사고가 내면화되어가고 있다.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쉽게 빠지는 오류는 비판하는 대상의 관점을 수용하여―그것의 위상을 빌려―공리주의를 재비판하는 것에 있다. 공리주의가 인류 공동체의 척도라고, 모든 것을 화폐로 환산하여 계산하는 방식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것의 위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공리주의적 관점 그것 자체에서 벗어나서―그 외부에서―그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이 하나의 진리로써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권리는 천부적인 권리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라도 생존권은 박탈당할 수 없다.’ 이러한 선언적 규정이 바로 보편성이며 진리의 등장이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공리주의 원칙에 의해 배제될 수 없는 그러한 보편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러한 보편성을 담지하고 보장하는 것은 다시 공동체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3. 후기산업자본주의 사회와 공리주의

 

전술한 바와 같이 공리주의라는 기괴한 상대주의는 경영학, 경제학, 정책입안자, 입법자, 기업, 정부 등의 형태로 현대사회 곳곳에 숨어있다. 국가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라고 종용하는 국가보안법, 국민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특정 국가의 시민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라고 간주하여 그들을 감시하고 고문하여 인권을 유린하는 인종주의적 정책, 공동체 전체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경찰만이 물리력의 배타적 독점권을 행사해야한다는 주장 등 기괴한 공리주의적 관념은 현재에도 무수히 많이 존재해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공동체 전체의 행복도 증가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빈곤층은 “전체 가구 수의 18.1%로 305만 8000가구”를 기록하였으며, “약 1000만 명의 국민이 최저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실업자 등을 포함한 숫자이다.” 또한 전체 임금노동자의 “50.2%(855만 명)”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그들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6.8%”에 불과하다.

바우만이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후기산업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보편적이고 고정적인 요소가 없이 부유하는 유동액과 같아졌다. 소위 88만원 세대라고 칭해지는 우리는 이제 단순한 잉여 노동력이자, 한 갓 비품으로 전락해버렸다(어떤 경우에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잡비’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미 쓰레기로 버려진 ‘잉여인간’들이 존재하며 또 언제라도 쓰레기로 버려질 수 있는 노동력들이 있다. 노동의 유연화, 비정규직이란 노동형태의 빅뱅은 후기산업자본주의 사회가 지극히 유동적인 사회라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들의 삶은 단순한 확정적인 요인도 없이 지극히 불안정한 삶 속에 위치되어 있다. ‘언제 내가 쓰레기로 버려질까, 언제 내가 공동체에 불필요한 인간으로 전락할까’ 이러한 신경과민적?강박적 고민은 핸드폰 문자 한통으로 해고당하는 현재 상황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유동적 현대사회는 전 사회적인 정신질환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눈앞에서 겪고 있는 상황은 곧 맞이할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시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열심히 애쓰면서―그들을 체포하고 수용소에 가두고 추방함으로써―이 유령을 쫓아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이것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똑같다. 즉 몇몇 고독한 승리자들을 제외하면 진정으로 필수불가결한 사람은 없으며, 인간은 타인에게 이용될 수 있는 동안만 타인에게 유용하며, 쓰레기통―배제된 자들의 궁극적 목적지―은 더 이상 그러한 이용 방식에는 맞지 않거나 그러한 방식으로 이용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도착지이며, 생존은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벌일 수밖에 없는 게임의 이름이며, 생존에 걸린 궁극적인 판돈은 타인보다 오래 살아남기라는 것들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Bauman. 2008: 235, 240).

 

바우만의 주장처럼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눈앞에서 겪고 있는 상황은 곧 맞이할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시연하는 것처럼”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레기들(물적, 인적)은 아직 쓰레기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계속해서 추방당하고 외곽으로 이주되고 구획화되어 통제되게 된다. 쓰레기 처리장이 그러하며, 이주노동자가 그러하며, 철거민과 난민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아직 쓰레기가 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미래의 자신이라는 ‘괴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가 지극히 불안정한 유동적 현대사회에서 ‘내가 언제 저들처럼 쓰레기로 버려질까’라는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강박적으로 자기 가치의 증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현대사회인의 모습에서 희극적으로 나타난다.

후기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리주의는 위와 같은 현상들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변명한다.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저들은 어쩔 수 없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당신은 햄버거 하나도 못 사먹는 최저임금을 받아야한다고, 원활한 기업경영과 수출을 위해 파업은 안 된다고 설득한다. 이와 같은 공리주의의 합리화를 샌델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짤막한 이야기를 빌어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은, 아이가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그들은 모두 아이가 거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들의 행복이, 도시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따뜻한 우정이, 자식들의 건강이……심지어는 풍요로운 수확과 온화한 날씨까지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끔찍한 불행에 달렸다고 생각한다……아이가 그 비참한 곳에서 나와 햇빛을 본다면,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위로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날 그 시간부터 오멜라스의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기쁨은 시들고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다.

 

지하에 갇혀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영위하는 저 소녀가 ‘그곳에’ 존재해야지만 오멜라스의 풍요와 아름다움은 지속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리주의는 공동체의 이름을 내세워 약자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한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의 목적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것은 공리주의를 설파하여 이익을 보는 자들을 위해서이다. 국가는 현재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이고, 자본가는 이윤 극대화와 자본의 자기증식을 더욱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노동력 재생산비용의 최하지점 또는 그 아래로 책정하기 위해서 혹은 노동 강도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소녀는 우리 사회에서의 농민이며, 난민이며, 철거민이며, 비정규직노동자이며, 온갖 소수자들이며 이는 곧 배제된 자들의 총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배제된 자들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라는 사실이며, 그들은 바로 계급으로 호출된다는 점이다. 언제라도 공동체에 불필요한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강박증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한 노동력 중 잉여가치를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이란 점에서, 그들은 배제된 자들에게 어떠한 동류의식 혹은 공명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 동류의식이 바로 동일한 계급으로 묶여 있다는 ‘계급의식’의 잠재지점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모든 사유를 다시 시작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필수요소인 연대와 사랑의 회복과 보편성을 담지하고 보증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주의를 재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공리주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바로 우리만의―새로운 의미의―공동체를 재구축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의 재구성은 샌델적인 공동체(주의)의 재구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샌델적인 공동체(주의)는―샌델 자신은 부정하지만―근본적인 자유주의의 한계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가지는 본원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4. 샌델의 공동체주의와 그것의 근본적 한계

 

샌델은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와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공동체주의를 주장한다. 즉 샌델은 “논란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Sandel. 2010: 362)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를 공론장에서 공동체 구성원끼리의 담화를 통해 설정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공적인 삶”이며 “새로운 정치”(Sandel. 2010: 364)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몇 가지 주제를 제시한다. 첫째로, “정의로운 사회에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면,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시민의 미덕을 키울 길을 찾아야 한다……이때의 교육이란……실용적인 교육, 그리고 경제적?종교적?인종적 배경이 다른 청소년들이 같은 사회제도 안에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익히는 시민교육을 뜻한다.”(Sandel. 2010: 364-365) 둘째로,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성향 하나는 시장과 시장 친화적 사고가 시장과는 거리가 먼 기준의 지배를 받던 전통적 삶의 영역까지 파고든다는 점이다……사회적 행위를 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에, 시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싶은 비(非)시장 규범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선(善)의 가치를 측정하는 올바른 방법을 놓고 공개 토론을 벌어야 한다.”(Sandel. 2010: 366) 셋째로, 불평등의 해소와 연대, 그리고 시민의 미덕을 기르는 방법을 고안해야한다(Sandel. 2010: 367). 넷째로, “도덕에 기초한 정치”(Sandel. 2010: 369)를 위한 방안을 탐색해야한다. 그리고 샌델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전술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는: 인용자}내 생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익숙한 정도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Sandel. 2010: 370)

지금까지는 공동체주의의 강화가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 있었다. 하지만 샌델은 바로 이 지점을 다시 회복시켜 공동체주의를 도덕정치와 결합하여, 시민들이 함께 토론하여 공동체를 위한 가치를 스스로 설정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안한다. 즉 샌델은 경제적 논리, 공리주의의 논리를 벗어나서 공동체를 위한 가치설정을 시민 스스로 논의를 통해 구성해나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샌델의 원칙적이고 기술적인 제언들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들은―그의 특수한 지위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좀 더 본질적인 윤리문제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같다.

샌델은 가언계약과 평등주의가 결합된 롤스의 ‘정의론’을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는 가상의 형태를 전제한 계약이론이며, 그 계약의 동의 자체가 공정하게 성립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혹은 그 계약의 정의로움을 판단하는 “별도의 공정성 기준”이 정의로운 기준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Sandel. 2010: 200-201)하면서 가치의 중립과 완벽한 계약을 강조하는 ‘정의론’은 “합의의 도덕적 한계……즉 어떤 경우엔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생기지”(Sandel. 2010: 203)않는다는 점을 비판한다.

하지만 샌델이 언급하는 공동체주의도 기실 롤스의 정의론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자체의 본질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의―지극히 미국적인―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토대로 하는 국가 혹은 자본주의 체제와 민중들 사이의 매개체로서 적대계급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는 매개체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매개체적 공동체는 그것이 가지는 본질적인 내적한계―헌정질서 혹은 국가?체제의 외부를 언급할 수 없다는 한계―때문에 순환논증이 되어버린다. 즉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와 자본주의 체제를 토대로 삼는 매개체적 공동체를 통해 공동체의 정의로운 가치를 설정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정의로운지는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

이처럼 정의(Justice)를 공동체 내부의 공론장을 통한 가치설정 문제로만 파악한다면 체제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는 형해화 되어버린다. 필자는 이와 같이 본질적인 문제제기 자체를 틀어막는 것이 자유주의의 숨은 의도이자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되며 롤스와 샌델의 이론 또한 이러한 기능을 적절히 수행해내고 있는 변형된 자유주의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이 지점이 샌델적인 공동체주의의 한계이다. 샌델은 문제의 지점을 공리주의적인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중심을 두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문제의 해결책은 변혁의 대상인 체제 자체의 위상에서 찾으려하고 있다. 샌델은 공리주의를 맹렬히 비판하지만, 공리주의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체제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5. 정녕, 돌파구는 없는가: 계급적인 것의 귀환

 

한 때 ‘종언’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스펙터클’하게 남발되는 종언의 종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부터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이데올로기의 종언”까지 주로 이념시대의 종언을 밝히길 좋아했다. 화려한 이념들은 종말을 고했다고 하지만, 현실은 고통스러운 시궁창일 뿐이었다. 도대체 우리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고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정의(Justice)는―흡사 이데올로기와 같이―옳고 그름의 가치척도로서 보편성을 생성하고 그것을 정당화시켜준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라는 개념 자체가 지극히 당파적?정치적인 개념이다. 즉 정의는 주관적인 가치측정의 문제로서, 대립하는 상대적 가치가 당?부당을 경합하여 보편적 가치로 전화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관철되며 그 결과로써 보편적 가치가 결정된다. “힘이 곧 정의다”라는 언급은 허투루 나온 주장이 아닌 것이다.

정의를 공동체의 문제로 끌어들여왔을 때, 정의는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의 문제와 결부되며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고 경합적인 지점은 인간의 생리적욕구(물적조건)나 자아실현욕구와 같은 인간의 욕구충족 부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피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정의로운 공동체의 조건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일정수준 이상의 물적조건을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을 토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삶의 대부분을 소모시키는―소외된 노동이란 족쇄에서 벗어나 여러 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경합적인 부분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한 줌의 자본가 집단이 다수의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 중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의 자기증식 과정을 지속해야지만 존속될 수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적대계급관계는 노동자 계급의 총 임금(물적조건)과 총 노동시간(자아실현 기회의 감소원인)의 결정에 관한 치열한 경합이 이루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는 노동시간의 증대를 통한 절대적 잉여가치의 획득과 소비재 부문의 사회적 생산력 증가를 통한 노동력재생산비용(필요노동; 임금)의 감소 혹은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획득을 추구 한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임금을 일정한도에 고정 혹은 하락시키면서 총 노동시간은 유지 혹은 증대시키게 되며, 결국 노동자 계급의 상대적 빈곤을 증대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대계급간의 경합(투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피지배계급은 공동체 정의(Justice)를 재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실재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정의(Justice)를 재규정해야한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존립조건인 자본의 자기 증식은 오직 노동력의 잉여가치 부분만으로 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한 줌의 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다수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해야지만 유지될 수 있고, 노동자 계급의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비용 내외에서만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임금은 자본으로 전화될 수 없으며,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활 수단을 획득하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소외된 노동만 하다가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정치적)선언이 있어야한다. 바로 이것이 정의의 등장인 것이다.

전술한 것과 같이 정의는 가치척도의 문제로써 당파적?정치적이기 때문에 한 쪽에 치우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이며, 보편성의 좌표축을 움직이는 투쟁과 같다. 즉 그것은 정의를 선포 혹은 선언하는 행위와 같다. ????공산당 선언????과 같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만의 보편성, 그리고 우리만의 공동체 정의(Justice)에 대한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국가?체제 내부에 대한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이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샌델의 내부에서 내부로의, 매개체적 공동체주의를 넘어서서―항상 국가?체제의 외부를 추구해야하며, 외부에서 내부로의 긴급한 진입을 생각하고 시도해야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공동체 정의를 ‘우리만의 공동체 정의’로―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누빔점(point de capiton)이라고 표현한―“좌표축 자체를 변화시키는 개입”(?i?ek. 2008: 255)에는 여러 형태의 집단적 혹은 공동체적인 ‘힘(폭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다시 ‘계급적인 것의 귀환’을 이야기하고 싶다. 특히 전술했듯이 유동적 현대사회는 모든 노동자들이 언제 자신이 ‘잉여인간’으로 전락할 지에 대해 항상 강박적인 걱정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이다. 그래서 필자 또한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보면서 우울하고 불편하고 답답한 느낌을 갖는 것이며, 유동적 현대사회의 노동자들이 ‘잉여인간’, ‘인간쓰레기’로 전락한 사람을 보면서 어떠한 두려움과 미움의 양가적 감정을 갖는 것이다. 즉 ‘그것은 나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두려우며 밉다(제발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것만큼 후기산업자본주의 사회가 사실 ‘계급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즉 ‘당신과 저의 운명은 같은 궤도에 존재한다.’ 그 공명심의 순간이야말로 계급이 호출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샌델의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혹은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넘어서―새롭게 복원되어야 할 공동체(주의)의 구성원은 곧 배제된 자들이며,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이며, 그리고 그들은 곧 나이며, 너이고, 우리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계급’으로 호명된다.

우리가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북유럽 복지국가가 어떤 면에선 개인에 대한 개입이 상당히 강력한 국가(공동체)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국가가 샌델의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국가?체제 자체의 가치설정을 민중을 향하도록 변동하고 그것을 보편적 가치로써 보존하는 공동선을 위한 도덕정치가 구현되고 있는 곳일 것이다.

하지만 북유럽 복지국가가 자연스럽고 평화적인 정당 활동만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몰역사적인 인식에 불과할 것이다. 북유럽 복지국가야말로, 전간기(戰間其) 이후 내전을 방불케 하는 노동운동이 있었고, 이러한 계급투쟁의 결과, 체제 유지비용의 막대한 증가와 체제의 전복에 위협을 느낀 북유럽국가와 북유럽자본이 노동자계급에게 이윤의 일부를 복지기금과 임금 상승의 형태로 떼어주게 된 것이다.

이제 사유를 재시작 해야 하는 지점은 이러한 진정한 ‘공동체(주의)’의 설정에 대한 지점일 것이며, 이는 곧 ‘계급(공동체)운동’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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