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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기획
 
작성일 : 14-12-29 10:19
지금, 민중신학에서 ‘운동’과 ‘현장’이란 무엇인가?
 글쓴이 : 정용택
조회 : 379  

진보평론 62(2014년 겨울) 특집 | 종교와 사회운동

지금, 민중신학에서 운동현장이란 무엇인가?

 

정용택 ·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원 / 민중신학·기독교사회윤리학

 

민중신학과 민중운동

후배님, 저와는 학번으로 10년 정도 차이가 나는 터라 우리가 학교에서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후배들을 통해 민중신학에 대한 열정으로 학회를 이끌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배님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후배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신선한 충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후배님은 그 글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운동을 신학적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신학이라고 주장했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신학은 데모와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일갈했지요. 그러므로 광장의 집회에 나가지 않고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선언했습니다.

글의 문맥으로 보건대, 후배님이 이끌고 있던 학회의 후배들이 후배님 본인에게 제기한 비판에 대해 반론 차원에서 쓴 글이었던 것 같은데요. 아마도 학회장인 후배님이 학교 안에서의 민중신학 스터디보다는 집회 현장에 대한 연대 활동을 더욱 중시하는 것에 대해 학회원들이 이런 저런 불만을 터뜨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후배님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고, 일차적으로 염두에 둔 독자는 당연히 학회 후배들이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 글의 저자적 독자혹은 이상적 독자는 반드시 학회원들로만 한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배님이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쓸 때, 후배님의 글을 지금의 학회원들보다 더 잘 이해해줄 수 있는, 후배님의 문제의식을 깊이 공유해줄 그런 독자를 분명 상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런 저자적 독자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 글을 읽고 난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압박감을 느꼈답니다. 후배님이 걷고 있는 길을 먼저 거쳐 온 선배로서, 현재 민중신학 연구자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집회와 투쟁의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후배님의 외침은 저에게 민중신학과 운동의 관계, 그리고 민중신학이 탐구하는 현장에 대해 다시금 짚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운동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하지요. 후배님은 민중신학이 민중운동을 신학적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신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규정을 그 자체로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민중신학이 신학적으로 증언하고 고백해야 할 현장이 반드시 민중운동에 한정된다고 보진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볼 때 특히 그렇지만 1970년대 태동기부터 민중신학이 증언하고 고백하고자 했던 민중사건이란 민중운동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초과하는 더 넓은 지평에서의 민중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지시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민중신학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논할 때 민중운동이 민중신학을 탄생시킨 중요한 맥락(context)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1970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상황에서 민중신학이 처음 출현했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변혁적 민중운동(및 마르크스주의)과의 대화 속에서 이른바 제2세대 민중신학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과 민중운동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최형묵, 1999: 17). 물론 시대인식의 차이에 따라 민중신학의 과제를 상이하게 파악했다는 점에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제1세대 민중신학과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제2세대 민중신학이 담론상의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내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1970-80년대의 민중신학은 당대의 기독교 사회운동 및 한국사회의 민중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응답으로서 출현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후배님도 잘 아시다시피, 체계적으로 이론화된 민중신학적 최초의 연구물은 바로 1975"기독교사상" 4월호에 발표된 안병무의 민족·민중·교회와 서남동의 민중의 신학: 김형효 교수의 비판에 답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안병무, 1975; 서남동, 1975). 이 두 논문은 1970년대 전반기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통해 촉발된 민중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본격적인 응답이었습니다. 동시에 이후에 한국교회의 투쟁에 있어서 민중이념이 그 기본 토대와 목표가 되게끔 성서적·교회사적·신학적으로 확정하는 최초의 이론적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창락, 1987: 95). 특히 안병무의 글은 무리로 번역되는 신약성서 "마르코복음"오클로스’(οχλος)를 한국사회의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던 민중(民衆)’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최초의 공식적인 연구 성과였지요.

이 글은 원래 197531일 기독자교수협의회 주최로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2·15조치로 석방된 김찬국, 김동길 두 기독교인 교수를 환영하는 3·1절 기념 예배의 설교 겸 강연문으로 발표된 글이었습니다. 기독자교수협의회는 그때 당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던 재야 조직이었고, 이미 그 예배 자체가 그러한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투쟁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바로 그 시절은 도시산업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노동운동 차원의 민중운동이 매우 강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그러한 흐름과 민중신학자들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지요. 이처럼 역사적으로 민중신학의 탄생 과정에 민중운동이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작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이 민중신학자로서 자의식을 갖게 된 인식론적 계기를 1975년 무렵의 민중운동이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일관된 목소리로 전태일의 비극을 성찰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민중신학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안병무, 1988: 117-118). 마치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통해 민중신학자들은 전태일로 상징되는 민중과의 만남을 한 순간에 강제당한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전태일 사건은 민중신학자들의 신학적 상상력의 기원이며, 성찰의 준거가 되는 사건으로 그들의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지난 2006년에 심원 안병무기념 사업회의 의뢰로 안병무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발견한 인상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무렵 안병무는 "현존"이라고 하는 1인 잡지를 내고 있었는데, 이 잡지의 197011월호 편집후기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관한 글이 발견된 것입니다(안병무, 1970: 46-47). 잡지에는 발행일이 111일로 표기되어 있는데, 어떻게 전태일에 관한 글이 있을까 놀라웠습니다. 재판을 찍으면서 끼워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그에게 그 사건이 충격으로 남았다는 증거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공식적인 민중신학적 텍스트가 발표된 197531일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19701113일 사이에는 거의 4년 반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인식론적 충격을 가져다 준 1970년 그 무렵에 곧바로 민중신학을 제창하지 않았을까요?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인데요. 그러한 전태일 사건이 노동운동사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유일무이한 자생적 신학담론인 민중신학이 탄생하는 데 있어서도 전태일 사건은 민중신학자들의 원체험’(原體驗)에 가까운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운동보다 전태일 사건이 민중신학의 탄생에 근원적인 동기였다면, 1970년대 전반기의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의 관계 역시 조금 다르게 설정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계속  

민중사건의 아포리아

 

사회적 영성과 정치의 도덕화

 

사회적 영성에서 정치적 영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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