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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기획
 
작성일 : 15-06-20 11:53
유인호의 ‘민족·민중·민주 경제론’이 21세기 한국 자본주의에 주는 시사점
 글쓴이 : 김창근
조회 : 713  

진보평론 64호(02015년 여름)    특집 | 한국 현대 진보지성의 궤적

유인호의 민족·민중·민주 경제론21세기 한국 자본주의에 주는 시사점

 

김창근 · 연세대학교 강사

 

 

 

 

1. 서론

유인호 선생은 1929년 생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연구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한, 한국의 비판적 경제학의 초기 세대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유인호 선생의 업적은 우리의 세대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고, 오히려 유인호 선생 하면 1960년대 초반 4·19혁명 직후의 비리재단 반대 투쟁과 1980년대 초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두 번에 걸쳐 해직을 당했던 해직교수 이미지를 더 많이 떠올리게 되는 듯하다.

그렇지만 유인호는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일제 점령기의 한국 경제 분석, 미군정 하의 토지개혁의 성격 연구, 1960-80년대의 한국 경제의 성장 방식에 대한 비판, 한국 농업의 협동화 연구, 경제민주화와 한국에서의 공해와 환경 문제에 대한 연구는 최근의 연구에서도 많이 인용될 만큼 뛰어나다.

이 글은 유인호의 여러 가지 학술적 업적 중에서 소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간의 성과대가에 대한 연구를, 특히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소개하고, 그러한 연구가 21세기 한국 자본주의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1960-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과 이후의 한국 경제의 전개과정을 설명할 때,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된 냉전 질서 속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외교 및 경제 정책과 냉전 체제 하에서의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및 분단 상황, 그리고 일본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위치 및 자본주의 발전 등의 국제 정치경제적 요인들을 강조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제 정치경제학적 입장은 한국 경제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원인을 정치지도자의 영도력과 유능한 일부 경제관료 집단의 역량’, 그리고 경제 관료들과 재벌의 밀접한 연계에서 찾는 발전국가론과는 달리, 1965년을 전후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정책의 변화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과 모순, 그리고 한국의 분단 상황이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까지의 한국의 경제성장 전략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 대한 유인호의 다양한 글들에서 이러한 국제 정치경제학적접근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유인호를 국제 정치경제학적 입장의 초기 연구자로 위치지울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또 다른 업적을 확인할 수 있을 있을 것이다. 또한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러한 입장에서 유인호가 제시했던 민족·민중·민주경제론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 유인호의 국제 정치경제학적 연구 방법론과 민족·민중·민주 경제론

유인호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자신의 많은 글들에서 민족경제’, ‘자립경제’, 또는 민족 자립경제와 같은 용어들과 그것들에 대립되는 개념들로서 매판경제대외의존경제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인호의 민족·민중·민주 경제론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유인호는 많은 글들에서 정확한 의미를 밝히지 않고 그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1) 자본주의 국제적 정치경제학적인 관점과 한국경제 연구 방법론

(1) 유인호의 한국자본주의사 연구방법론

먼저 봉건제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중세사회의 일반적 특징은 중세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반영하여 폐쇄된 상태에서 고립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근대사회는 자본의 운동 논리에 규정되어 한, 지역의 폐쇄된 범위와 고립화를 뛰어넘어 국가적 규모의 국민경제를 형성함에 머물지 않고 세계 전 지역을 자본 운동의 장으로 만들게 된다. 이 과정은 평온하게 진행되기보다 거의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인호는 이와 같이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경제가 각각의 지역적인 장원들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경향이 있는 봉건제 경제와는 달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등장한 이후의 세계의 경제는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인호에 따르면 지역적인또는 국가 단위개별적 연구로도 가능한 봉건제 사회의 경제사 연구와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사 연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개속의 국민국가로서 연구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인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역사적 진행과정에 대해 특징 두 가지를 든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종의 불균등 발전현상이다. 세계는 이제 자본운동의 논리에 따라 폭력적으로 세계사를 만들어 가는 나라들피동적·패배적 상태에서 자본 운동의 폭력성에 눌려 자본 운동 논리에 포섭되어 가는 나라들로 분할된다. 그렇지만 두 유형의 나라들은 모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고리에 묶여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동일 논리 위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특징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운동법칙과 관련된 것인데, ‘자본 운동의 확대에 따른 모순·위기일국 자본주의에 국한된 현상으로 작용하지 않고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걸쳐 작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국민경제는 자본 운동의 세계적 규모의 모순·위기 속에 각각의 조건에 따라 존립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인호에 따르면, 일종의 중심부주변부로 분할되어 존재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자체 모순에 따라 끊임없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모순과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국민경제는 끊임없이 재편을 강요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국민경제에 대한 역사 연구의 일반적 원칙역사 발전의 기본적 동인을 역사 활동 주체의 자주적·내적인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만, 유인호는 인류사의 보편적 과정’,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모순과 위기의 전개과정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유인호는 이러한 자신의 자본주의 민족경제에 대한 관점과 경제사 연구 방법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주의 하의 한국 경제와 같은 식민지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 사회에 있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사회의 역사 발전은 어떻게 해명되어야 할 것인가. 즉 자주적·내재적 발전이 부정된 상태의 역사 발전의 기본적 동인은, 내적 요인은 부수적인 것이 되고 외적 요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자주적·내재적 발전이 부정된 상태의 역사 과정마저도 내적 요인을 역사 발전의 기본적 동인으로 볼 수는 없다. 주도적 역할의 외적 요인과 부수적 역할의 내적 요인이 겹친 상태에서 변질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식민지 경제이므로, 겹쳐진 양면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침략 세력의 내부적 요구의 자기실현 과정으로서 식민지 사회의 경제는 규정되어지므로, 식민지 사회의 역사 발전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식민지 상태의 경제에서는 경제발전의 자주적이고 내재적인 요인이 부정되어 부차적인 것이 되고, 식민지 종주국의 내부적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외부적요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그 결과 경제발전은 왜곡되게 되기 때문에, 식민지 경제에 대한 연구는 내적 요인을 기본적인 동인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며,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라는 양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인호는 개항 이후의 한국 경제사 연구가 여전히 지역적이고 국가 단위의 연구에 머물러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수탈의 기록사에 그치고 있는 한계성을 지적한다. 대신 그는 개항 이후의 조선왕조의 붕괴기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확립되어 열강 자본주의의 불균등적 발전과 제국주의적 세계 분할의 격화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한일합방 이후의 식민지 지배도 종속적 제국주의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던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위기의 전가 현상’, 일본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산업혁명의 전개, 독점 자본주의의 성립, 그리고 전시 국가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의 부속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유인호는 이와 같이 개항 이후 식민지 해방 이전의 한국 경제에 대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는 국제 정치경제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적인 요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인호는 식민지 시기의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가 내부적 요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아시아의 격변기에 관련된 우리의 역사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 변태적 쇄도(쇄국)정치의 연구는 이 시대에 대한 한쪽 부분(내부적) 연구일 뿐이다. 세계사에 대한 왕조 권력의 대응과 지식인의 대응도 과장 없이 규명해야 한다. [그렇지만] 근대사 출발기의 외부 요인의 연구는 우리가 근대사를 결정짓는 다른 한쪽임에 분명하다.

 

유인호는 ‘1840년에서 1860년 사이의 세계사에 으뜸가는 사건인 아편전쟁에 대해 일본은 명치유신과 같은 주체적 대응책을 마련했던 것에 반해, 한국은 기록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주체의 무능에 대해 한탄한다. 그렇지만 그는 최근에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또는 식민사관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땅히 우리의 연구는 정체사관·식민사관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도 쉬지 않고 전진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주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세계사에 무지했거나 대응하지 못했던 역사를 숨겨서는 안 된다. 그것마저도 알알이 밝히는 곳에 올바른 역사 연구는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식민사관을 거부하는 유인호는 그 근거로서 “17세기 이후 18세기에 걸친 기간에 경제활동의 여러 분야에서 상업적·화폐적 관계가 급속하게 발전하였고, 봉건제도의 해체는 “19세기 개막과 함께 등장한 변태적 쇄도(쇄국)정치에 의하여 굴절되었지만, 스스로의 역사 법칙으로서 완만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외부세력의 침략이 없었다면, 봉건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경제·사회(가량 자본주의 사회)로 역사 발전을 전개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일본의 경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1870-1890), ‘변형된 산업혁명’(1890-1910)을 거치면서 종속적 제국주의로 전환하였고, 그러한 전환과정에서 나타난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위기의 전가 현상이 바로 일본주의의 식민지 지배 하의 조선 경제[]의 전가과정이었다. 그 결과 1905년 한일합방 이후의 조선 경제는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발전되었지만, ‘자립적인 자본주의 경제가 아니라, ‘식민지·반봉건적 성격의 자본주의 경제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인호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8·15 해방과 분단 이후에도 자립적인 경제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미국의 무상원조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경제의 모순의 전가 현상이었으며, ‘전후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재편성의 결과일 뿐이었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종속적 자본주의에 불과했다. 물론 1948년의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한국 경제는 국민경제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자본주의 주도국에 예속된 비-자주적[] 자본주의 경제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유인호의 국제 정치학적인 관점은 첫째,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조선 경제가 자주적이고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신념과, 둘째 외국 자본과 식민지 지배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은 선진 자본주의의 내부적 모순과 위기의 전가 형태일 뿐이며, 후진국 경제의 자립적인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2) 유인호의 자립경제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인호는 일제 강점기, 미군정기 그리고 이승만 정권 시대의 한국경제가 내재적이고 자주적인 요인보다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종속경제라고 판단한다. 그러면 유인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민족경제, 즉 자립경제는 어떠한 모습을 갖추고 있고, 또한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에 대한 유인호의 대답은 1961"경제자립의 논리: M. Dobb의 후진국개발론을 중심으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글에서 유인호는 후진국 경제발전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비판하고, 영국의 맑시스트 경제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자립경제론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유인호는 1950년대 선진국 내의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세 가지의 후진국 발전 이론을 제시한다. 첫 번째 견해는 후진국의 공업화에 대하여 소극적 내지는 부정적 견해를 가지는 종래의 고전적 자유무역 이론의 재판이고, 두 번째 이론은 후진국의 공업화를 긍정한다 하더라도 공업형태의 선택에 있어서 노동집약적인 선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세 번째 이론은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후진국 스스로가 공업화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곤란하다고보는 입장이다.

유인호는 세 이론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데, 첫 번째의 자유무역 이론은 선진국 우위의 유지·보존에 봉사하며, 세 번째의 이론은 종래의 아세아적 촌락공동체=봉건제의 보존을 의도하여 종래의 제국주의 지배의 안정적인 유지·보존을 지향하는 가장 기생적인 방향에 봉사한다고 맹렬하게 공격한다. 반면 두 번째의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우선론후진국 국내시장의 형성에 중점을 두고 공업화를 촉진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인면을 가지고 있지만 이 이론 역시 여전히 선진국 우위의 보존을 지향하고, ”후진국의 경제적 종속성의 조속한 탈피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인호는 위의 세 유형의 이론에 비판적인 돕의 "경제발전에 관한 방향"(Some Aspect of Economic Development, 1951)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 유인호에 의하면, 돕은 기계 적용이 공업보다 농업에서 제약되어 농업국이 공업국보다 노동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후진국은 공업화에 치중해야 하고, 후진국 공업화의 난점이 투자기금의 부족 또는 저축을 투자로 동원하기 위한 제도의 결여라고 주장하는 종래의 견해와는 달리, ‘경제조직의 문제라고 강조했으며, 후진국은 농촌에 방대한 잠재적 과잉인구가 존재하며, 그러한 과잉인구는 식량 생산을 감소시키지 않으면서도 공업부문에 고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유인호는 후진국의 공업화에 여러 가지 장애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첫 번째 장애는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다. 그러나 유인호는 적절한 훈련 조직체제의 확립과 장기적으로는 노동자들의 공업적 경험과 공업적 환경에의 적응에 의해서 해결될 것으로 본다. 두 번째 문제는 공업설비의 수입에 필요한 외화의 조달 문제인데, 이를 유인호는 농산물과 경공업 소비재의 수출을 통해 조달할 것을 제안한다. 세 번째 장애는 증대된 공업 노동자들을 위한 식량 증산의 문제인데, 이 문제는 공업화를 제약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농촌의 사회·경제적 조직변혁으로 해결가능하다는 생각을 내비친다.

나아가 유인호는 후진국이 육성해야 할 공업부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돕의 견해를 지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 효과가 빨리 나타나고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의 증가를 지향하는 투자보다 투자 효과의 결실은 늦지만 결국에 있어서 장래의 경제발전 ()율을 결정하는 중공업 지향의 투자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 즉 소비재 산업에 대한 투자의 길은 결국 다음 단계에 있어서의 투자활동의 수준을 제약하는 때문이며, 후자의 길은 종국에 있어서 고율의 투자를 유지함을 용이하게 하는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후진국의 경우 경공업을 특화또는 전문화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이론에 반하는 것인데, 유인호는 그러한 경공업 특화가 과거에 선진국의 중공업 제품의 수입 때문에 후진국의 자본집약적인 산업의 발전이 지연되었고 후진국의 발전이 일정 단계에 멈추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와 같은 유인호의 자립경제론 역시 국제적 정치경제학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국내 노동력과 농업과 같은 내부적인 요인들을 기본으로 하는 후진국 경제의 자주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볼 수 있으며, 자본재의 대외 의존에 의한 후진국 경제의 선진국 경제에의 종속에 대한 우려가 깊다.

 

2) 한국의 외자도입-수출주도 성장 전략의 형성과 유인호의 국제 정치경제학적 분석

유인호가 1988년에 한국 경제사를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연구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러한 관점에서의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는 훨씬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1960년대에는 주로 농업의 근대화와 농민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하였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 경제의 성장 방식을 비판하는 다양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그러한 비판과 함께 유인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소위 고도성장의 배경으로 언급되는 외자도입-수출주도성장 전략의 형성 과정에 대한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의 다양한 분석을 진행하였다. 유인호에 따르면, 그러한 전략은 세계 자본주의, 특히 미국과 일본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인 모순과 위기의 전가 현상의 귀결이었던 것이다.

먼저 유인호가 1960년대 초반 미국과 일본 자본주의가 각각 직면한 위기와 모순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그러한 위기와 모순에 직면한 미국과 일본 자본주의 전략이 어떻게 한국의 경제성장 전략을 형성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그리고 1970년대의 한국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유인호의 설명을 살펴본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의 무상 원조에 의존한 경제였는데, 유인호는 그러한 의존 경제가 독재 권력에 유착되고 미국 원조에 기생하는 일부 대기업의 경제 독점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중소기업의 지속적인 영락농업경제의 파탄이라는 민중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 권력이 지속될 수 있었던 물질적 토대인 미국의 원조가 1958년 이후 급감함에 따라 독재 권력 지속의 경제적 토대가 동요하고 억압되었던 민족운동의 고양이 1960년의 4·19혁명을 낳게 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원조 감소의 원인으로 유인호는 세계 자본주의와 미국 자본주의가 처한 당시의 모순과 위기를 든다.

먼저 미국 경제의 자체 모순 때문에 미국의 국제수지가 악화되었는데, 특히 1959년 이후에는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대규모화함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 상품 구매 정책’(Buy America Policy)달러 방위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원조도 삭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기술 발전의 양상도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유인호에 따르면 원자력 공학, 자동화, 전자공학, 우주항공공학, -합성물질’ 5개 부문에서 나타난 기술혁신에 따라 선진국은 낙후된 경공업을 비롯한 공업설비를 후진국에 이전시킬 필요가 생겼고,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이 공업설비를 이전하는 데 필요한 차관을 후진국에 제공해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서 미국 정부에게 미국 원조에 기생하는 한국과 같은 경제가 오히려 부담이 되게되었고, 그래서 한국 경제를 다른 보호자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관리하려는 시도라는 것이 유인호의 판단이다. ‘다른 보호자가 바로 일본 자본주의이고, 그러한 위탁 관리를 위해서 미국 정부는 1962년경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밖에서 강력히 지원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귀결이 19621112일에 합의된 김종필·오히라 메모이었던 것이다.

 

(2)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성장과 모순

유인호에 따르면, 일본 자본주의가 한국 경제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또한 일본 자본주의의 요구이기도 하였다. 일본 경제는 1950년대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여, 1960년대 초에는 패전으로 입은 폐허 시대를 기억조차 못하도록 변모해서 패전 전의 군사대국·경제소국에서 경제대국·군사소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인호는 일본 경제의 급성장의 원인 역시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당시 일본의 고도성장의 원인에 대한 논쟁에서는 국가의 역할, 군사비 축소, 질 높은 노동력, 높은 저축률·무역의 역할 등등의 갖가지 요인들이 지적되고 있었지만, 유인호는 그러한 망라적인 요인 제시로서 과연 성장을 충분히 분석하고 해명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고 평가한다.

대신 유인호는 1950년대 일본 경제의 부흥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전승국의 구제원조로 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이었던 일본 경제가 패전에 따른 정치적·경제적·군사적 폐허 상태를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506월에 발발한 한국동란이었다. 한국전쟁에 의해 초래된 일본경제의 전쟁 경기오랜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며 1950년 전후에 일본을 대공방위를 위한 병참기지로삼으려는 미국의 대일 정책 전환마저도 일본의 번영의 토대 기틀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한국동란에 의한 경제이익이 그러한 토대가 되었으며, 보완책이 미국의 대일 정책 전환이라고 주장한다.

유인호는 한국전쟁이 일본에게 가져다 준 경제적 이익1951-5년 기간에 3322백만 달러의 군수 특별수요에 의한 이익과 소위 양공주용역수입 7억 달러를 합하면 40억 달러가 넘는다고 추산한다. 게다가 이 전시호황 기간에 일본 자본은 국가의 재정 투·융자, 설비자금의 공급을 통해 철강·전력·석탄·조선 등 기간산업 부문에서 ‘1차 합리화를 할 수 있었고, 한국 전쟁 휴전 후인 1954년의 불황 과정에서 재벌의 재편성도 진행할 수 있었다.

나아가 한국전쟁이 일본 경제에 미친 영향은 50년대 전반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이 격화되었고, 그에 따라 전쟁 특수 기간에 확인된 일본 경제의 경제적·군사적 개발가능 잠재력을 대공방위 정책에 동원했던 미국의 대일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는 “50년대 후반기 이후의 일본 경제의 놀라운 장기적 성장과 결코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가진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미국의 정책 전환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자금과 기술, 중요 공업원료와 자원의 도입과 미국 시장이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지속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유인호는 일본의 고도성장을 외적인 요인으로는 한국동란미국의 대외정책의 전환으로, ‘내적인 요인으로는 전후 일본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일본 자본주의의 1955-61년의 성장과정의 특징인 설비투자 주도형미국의 대일정책 전환에서 유래된 결과.

하지만 1960년 초반 일본 경제는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경제는 1960년대 전반기까지 국제수지 면에서의 주기적인 적자를 겪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출시장 개척이 일본 경제의 과제였다. 다른 한편 원자력 공학 등의 5개 분야에서 일어난 기술혁신 때문에 노후화된 기존의 사양산업의 설비를 처리해야 했으며, 또한 공해산업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즉 사양산업·공해산업·노후시설을 해외로 이전시켜야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일본이 직면한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수 있었다. 일본의 국제수지는 한국의 무역수지 적자에 힘입어 “1965년 이후 비로소 대폭적인 수출초과 경향에 입각한 흑자 기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강력한 뒷받침하에서 추진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계기로 일본은 성장의 찌꺼기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3) 박정희 정권의 정권 유지와 한일 국교정상화의 문제점

유인호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국교정상화 성격을 군사정부가 존립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차관일 수밖에 없는 국제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정권의 존립을 위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일본 자본 도입을 위한 한일회담마무리로 규정한다.

미국의 원조가 격감하고 19621월에 박정희 정부가 작성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투자 재원의 조달이 막연한상황에서, 한일 회담 결과 19621112김종필·오히라 메모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도 국무장관 딘 러스크를 1964129일 방한시켜 한일회담을 촉구하였고, 101일에는 미국 국무성의 번디 차관보를 내한시켜 한일협정에 깊이 개입하였다.

유인호는 1965622일 동경에서 조인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으로 ”19108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는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 문장을 “36년간의 (식민지) 통치도 무효임을 확인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이 문제점의 근원을 일본으로부터의 경제협력 자금에 정권의 존폐를 걸게된 박정희 정권의 성격에서 찾는다.

게다가 한일 기본조약을 토대로 하여 체결된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정부 차관도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의 제공”(부속문서인 1의정서2)으로 되어 있는 점을, 유인호는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 이유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이란 노후시설·사양산업·공해산업이라는 생산물경공업 및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지도라는 용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 밀어닥친 일본 자본의 한국으로의 재진출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자립경제에 대한 의지마저 포기토록 강요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대외적으로는 외자에 의존하여 유지하게 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변화와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게되었으며, “미국의 이익을 유지·보호하면서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새로운 한국경제의 관리자인 일본 경제의 발전과 변화에 따른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게 되었다.

 

(4) 1970년대 국제 정치경제의 변화와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유인호는 1970년대 자본주의 세계경제 [상황]의 상징으로 1971816일의 달러의 금과의 태환을 중지시킨 달러 쇼크197310월에 시작된 오일 쇼크를 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었으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자본주의 선진공업국은 보다 자본집약적인 장치산업과 두뇌 집약적인 정보산업주축의 공업구조로의 개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선진자본국은 다시 제철공업·자동차공업, 그리고 일부 중화학공업 설비를 해외로 이전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 경제도 예외가 될 수 없었으며, 특히 이전의 일본 경제의 주력산업이었던 철광, 석유, 화학, 조선, 방직, 전자공업, 플라스틱 등의 산업들이 일본 내에서의 토지 이용과 공해 대책때문에 확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산업들을 한국에 넘기고 일본은 고도의 장치산업을 집중적으로 개발한다는 구상이 나왔는데, 그것이 1970422한일협력위원회 서울 총회폐막에 앞서 일본 측의 야쯔기 가즈오가 제안한 한일경제권 구상이다.

이 구상은 한국경제를 일본경제의 하청계열화하고 일본의 공해산업을 집중적으로 한국에 옮기겠다는 것이 유인호의 판단인데, ‘첫 과정의 핵심이 일본의 간사이 공업지대와 한국의 포항 이남의 남해안 공업지대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구상이 이후의 한일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데 있어 청사진이 되었다.

유인호는 1970년대 초반의 박정희 유신정권이 처한 상황을 정치면의 불만을 경제면의 고도성장으로 상쇄해야 하는 상황,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고도성장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처지로 판단한다. 그러한 성장을 위해서 정권이 선택한 것이 수출 제1주의이었다. 그러나 1965년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 수출을 조건으로 하여 설립된 외자기업도 국제경쟁력을 가지지 못하고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정권은 새로운 수출산업을 개발해야 했다.

때마침 노동집약적 중화학공업 설비를 해외로 이전시켜야만 하는 선진공업국, 특히 일본 자본의 필요가 있었고, 박정희 정권은 독재 정치체제로서의 전환, ‘10월 유신단행과 함께, ‘독재정권의 물질적 토대로서 외자 도입에 의한 제철·자동차·조선을 포함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다.

유인호는 유신체제 하의 중화학공업화 중심의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소수의 재벌기업이 수출을 생존의 절대명제, 한국 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새로운 단계, 그리고 노동 3권의 부정을 통한 저임금의 강요를 비롯하여 국가 권력의 힘이 무한대로 작용하여 수출을 원동력으로 한 경제의 고도성장 과정으로 평가한다.

 

3)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대한 유인호의 성과와 대가

이처럼 유인호는 한국 정부의 1960년대 경공업 중심의 외자도입-수출주도 성장 전략과 유신체제 하에서의 노동집약적인 중화학공업화 전략을, ‘발전국가론주장처럼 최고 정치지도자와 유능한 관료 집단의 현명한 판단의 결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전략들을 정권의 담당자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국제 정치경제적 환경 변화에 순응한 결과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 선택은 민족경제 또는 자립경제를 포기하고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확대시켰으며, 또한 민중경제를 파탄시키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유인호는 1960-70년대와 1980년대까지의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고도성장 과정에는 성과 못지않게 대가도 컸음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성장의 밝은 면에 도취되어 기적에 가까운 비약의 시대라고 찬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이 발산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유인호는 한국에서 1979년의 GNP1970년의 7.9, 1962년의 26.3배로 증가한 것에 대해서 세계에서 처음 보는 일이라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는 1979년의 수출이 1970년의 18, 1960년의 약 275배로 늘어나는 사이 1979년의 수입은 같은 기간에 10배 이상과 그리고 47.8배 증가한 것을 두고도 놀라움은 무역 면에서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1980-6년 기간에도 GNP1인당 GNP가 각각 58%44% 정도 증가하고, 수출은 같은 기간 약 두 배로 증가한 것도 놀라운 일로 평가한다.

그러나 고도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에는 외자 도입 기업의 부실화와 외채 상환문제, 그리고 높은 무역의존도와 대일 무역적자 등의 문제가 나타났다. 이에 대한 유인호의 비판을 따라가 보자.

 

(1) 1960년대 외자 도입 기업의 부실화와 8·3조치

먼저 유인호는 외자가 경제의 자립적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외자의 국적 성[]조정할 수 있는 민족적·민주주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어서 외자의 속성 중 자립경제를 해치는 부분의 기능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 한국의 외국자본 도입액은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1971년까지 3734백만 달러에 달했는데, 1971GNP 80억 달러와 비교하면 얼마나 거액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1962-4년에는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들여왔지만,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이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기술도입도 일본의 비중이 전체의 74%에 달하였다.

유인호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특정 연도의 경제성장률이 전년도의 외채도입 액수에 따라 크게 변동한다는 점이다. 예로 GNP 성장률이 13.2%, 13.4%, 15.9%로 매우 높았던 1966, 1968년과 1969년의 전년도에는 외채 도입이 높았고, GNP 성장률이 8.9%로 상대적으로 낮았던 1967년과 1970년의 전년도에는 외채 도입이 낮았다. 경제성장률은 외자도입의 변동에 따라 결정되었다.” 도입된 외채는 대체로 투자로 이어지는데, 민간소비와 투자, 정부지출과 순수출(수출-수입)의 합으로 계정되는 GNP가 자동적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GNP 성장률을 또한 당해 연도의 외채 도입액과도 비교한다. 예로 1966년의 경우 GNP 성장률은 12.4%인데, 같은 해의 외채 도입액은 1965년의 GNP7.6%에 해당한다. 따라서 경제성장률을 빼면 GNP 성장률은 5.8%에 불과하다. 1969년의 경우에는 GNP 성장률이 15.9%로 가장 높았는데, 외채 도입액은 1968GNP18.0%에 달해 외채 도입 자체에 의한 경제성장률을 빼면 성장률은 -2.1%가 된다.

그래서 유인호는 경제성장은 실은 외자 도입 현상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며, ‘고도성장=경이적인 외자도입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여러 가지 관련 사항들을 더 고려하여 다시 평가해 보아야 하겠지만, 중요한 지적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미 1969년경부터 외채 상환 문제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고, ‘외채 망국론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한 외채 망국론 제기 이유는 먼저 19716월말 외채 총액(계약 기준)35억 달러로 1970년의 GNP 70억 달러의 절반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외자 차입 기간도 점차 단기화되고 있었고, 외채 차입 이자율도 상승하고 있었다. 게다가 외채에 대한 원리금 상환액이 수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상 외환 수취 액수의 31%를 초과하게 되었다. 이 같은 문제점이 등장하게 된 것은 외자도입 기업들이 부실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인호는 외자기업들이 품질과 가격 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국내시장에서 독과점을 형성함으로써 막대한 초과이윤을 획득한 점을 외자기업 부실화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정부가 외채의 지불 보증을 해 준 것이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망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나오게 했다고도 평가한다.

유인호에 따르면, 정부는 부실 차관 업체의 정비를 단행하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차관기업에 지불을 보증한 금융계에까지 부실이 확산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결국 정부가 선택한 경제정책은 경제적 방법이 아닌 긴급조치, 197283일 대통령의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조치)의 발표였다.

8·3조치의 핵심은 1972“82일 현재의 모든 기업의 사채의 지불을 동결하고,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바꾸도록명령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인호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는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는 헌법 제20조에 어긋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외자 의존의 결과로 나타난 모순을 광범한 국민계층에 전가함으로써 기업을 구출하자는 방식이었다.

또한 유인호는 8·3조치의 성격을 경제외적 강제수단을 동원한 것이 유신체제에 앞서는 시점에서 경제조치로 나타난, “부익부 빈익빈과 소수 재벌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첫 모습으로 규정한다. 특히 이 조치는 당시 사채를 많이 대부해주고 있었던, 그리고 이제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경제적 유신으로 불리게 된 8·3조치는 결국 197210월의 정치적 유신 선포와 뒤이은 경제개발의 미명 아래 취해진 노동3권 제한 조치로 귀결되게 되었다.

 

(2)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전략의 실패와 1980년대 초의 외채위기

유신체제 하에서 추진된 중화학공업화 정책 역시 외채 차입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유신 8년간에 도입된 외채는 유신 이전의 10년간 도입된 외채의 약 6배이었다. 유인호에 따르면, “유신 8년간의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9.9%라는 높은 수치였지만, 그것은 같은 기간에 도입된 ‘222억 달러에 가까운 외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한국 경제는 1979년경부터 심각한 경제적 위기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유인호는 위기의 원인으로 수출 시장개척의 한계성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라는 국내적인 요인과 1979년의 2차 오일쇼크에 의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 확대에 따른 모순이 그대로 한국경제에 투영된 점을 든다.

그 결과 금융기관도 전체적으로 부실에 빠지게 되었다. 금융기관들은 자기 자본금의 3배에 가까운 4조 원을 부실 대출했으며, “2조원이 훨씬 넘는 돈이 회수불능 액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외채 상환 문제가 또 다시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1982년 말 외채 총액은 373억 달러이고 1982년에 상환해야 할 외채의 원리금은 7275백만 달러로 같은 해 GNP의 약 11%, 총예산(일반회계)68%에 달하게 되었다.

당시의 한국 경제의 외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는, 1980년대 초반에 외환위기를 겪고 IMF에 의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요당했던 중남미의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인호에 따르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채를 지고 있는 나라는 브라질이고 다음이 멕시코, 그리고 세 번째가 한국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인구가 브라질과 멕시코에 비해 적기 때문에 국민 1인당 외채는 한국이 가장 높았으며, 외채가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한국의 경우 198256.6%, 브라질의 31%와 멕시코의 40%를 앞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브라질의 경우 1983년 무역수지 흑자가 68억 달러에 달했던 반면, 한국의 경우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 확대를 통해 외채를 상환하는 것도 브라질의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외채 문제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경제지표에서 한국 경제는 브라질과 멕시코 등보다 더 나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국민경제 전체가 외자에 의하여 지배되는 형국이므로 외자의 관리는 공개되어야 했다. 그러나 외자관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외자 의존 경제의 전[] 기간에 있어서 거의 완전히 외면되었고, 외자 관리가 독재권력 체제의 단독 관리 하에 놓임으로써, 도입과정에서 부정중복도입과 과잉도입이 양산되었다. ‘외자도입심의위원회가 있었지만 “10월 유신의 정치적 폭거를 경제적으로 합리화하고자 하는 마구잡이 외자도입을 가능케 했을 뿐이다.

나아가 당시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자립경제라든가 민족경제라는 과제는 외면되고 오직 성장만을 추구한 점을 든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시대에서 공통적으로 가지는 사회적 가치, 가령 인간의 기본적 권리·자유·공정·민주주의·통일·쾌적한 생활환경 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말았으며, “성장을 위한 외자도입·수출산업 육성·개방경제·중화학공업화·공산품 수출에 의한 농산물 도입·소수인에 의한 전략산업 개발 등의 행위만이 인정되어 특혜로 지원했을 뿐이고, 그 결과, “기초산업은 몰락하고 자본·기술·원료 시장 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대외에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는 10·26사건을 계기로 유신체제의 종말을 고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유인호는 “4·19가 우연적인 것이 아니듯이 10·26도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10·26안에서 성숙한 힘으로서의 긴급조치 시대’(에 대한) 항쟁과 (해외)에서 조성된 조건의 산물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3) 높은 무역의존도와 대일 무역수지 적자의 문제

1960년대 초반, 특히 1965년 이후의 한국 경제가 수출 주도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추가하면서 높은 무역의존도와 대일 무역적자의 문제가 나타났다.

먼저 한국 경제의 무역의존도를 보면, 1965년의 25.4%이던 것이 1970년의 40.5%, 75년의 66.6%, 80년의 83.6%, 그리고 83년의 83.7%로 증가하였다. 경제성장의 속도만큼이나 급속히 무역의존도가 높아진 것이다. 유인호는 당시에 미국 경제의 무역의존도가 17% 정도이고 일본은 26% 전후이며, 유럽공동체(EC)의 여러 나라도 45%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무역의존가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유인호는 지나치게 높은 대외의존도에 기초한 한국의 경제성장은 내적 요인은 보조재가 되고 외적 요인이 주축이 되어(자본·기술·시장·원자재 면에서) 전개된 고도성장이며, 그래서 외적 요인이 지속되는 동안은 무사하지만 외적 요인에 변화가 생기면 고도성장 전체가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그 결과 대기업,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 모두가 국제시장의 동향에 의하여 그 생존이 결정될 정도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한국의 무역이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변동에 거의 좌우되며, ‘엔화 가치 상승미국의 달러 가치 하락’, ‘세계 원자재 지배 질서 교란에 따른 세계 인플레 요인은 그 대부분이 수입되게 되었으며, 수출이 증대되고 수출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금융적 지원이 커질수록 농업과 같은 내수산업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중요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지적한다.

유인호는 당시 한국 경제가 자본·기술·원료 면에서 수출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수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유인호는 한국 경제의 수출 경쟁력을 첫째로 저임금’, 둘째로 정부의 재정·금융적 지원’, 셋째로 기업들의 공해 방지 비[용의] 미지출에서 찾는다. 그래서 한국 경제의 놀라운 수출 증가는 저임금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의 희생, 정부의 수출기업 지원을 위한 민중들의 높은 세금 부담, 공해의 확산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게다가 저임금은 노동시장의 전근대적 특성을 유지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을 뿐이고, 수출기업에 대한 정부의 재정·금융적 지원은 내수산업을 위축시켜 생산과정의 재생산도 어렵게하였을 뿐이다.

다음으로 수출주도적인 성장을 해온 한국경제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였던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보자. 1966-83년의 18년 동안 한국의 수출 총액은 1,485억 달러이고 수입 총액은 1,840억 달러로서 무역수지 적자 총액은 355억 달러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일본에 대한 수출은 전체 수출액의 19.1%28374백만 달러이고, 수입은 전체 수입의 30%55127백만 달러이다. 그래서 대일 무역적자는 18년 동안 26753백만 달러로 전체 무역 적자의 75.4%나 된다. 한국의 무역수지 적자 문제는 대부분 일본과의 무역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66-83년 동안 일본의 수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4.7%이고 수입의 경우에도 2.47%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는 2737천만 달러이기 때문에, 일본 경제가 한국과의 무역에서 얻어 낸 흑자가 전체 흑자의 87.4%에 달한다. 즉 일본이 18년간 달성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1982년 말 일본의 금 및 외환 준비고23262백만 달러인데, 이 액수는 한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보다 적다. 달리 말하면 18년 동안 일본이 무역수지 흑자를 통해 축적한 모든 대외준비금이 한국과의 무역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유인호는 한국 국민들이 수출 증대를 위한 숱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러한 노력은 일본의 무역흑자를 늘려주는 역할과 일본의 금 및 외환보유고를 안정선에서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고, “지구상의 모든 곳에 해매다시피 고생 끝에 벌어들인 외화의 거의 전부를 일본에게 빨아 먹힌 꼴이라고 한탄했다.

 

3. 유인호의 민족·민중·민주 경제론21세기 한국 자본주의에 주는 시사점: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과 같이 살펴본 유인호의 민족·민중·민주 경제론은 국제 정치경제학적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인호의 국제 정치경제학적 입장은 1960-8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단순히 내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되는 외적 요인이라는 더 커다란 틀,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속에서 파악할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물론 유인호가 살던 시대의 세계 자본주의와 현재의 21세기 세계 자본주의는 성격이 매우 다르고,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도 매우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이윤율 저하 위기는 결국 1980년대 초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낳았고, 1990년대 초반 냉전의 해체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세계화는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으며, 최근 중국 경제 급부상은 -냉전체제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에 순응하여 한국 자본주의도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국가 주도경제성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금융 자율화와 무역자유화를 포함하여 신자유주의 방향으로의 전환을 시작하였다. 특히 1993년 김영삼 정부 이후 금융시장 개방과 재벌들에 대한 진입장벽 규제의 해체 등과 같은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그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패한 결과 한국 경제는 1997-8년의 경제·외환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은 IMF 구조조정을 통해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 결과 ‘2080 사회로 표현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자본주의는 유인호가 1960-80년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제기했던 문제점들을 극복하였는가? 확실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한국 자본주의와 사회 전체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던 1997-8년의 위기와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 자체가 유인호가 제기했던 문제점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인호의 민족·민중·민주 경제론21세기 한국 자본주의에 주는 시사점을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째는 유인호의 국제 정치경제학 관점과 발전국가론 비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인호는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 서 있으며, 그래서 발전국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과정을 단지 정치 지도자 개인이나 또는 일부의 경제 관료들의 역량의 결과로 파악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의 결과 나타난 미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경제정책의 변화와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른 국제 정치경제적 요소들이 한국의 외자도입·수출주도 경제 전략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또한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외국 자본의 유입을 선진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모순의 전가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이 막대한 성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루어진 과정이었으며, 끊임없는 모순과 위기가 점철된 과정이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외채 차입과 수출 위주 경제성장은 수출 대기업인 재벌에 대한 특혜와 노동자·농민·중소기업 등의 민중부문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이는 과잉투자·중복투자에 따른 과잉생산과 경제위기를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고, 미국과 일본 등의 경제 상태와 원자재 가격 변동과 같은 대외적인 충격에 극히 취약한 경제구조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유인호의 견해는 발전국가론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발전국가론은 경제성장을 개인이나 일부 개인들의 뛰어난 역량의 결과로 파악하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도 모순이 없는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고도성장의 대가는 철저히 무시한 채 성과만을 강조하고, 결국은 개인이나 개인들에 대한 미화와 찬양으로 귀결한다. 그들에게는 1969-72년과 1979-82년의 경제위기는 단지 스태그플레이션과 오일쇼크라는 외부적 충격의 결과일 뿐이며, 한국 자본주의 성장 방식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과는 아무런 연관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유인호의 국제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의 연구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후에 더 많은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더욱 구체적인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정 과정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개입이나 한국의 경제성장에 미친 베트남 전쟁의 역할, 또는 박정희의 자주국방과 군수산업 육성 정책이 한국 경제의 중화학공업화 전략을 왜곡시킨 문제점 등에 대해서 최근 많은 연구 성과들이 있다.

그러나 일본 자본과 국가의 전략이 한국의 경제성장 전략에 미친 영향은 많이 연구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유인호가 특히 일본 자본과 국가에 대해서 분석한 다양한 연구들은 최근의 연구들을 보완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게 보완된 연구 성과는 특히 박정희 정권이 독재는 했어도 경제는 발전시켰다면서 결국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유인호의 고도성장의 대가와 1997-8년의 경제·외환위기이다. 유인호의 한국의 고도성장의 대가에 대한 풍부한 연구는 1997-8년의 경제위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인호는 1969-72년의 위기와 1979-82년의 경제위기를 모두 외자 차입·수출 주도 경제성장 과정의 귀결로 파악한다. 그러면 1997-8년의 경제위기는 다른가?

사실 1997-8년의 경제위기는 1969-72년과 1979-82년의 고도성장기의 경제위기와 공통점이 많다. 두 경우 모두 외채를 도입해서 경제성장을 하려고 했으며, 정부 당국은 외채 도입에 대한 적절한 규제를 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모두 과잉설비·과잉투자를 낳아 결국 경제위기가 초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의 위기 때 들었던 과잉설비·과잉투자라는 말을 1997-8년 위기 직후에도 똑같이 듣지 않았던가?

다만 두 경우의 위기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의 두 차례의 위기에서는 정부가 차관 형태로 외채를 차입했던 데 비해, 1997-8년의 위기는 민간자본들, 특히 재벌과 금융기관들이 차입을 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위기가 해결되는 방식에서도 일정한 차이점이 있었다. 특히 1979-82년의 위기 때에는 미국과 일본 정부가 막대한 외자를 지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한국 경제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1997-8년의 경우에는 미국 정부가 한국 경제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그 결과 한국 경제는 IMF 관리 체제 하에 놓임으로써 한국 사회는 극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후자는 1990-1년의 냉전의 해체와는 관련이 없는 것일까?

나아가 세 위기 모두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들이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번의 위기는 8·3조치1980년대 전반기에 걸친 전두환 정권의 재벌에 대한 구제금융의 형태, 그리고 1997-8년에도 막대한 양의 공적 구제자금의 지원으로 이어졌는데, 세 경우 모두 위기를 양산한 당사자인 재벌들은 책임과 처벌을 받는 대신 오히려 더욱더 많은 특혜와 지원을 얻어냈다. 세 경우 모두 명분은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었고, 결국 위기의 최대의 희생자들이었던 민중들과 일반 국민들이 위기 해결 비용을 전부 부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는 유인호가 말하는 사회적 정의의 몰락이 아닐까?

셋째는 유인호의 국내 자원 의존경제발전과 21세기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다. 유인호가 1960-80년대 한국 경제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지나치게 높은 대외의존성의 문제는 현재의 한국 경제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상황에서 외채와 대일 무역적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도 막대한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지속되고 있다. 다만 1997-8년 위기 이후에 달러 당 1,000원 이상으로 유지되어 온 환율과 주력업종, 특히 반도체와 전기전자 및 자동차 등의 수출경쟁력 강화 등으로 인해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미국·유럽·중국 등과의 교역에서 얻은 무역수지 흑자가 대일 무역흑자를 충분히 능가하여 왔다.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외화를 한국 경제는 누적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유인호가 지적했던 지나치게 높은 대외의존도의 문제는 다른 모습으로 계속 한국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한국 경제는 2000-1년 미국의 IT붐이 붕괴되었을 때에도, 2007-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도, 2010년 유럽의 재정위기가 터져 나왔을 때에도,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일본의 소위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저 현상에도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어왔다.

최근 한국 경제는 이미 비정규직 고용과 외주화 확대 등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에 소비와 투자 등의 내수는 장기적인 침체 상태에 빠져 있으며, 수출만이 경제성장률을 어느 정도 유지해 왔다. 오히려 유인호의 시대보다 지금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더욱 높아진 것이다. 그 결과 세계 경제에 조금이라도 충격이 있으면 한국의 수출이 직격탄을 받게 되고, 경기침체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유인호가 40년 전에 줄기차게 지적해 왔던 양극화현상도 오히려 최근에 더욱 심각해졌다. 유인호가 지적했던 재벌과 중소기업, 그리고 농업 사이의 재생산 구조의 삼분화현상을 넘어서서, 이제는 재벌 대기업들 사이에도 내수산업이냐 수출산업이냐에 따라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그에 따라 재벌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의 양극화마저 확대일로를 겪어왔다.

유인호가 그렇게 강조해왔던 국내 자원 활용 주도형 경제발전, 즉 내수시장 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으로의 전환은 유인호가 살아 있을 때보다 현재에 더욱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듯하다. 다행히 최근에 일부의 정치권과 진보적 학계에서 소득주도 또는 임금주도 경제성장 전략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대안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비정규직 철폐와 사내 하청 문제의 해소 등의 고용과 임금의 안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성장을 위해 민중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되는 시대는 이제 진정으로 끝내야 한다. 유인호가 민중들의 생활을 위한 경제발전이 시급하다고 주창한 지 벌써 40년도 넘는 시간이 이미 흘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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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y 16-06-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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