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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작성일 : 12-09-14 14:32
국가와 폭력
 글쓴이 : 김승환
조회 : 4,407  

진보평론 53호(2012년 가을) 청년이론마당

김승환/
SKHU일반대학원 사회학과


문제제기


동학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제주4.3사건, 독재정권 하의 많은 의문사들, 5.18민주화운동 등 국가폭력 앞에서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들을 우리는 수없이 접해왔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리라 믿어왔던 그 진실들은 밝혀졌는가?

최근의 추이를 보면, 진실이 밝혀지기는커녕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 앞에서 그 죽음마저도 모욕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 하에서 과거사진실위를 통해 여러 가지 과거사 청산을 시도했다. 그런데 재발 방지를 위한 제반 입법안 마련은 국회에서 논의조차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반인권적인 제반 법규(형법 등)와 행정조치의 개혁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미흡한 청산이었다. 이로 인해 이명박 정부 하의 경찰이 오히려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다(김동춘. 2011b.)”.

일단, 과거사 청산은 국가 주도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오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정부조직인 과거사 위원회의 조사활동은 그것을 종결하는 하나의 중간 매개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즉 과거청산활동은 국가권력의 힘을 입지 않고서는 완수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국가는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자가 되기 어렵다. 국가권력은 과거의 잘못을 발생시킨 책임주체이며 아무리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로서 역할을 하기보다는 여전히 명령하고 군림하는 주체로 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김동춘. 2008.). 또한 피해 당사자들의 관심사가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심이 한정되는 점에서 오는 한계도 있었다. 결국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과거사 청산은 신청인 가족 개개인의 피해여부 확인 등을 통한 민원 해결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이에 김동춘과 조희연은 앞으로의 과거사 청산은 기억투쟁을 통해 시민 권리의식을 제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쿤데라는 기억하는 것은 투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식기억은 지배자의 역사해석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민중의 삶의 경험과는 배치되는 해석들인 경우가 많다. 과거청산의 이상과 목적은 권력에 의해 삭제되고 억압된 기억을 부활시킴으로써 공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김동춘. 2011b.).

 

시민권리 의식의 확장을 통해 과거의 교훈을 현대화시킨다는 맥락에서 이 주장에는 공감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국가폭력의 문제를 과거의 문제, ‘기억의 제고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에서, 과거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현재에 계속 반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즉 기억의 문제에 천착한다는 것은, 과거사 청산의 문제가 새로운 정권으로 하여금 과거 정권의범죄적 폭력에 대한 과오를 묻는 형식이라는 한계를 놓치게 된다. 이러한 청산의 구도 안에서는 폭력의 주체를 과거정권의 몇몇 인물로한정짓기 때문에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억압(국가권력)과 피착취자(민중)의 살아있는 권력구도를 보지 못하고, 죽어있는 권력에 대한 단죄만 가능하게 된다. 결국 신권력의 구권력에 대한 응징의 수준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로는, 아픈 과거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다. 유럽에서의 홀로코스트라는 과거사는 기억의 차원에서 잘 청산된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과거사에 대하여 잘 공유되어 있는 이 기억을 피해자 코스프레에 사용한다. 이스라엘을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행위조차도 반유대주의 정서로 내몰아,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절대적 희생자라는 기표를 지닌 채, 도덕적 비난을 초월할 수 있는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을 유린하는 현실은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의 역설적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사의 피해자에게 피해자라는 주체를 부여하고, 보상해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국가폭력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적 폭력의 종말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받은 (국가적) 폭력의 잔인함을 그대로 팔레스타인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자신들이 과거에 받았던 (주관적) 폭력의 끔찍함 때문에 여전히 피해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것이다. 한국의 과거사 청산도 피해자의 측면에서 접근(보상, 단죄, 회복)하면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하자.

과거사 청산은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수 있게 (고유명사로서 특정정권의 정부가 아닌) 보통명사로서의 국가자체에 대한 제약이 있어야 한다. 경찰 의전경 제도의 폐지, 군대의 양심적 병역거부 및 대체복무제 도입, 안보기관(군경, 국정원) 내의 명령거부권 인정, 예외주권 발현(국보법 등)금지, 내부자고발 보호 등을 통하여 국가에 대한 국민의 대항적 권한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일방적 권력 발휘가 불가능하도록 제약해야 한다. 더 이상 국가폭력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화석화되고, 국가화되고, 기념화되고, 박물관화되고, 곱게 재단된 구경거리로 전락시킴으로써, 결국 그 저항적 힘을 휘발시키는 사태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탄생 그 자체가 범죄……국가와 범죄는 그 자체가 동어반복이다.”(김동춘. 2011a.)라는 말처럼, 국가 자체가 폭력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개념인데, 국가 스스로 폭력성을 제약하도록 강제하는 힘은 누가 가질 수 있을까? 또한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저항의 힘(저항폭력)의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글은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에 대하여 다룬다. 특히 국가에 의한 과거사 청산의 한계점을 바탕으로 국가폭력의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또한 국가폭력의 대척점에 있는 저항폭력을 인격화된 폭력으로 간주함으로써 나타나는 위험성을 살피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국가폭력을 제어하되 민중의 힘을 증대시켜 올바른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국가폭력과 저항폭력

 

앞에서 나는 국가에 의한 과거사 청산 사례를 살펴보며, 국가폭력의 무조건적인 정당화를 제한하는 문제에 있어서 한계가 존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능한 변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국가폭력을 먼저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국가폭력과 우리가 통용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물리적 폭력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면, 국가폭력이 발생하는 시점에서 이에 저항하는 저항폭력의 정당성은 온전히 승인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먼저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발생하는 민중들의 폭력을 저항폭력으로 명명하고 이 둘을 구분해보고자 한다.

동학농민운동, 광주항쟁과 용산참사가 발생한 상황에서의 공통점은 국가가 국가폭력을 본격적으로 자행하기에 앞서 그들을 폭도로 규정지었다는 것이다.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유일한 주체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지점은 국가폭력 외의 다른 모든 폭력을 불법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국가폭력의 가장 음흉하면서도 괴기한 장면은 민중 스스로가 생명을 지키고자 행사하는 저항폭력을 불법적 폭력으로 규정짓고, 응보적 차원에서의 폭력 행사임을 선포함으로써 도덕적 비판을 무마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9.11사태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모든 움직임이 테러리스트로 규정되며 9.11사태가 무자비한 국가 폭력 행사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테러리즘이라 불릴 때 서로 다르게 구분되는 폭력의 값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확립된 국가들이 불법이라고 규정하는것에 의해 명명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테러리즘은 국가의 폭력에 비해 비이성적이고 무자비한 극악한 범죄행위로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저항폭력에 붙은 테러리즘이라는 딱지는 불법적인 자들의 폭력을 기술하는 이름이 되고국가폭력은 정당한 국가로서의 국제적인 인정을 사칭할 수 있는 이들의 특권이 되는 것으로, 전 지구적 폭력을 개념화하는 틀이 되어 국제적으로도 승인된다(Judith Butler. 2008.). 저항폭력에 대한 이러한 범죄적 이미지 부여는 미디어에 의해 더욱 부추겨진다. 미디어는 저항자들에게 범죄나 스토커 이미지를 마구 퍼뜨려 도덕적 공황을 불러일으키면서 도시의 경제적 폭력을 은폐하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고 정당화시킨다.”(Slavoj Žižek. 2011.). 한국의 미디어도 파업노동자, 시위대를 폭력성이 과다한 불법적 집단으로 묘사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폭력이 정당하지 못한지를 판별하는 것은 누가 물리적 폭력을 과도하게 행사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즉 영화 두개의 문에서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는 철거민들의 모습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데, 그러한 가시성을 근거로 철거민을 제압하는 경찰의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시성이라는 기준은 많은 사람에게 폭력에 대한 기준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시위대의 경우에도 비폭력을 지향하는 사람들(평화운동가)이 강박적으로 가시적 폭력의 분출을 억제하고자 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는 한국의 촛불집회가 자연산화하기 직전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오큐파이 시위에서 시위대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폭력이 시위자가 다른 참가자한테 경찰을 공격하지 말라고 휘두른 것이었다.”(David Graeber. 2012.)라는 형용모순적 사태를 소개하는데, 이는 일반 대중들이 폭력은 주관적 폭력에만 한정된다고 착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Slavoj Žižek. 2011.)라는 지젝의 주장은 매우 통찰력 있게 들린다. 시스템의 주입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관적 폭력이라는 구조적 폭력은 보지 못하고, 주관적 폭력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지젝은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두개의 문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의 한복판에 철거민들이 점거하고 있는 건물이 있다. 여기에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위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행사되는 저항폭력은 일상적 삶의 회복, 즉 생존 권리의 탈환이라는, 본질적으로 비폭력을 지향하는 것이지 폭력투쟁과 동질의 것은 아니다. 저항폭력은 국가폭력에 대한 인민 측의 반폭력, 바꾸어 말하면 생명력이라는 힘으로 한정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즉 이렇게 생명력으로 분출된 저항폭력과 국가폭력의 가장 큰 차이는 후자가 폭력조직 기구를 자기 긍정적으로, 점점 더 폭력을 격화시키는 방법 이외의 수단을 가지지 않는데 반해 전자의 폭력은 한정적이고 조건적이며 항상 비폭력으로 수렴되는 반폭력이라는 점이다.”(酒井隆史. 2007.).

따라서 국가의 폭력조직 기구로서의 특성과 구조적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을 감안하여, 국가폭력이 감행하는 이중폭력을 살펴봐야 하며, 거기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을 주관적 폭력으로 인지해 비판하면 안 된다. 또한 우리가 국가폭력에 대항해서 해야 될 일은 (과거사 청산의 궁극적 목표로도 지적했던) 폭력조직 기구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국가=폭력 기구의 현실 앞에서 어떻게해체가 가능할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다음 장에서 하고자 한다.

 

 

적대의 정치와 폭력

 

국가폭력에 대항하여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좌파진영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사회운동으로서의 해방은 오직 국가제도 바깥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삶의 모든 측면에 많든 적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도외적 반대는 제도에 통합되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절대로 필요하다(Werner Bonefeld et al. 2004). 즉 선거 등의 제도적 틀 안에서의 도구를 통하여 국가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다원주의적 대의제를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 변혁방법으로 여긴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맑스주의, 아나키즘, 급진좌파, 급진우파, 급단좌파, 급단우파 등 사회구성체에 대해 여러 주장이 상존한다는 것을 고려해봤을 때, 극단적 분열로 이어지지 않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원주의는 최소한에서 합의 가능한 지점으로 보인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으로 가는 것(전체주의)을 막아주는 차악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좌파의 모든 주장을 대의 민주주의정치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정치’, ‘화석화된 급진성’, ‘투표에서 득표를 위한 주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의회 민주주의 안의 진보정당들이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일지라도, 의회는 근본적으로 포함된 자배제된 자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즉 다원주의와 적대의 정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칼 슈미트는 정치의 영역에는 적과 아군의 구분밖에 없다고 하였다.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회색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배타적 구분에 근거한 적대의 정치를 옹호한다.

 

실제적 보편성은 서로 다른 문명들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동일한 기본적 가치들을 공유한다는 따위의 깊은 감정이 아니다. 실제적 보편성은 오히려 동의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유하는 부정의 경험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험 속에서,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혁명적 연대의 구호는 우리의 차이점을 서로 용인하자는 게 아니다. 혁명적 연대라는 건, 문명들 간에 이루어지는 협정이 아니라 문명들을 가로지르는 투쟁의 협정이기 때문이다(Slavoj Žižek. 2011.).

 

지젝은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적대의 정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서로 다름에도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차이의 정치는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만약 차이에도 연대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동일한 적을 가진 집단끼리의 연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변혁 수단이라고 말한다. 또한 민중과 권력(자본권력, 국가권력)의 적대의 구도 속에서 일어나는 민중의 폭력적 저항을 신적폭력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저항에서 사회변혁의 희망을 발견한다.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십 수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사태를 상기해보자. 빈민가의 군중들이 도심의 부유층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Slavoj Žižek. 2011.).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운동들이 제도화되면서 그것이 품고 있던 급진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약간의 개혁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지젝의 적대의 정치는 적실성이 있다. 경제적 부의 차이가 사회 전반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국가권력이 폭력을 동원해 이 불평등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진실을 깨지 못할 때, 사회변혁은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다원주의는 이러한 급진적 사고 및 폭력성을 지양할 것처럼 다루기에, 혼란을 야기하므로 피아를 분명히 하는 적대의 정치를 진보의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지젝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그의 주장은 지금 이 시대에 피아를 구분하는 계급적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불분명하다. 과거 맑스주의처럼 노동자와 자본가를 구분하는 계급의식을 강조하기에는, 둘 사이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다양해져버렸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그것보다도 오히려 노동자 내부에서의 심리적 계층격차가 더 커져버렸다. 더군다나 신적 폭력신화적 폭력의 구분은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객관적 판단기준이 없을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의 폭력을 신적 폭력’, 타인의 폭력을 신화적 폭력으로 자의적으로 규정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젝도 신적 폭력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

 

어떤 폭력이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기준은 없다. 같은 행위를 두고 외부의 관찰자는 그걸 단순히 폭력이 분출되는 행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직접 참여한 자들에게는 신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신적 성격을 보증해주는 대타자는 없으며, 그것을 신적 폭력으로 읽고 떠맡는 위험은 순전히 주체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신적 폭력은 주체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역사인 셈이다(Slavoj Žižek. 2011.).

 

따라서 이러한 적대의 정치가 품고 있는 선천적 한계인 이분법적 작위성(혹은 자기애적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차이의 정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저항폭력과 차이의 정치

 

지젝이 이야기하는 적대의 정치는 실은 슈미트가 고집했던 주권이라고 하는 문제 설정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투쟁은 중심을 어떻게 획득하는가(‘주권자는 누구인가’)를 둘러싼 것이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주권은 잠재적으로 늘 적대성을 내전(상대편의 소멸)으로 격화시킬 폭력성을 감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인 적에 기반한 모델은 이제 포기돼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델은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의 정치에 기반을 둔 시도가 새로운 국가폭력(전체주의)을 낳음으로써 완전히 실패하였음은 현실공산주의를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적대의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내재해 있는 국민-주권-국가의 삼위일체적 가정을 거부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권 설정에 의해 형성된 연결 고리를 거부하고 집권적 구심적인 흐름에 저항, 특이성의 발휘와 분산을 목표로 하기 위해 연합을 구성하는 복수의 경험, 비국가적인 공공권의 출현이라는 징조, 혁신적 삶의 형태를 지키기 위한 적대성만을 그 안에 내포해야 한다. 즉 인간과 사회에 대한 존재론적 가정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각기 흩어져 통합되지 않는 인간이나 집단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자연상태를 단순히 혼돈으로, 충만한 공포의 공간으로 표상하는 방식을 중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연 상태를 생산적인 일상생활의 실험이나 열려진 사람들의 조직 혹은 경험의 장으로서 긍정해야 한다(酒井隆史. 2007.). 이와 같이 특이성 발현을 위한 연대,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건강한 공존이 가능한 정치를 차이의 정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이의 정치적대의 정치에 기반한 국가와의 직접적 대결방식을 지양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폭력 수단의 화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화력이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조촐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 대결은 자본에 내재하는 사회관계의 형식을 채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군대는 다른 편의 군대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그리고 어느 쪽이 이기는가는 실제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혁명은 문지기의 코를 후려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의로 흐르는 문제로, 그를 하찮고 천박한 조소거리로 만드는 문제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酒井隆史. 2007.).

 

다카시가 혁명을 문지기와 싸워 새로운 문지기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흘러가 조소거리로 만든다는 비유는 매우 중요하다. 즉 군사혁명을 통해 주권을 대체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권 자체를 무시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두 나가자! 한사람도 남지말자는 구호가 등장했던 200112월의 아르헨티나 봉기에서는 신자유주의의 통치가 사회에 분쟁과 혼란을 초래하고 대표제를 공동화시켰다. 민중들은 혼돈의 해소를 더 이상 새로운 리바이어던에게 위임하기를 거부하고 무정부상태를 오히려 대안의 자주적 질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정부상태는 종종 동의어로 오인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주권의 회복을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질서의 지표로 간주하는 근대적 주권 논리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차이의 정치신적 폭력의 인위적 결정이라는 앞에서 이야기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본다.

 

민중의 압력이나 시스템의 해체로 인해 정치가나 경영자들이 도망가거나 통치불능이 되어 주권이 공중에 뜬 상태에서 생산적인 실험이 전개된다. 이를 혼돈으로 단죄하며 주권의 회복을 부르짖는 군사세력에 의해 치안이 확보되고 이 과정에서 가공할 만한 폭력이 발생한다. 이는 근대적 주권에 따라 다니는 악순환을 최악의 형태로 수없이 경험했던 라틴 아메리카 (일테면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의 전복) 민중에 의한 근본적인 대안인 동시에 리바이어던에 대한 민중의 방어 투쟁이기도 하다. 비르노는 적대성이나 폭력을 이 수준에서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폭력은 이 저항권 아래에서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위해 행사되는 보수적 폭력이 된다. 그리하여 적대성, 나아가 폭력은 적이나 적의를 절대화로까지 격화시키는 거울의 관계에서 해방된다(酒井隆史. 2007.).

 

차이의 정치에서 발현되는 이와 같은 생산적인 실험을 우리는 파리 코뮌이나 광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서는 곧 국가의 실체, 가공할 폭력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르노가 이에 저항하는 폭력을 민중의 방어투쟁, 보수적 폭력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러한 저항폭력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고, 민중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수비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저항폭력 개념을 통해 적대의 정치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 저항권이라는 것은 소중한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기에 법제정적인 국가의 폭력이나 범죄자가 행사하는 폭력을 위한 폭력과도 구분된다. 민중의 방어투쟁, 저항폭력으로서의 신적 폭력은 적대를 절대화시키는 거울관계, 적대의 정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국가폭력저항폭력’, ‘적대의 정치차이의 정치를 통해 저항(지양)해야 할, 혹은 지향해야 할 폭력과 정치를 구분해 보았다. ‘국가폭력에 대항한 민중들의 저항폭력을 주관적 폭력의 관점에서 윤리적 심판을 내리게 되면, 혁명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즉 비폭력행동이 아닌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거둠으로써 직접행동에 있어서의 운신의 폭을 좁힐 뿐만 아니라, 공권력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항폭력으로서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적대의 정치에 기반하여 폭력을 정당화 할 경우, 선악분별에 대한 어떠한 윤리적 고려 없이 적을 향한 무분별한 파괴와 증오로 치닫기 쉽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에 기반을 둔 저항 폭력을 지향해야 한다.

문제는 정당한 폭력인 저항 폭력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폭력의 행위가 전지구적 공공성(the common)을 확대 내지 보호하기 위한 저항행동인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공공성의 확장은 보편적 복지의 확대, 공공장소의 증대, 공기업 및 사기업의 공익적 성격의 강화 등의 정책적 방법을 통해 추진 가능하지만, 공공성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규범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추상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폭력의 정당성 기준으로 삼기에는 애매하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사회의 공공성이 제대로 확보되는냐의 여부는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의식주의 권한, 일할 권리, 호모사케르에 처하지 않을 인권)보장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고 본다. 공공성의 확대는 만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한 공공성이 제공하는 기준은 그러한 혜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의 최약자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호모사케르를 만들지 않는 사회를 창출하는 것이 공공성의 확보일 것이다. 중세 영주 시대의 불평등 신분제 사회 속에서도 그 마을에 아사자가 생기면 그 지역 영주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만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은 권력자의 중요한 책무였다(Karl Polanyi. 2009.). 하지만 정치적 평등사회를 도래시켰다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자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챙기기를 회피하고 개인의 이익과 권력만을 무한정 추구하고 있다. 지구 한쪽 편에서는 거대한 음식물쓰레기 처리 문제로 도시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 동시에 다른 편에서는 지구인구의 4분의1이 아사에 직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을 정지시키는 비상브레이크인류를 위하여전 지구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Walter Benjamin. 2008.). 그런 구조적 폭력을 중지시키는 저항적 폭력에는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재산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가 호모사케르가 되지 않을 기본인권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폭력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및 개별 국가의 단위를 초월한 연대이다. 그러나 또한 이 연대는 계급의식과 같이 적을 상정하는 적대의 정치에 기반하지 않는다. 공공성 여부의 바로미터는 바로 호모사케르에게 주어져있지만, 그 혜택은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혜택 없이도 생명권 유지에 문제없는) 부르주아지들도 받을 수 있는 보편권이 되어야 한다. 한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혜택이 되어야 한다. 즉 사회의 모든 생명은 보호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저항폭력은 신적폭력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가복음 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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