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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작성일 : 13-06-27 15:10
신자유주의의 법치주의와 정치/삶의 형태의 재구성: 파업, 민사소송/손해배상의 정치적 의미를 중심으로
 글쓴이 : 엄기호
조회 : 677  

진보평론 56호 일반논문  

신자유주의의 법치주의와 정치/삶의 형태의 재구성:파업, 민사소송/손해배상의 정치적 의미를 중심으로

  엄기호 연세대 문화인류학 박사


1. 들어가며

 

대통령 선거가 끝난 작년 1221일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최강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일 아침 7시에 하던 출근선전전을 앞두고 다른 동지들이 나갈 때 그는 자고 있었다고 한다. 다른 노동자들이 그가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서 좀 더 자게하고 출근선전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창문틀의 비상용 소방기구에 스카프로 목을 매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노조의 조직차장을 맡을 정도로 강인하고 열성적이었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일까? 유서에는 전날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느꼈던 절망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5년을…….”이라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자본 아니 가진 자들에게 졌다고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왜 졌다고 말했을까? 그는 무엇에 진 것일까? 단지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박근혜의 당선에서 적어도 다음 5년 동안은 노동자들의 삶을 발가벗기고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자본과 권력의 탄압방식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죽음이 있을 수도 있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바로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이다. 최강서는 유서에서도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을 명시하며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손해배상을 철회하라고 절규했다. 한진중공업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고공농성과 사회적 연대 투쟁을 통해 92명의 정리해고자들이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복직이 되자마자 다시 강제휴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회사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부를 상대로 158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이에 따라 노조는 198일째 회사 정문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 글은 노동자 최강서를 죽음으로 몰아간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의 정치를 파업을 적대화하고 참여한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발가벗겨 사회에서 추방하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과거에 파업은 경제발전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점에서 형사처벌의 대상이었다. 독재시절 파업 등의 노동운동을 공안 사건으로 처리하였다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구속과 징역을 통해 사회/현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탄압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을 강제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더 이상의 목적이 아니다.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의 증가는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행동권과 개별 노동자들의 생존권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강서가 보도 듣도 못한 돈이라고 말한 것처럼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노조와 노동자를 경제적으로 파산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시장능력을 완전히 박탈함으로써 생계를 파괴하고 생계를 기반으로 묶여져 있는 가족과 친척 등 사회적 관계 역시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이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의 궁극적 목적이다.

민주노총(2002)에 따르면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노동조합의 재정적 취약성을 이용하여 임단협에서 사용주가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는데 활용되던 것을 넘어 노조를 무력화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나아가 손해배상 청구의 범위가 넓어져 조합원의 보증인인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개별 노조원들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어 가고 있다. 가압류 범위도 노조의 조합비에서 임금, 개인통장, 부동산으로 확대되어 사실상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민주노총, 2002:1)고 한다. 2003년 발생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분신자살에서부터 2012년의 최강서의 죽음까지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의 삶의 파괴는 일관되게 이런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파업에 대한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이라는 대응은 단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노사관계에 대한 법치주의라는 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통치 전략의 문제가 되는 이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손해에 대한 노동자와 사용자라는 당사자 간에 발생하는 민법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효과는 국가가 파업과 같은 사회적 적대를 어떻게 통제하고 처리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형사적 탄압에서의 사회적 격리와 구별하는 의미에서 사회적 추방이 통치 방식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사회로부터 추방되고 있으며 발가벗은 생명bare life’이 지배적인 삶의 양식이 되고 있다. 이 글은 왜 발가벗은 생명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삶의 양식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파업을 체제 내로 포획하려던 시도를 중단하고 다시 적대로 외부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법치주의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1) 권리와 면책: 적대의 내부화

 

2) 다시 적대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전략

 

3) 한국에서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의 통치화

 

 

결론: 지배적인 삶의 양식이 된 벌거벗은 삶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이 노동자를 벌거벗기는 방식은 시장능력을 박탈하여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손해배상을 당한 노동자들은 차라리 구속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한다. 손해배상에 따라 심리적 위축은 물론이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중압감과 그 동안 모은 재산도 제한되거나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족 내부의 갈등도 심화되고 직장을 중심으로 한 친구관계도 파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해배상에 따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족과 친구에게서 존재감을 상실한 채 쓸모없는 존재, 나아가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느끼게 된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이미 한 번 탈락하면 재기가 불가능한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로 전환(엄기호, 2009)하였다. 바우만(2008)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잉여인간을 생산하고 관리한다. 특히 노동의 기계화/전자화와 맞물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완성은 잉여인간을 단순히 일시적인 잉여인간이 아니라 영원히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시킨다. 이들은 생산과 소비의 영역 모두에서 경제적으로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어진다. 누구나 다 자신이 잉여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에 대한 대가로 해고가 된 노동자가 느낄 추방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에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전 재산을 위협한다. 이 재산은 한편에서는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되거나 다른 생계수단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의 생활의 근거가 된다. 또한 만일 복직이 되지 않았을 때 자영업이든 뭐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밑천이 된다. 손해배상은 바로 이 부분에 심리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위협한다. 손해배상을 통해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위협 당한 노동자는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과거와 해고자로서의 현재의 생계수단,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미래의 근거 전체를 위협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애 전체와 사회적 관계 전체가 파괴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갖게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일환으로 고안된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을 통한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 전략은 아감벤의 개념을 빌리자면 포함적 배제라고 볼 수 있다. 즉 법적인 체계 내부로 포함되어 처벌되지만 그 효과는 갱생을 통한 사회로의 귀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활동가, 그리고 노조원들을 파산시켜 사회로부터 영구 추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손해배상의 통치는 사건의 당사자인 개별 노동자의 처벌만이 목적이 아니다. 손해배상은 전체 노동자 계급 전체에서 공포의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에 대한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끊임없이 다음 순번을 기다리는 자들에 대한 예example로 작동한다는 의미에서도 아감벤적 의미에서의 포함적 배제라고 할 수 있다. 앞선 것이 뒤에 오는 것의 예가 되는 처벌의 효과란 마치 푸코가 감시와 처벌의 서장에서 이야기하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처벌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즉 처벌의 목적은 교화가 아니라 추방이며 이를 대중 앞에 전시하는 것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배달호의 사례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감벤 역시 쉬볼렛을 사례로 들어 예외상태에서는 본보기로서의 징벌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난다(아감벤, 2008:70)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위기 담론을 통하여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잉여인간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추방하기 위한 전략으로 법치주의를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효과가 법적 처벌 이상인 것이다. 법을 통한 사회적 격리가 아닌 사회적 추방이라고 불러야한다. 손해배상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시장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실존적으로도 발가벗겨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법치주의는 이 벌거벗은 삶을 노동자들의 잠재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벌거벗은 삶이 도처에서 지배적인 삶의 형태’(아감벤, 2009a:17)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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